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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리는 그림인생.

[열여섯까지]

by mato

그림 그리기로 예고를 나오고, 예대를 졸업했다. 전공은 서양화와 애니메이션.

연애 따위에 부끄러운 솜씨를 깔짝깔짝 부리던 시간이 한심하게 느껴질 만큼, 나에게는 제대로 완성한 그림 한 점, 애니메이션 파일 하나 없다. 나는 진짜 그림을 잘 그리긴 했던 걸까?

듣던 대로 손재주가 타고난 게 맞을까? 그림을 좋아하긴 했나?


한때 인생과 함께해온 그림 그리기를 타고난 재능임에 믿어 의심치 않아 자부심을 갖고 말하던

'ㄱ,ㄴ,ㄷ,ㄹ' 한글부터 크레파스로 따라 그린 5살.


그림을 시작한 최초의 기억이 동네에 하나뿐인 미술학원이 문을 열면, 당시에도 있었던 새우깡을 먹고, 낮잠을 자다가, 여러 명이 사용하는 커다란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가 학원생들이 떨어뜨린 몽땅 크레파스를 주워 고사리 손으로 정리하는 것이 선생님의 퇴근시간을 당길 수 있게 돕는 일이었고, 언니와 함께 맡겨지다시피 종일 미술학원에 있었던 5살의 기억이다.

해리포터 스네이프 교수님의 차가운 분위기를 닮은 흑발 단발헤어스타일의 여자 선생님이 학원 문을 잠근 뒤 시외버스정류장 가는 길에 위치한 집까지 함께 걸어가던 기억. 정확한 나이를 제외하곤 사실이다.


그림을 잘 그리게 된 최초의 동기는, 언니와 마주 앉아 8절 스케치북을 펼쳐 양쪽 페이지를 하나씩 차지해 그림을 그리던 날. 언니가 그리는 세일러 문을 보면서 따라 그리다 짜증이 나서 그만 서럽게 울음이 터졌는데 언니가 그린 세일러문과는 달리 세일러문의 큰 두 눈과 두 다리 모양이 짝짝이로 그려졌고,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다가 인내의 한계가 다다른 것이다.

순하디 순한 언니는 나를 달래주려 내 그림의 짝짝이 눈 하나를 감겨 윙크 눈으로 수정해주었지만, 나는 언니보다 못 그리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당시 음력 생일을 챙겨 매년 바뀌었는데 언니는 11월, 12월생, 나는 1,2월생으로 언니와 나 사이에 1년이 더 있다는 것을 까먹고, 한 두 달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혼자 착각하고는 조금 늦게 태어나 동생인 것에 괜히 억울해했다. 언니가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할 때도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따라 집을 나서 유치원 앞에서 집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온갖 핑계로 놀이터 그네도 탔다가 어슬렁거리며 유치원 안에서는 뭐 재밌는 것을 하는지 궁금해 유리문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마음 약한 선생님 찬스로 들어가, 간식을 받고 구현동화도 듣고 낮잠도 잤던 기억이 있을 정도로 단순히 언니가 가진 것을 나도 가지려는 심보가 강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마 그림이 아니었어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어른들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고집부리며 우는 나를, 그림에 대한 애착이나 열정으로 판단한 것 같다.

오해일 수도 있지만 왠지 언니는 이후 그림을 자주 그리지 않았고, 집에 있는 백지 종이란 종이는 다 내 차지였다. 8살에 맹장이 터져 입원을 했을 때도, 병문안 온 엄마 친구가 심심할 나를 위해 A4용지 1매를 사다 주셔서 신이 난 연기를 했지만, 속으로 설마 500장의 백지를 채워야 하는 건 아니겠지? 굉장한 숙제를 받은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의 이미지가 박혔고, 나를 소개하는 모든 서류에 취미는 그림 그리기, 특기는 그림 그리기, 맡은 부서는 미화부장, 장래희망은 늘 TV에 나오던 밥아저씨 같은 화가였고,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만화책방을 들락거리면서 내 꿈은 만화가로 전향했다.

또래에 비해 만화를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국민학교 때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를 대표해 그림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곤 했다.

과학 상상 글짓기 대회에 나가보려고 손을 들었을때도, 선생님은 나를 과학 상상 그림대회에 내보내셨다.

새로 오신 선생님이 그림대회 심사를 봤었다며 내 이름을 알고 있었고, 내가 매년 대상을 받는 동안, 매년 최우수상을 받는 친구가 있어서 한 번은 바꿔 준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나는 기억이 안 났다.

그림대회에서 대상을 탔다는 기쁨보다, 상을 탔을 때 크레파스가 업그레이드되었던 부분이 더욱 기뻤기 때문이다. 12색 크레파스는 24색 크레파스로, 36색, 48색으로 바뀌었다.

48색 정도면 상아색, 연보라색, 민트 색 등 파스텔톤으로 색깔과 색깔 사이에 그라데이션이 생겼다.

왜 그랬는지 금색, 은색은 쓰지도 않으면서 빌려주지도 않았고, 새것의 상태로 두었다.

그만큼 소중하고 한편으론 쪼잔 했다.

동네가 작고 그림 그리는 친구가 별로 없었기도 해서,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해도 거짓은 아니다.


미술시간이 되면 안 그려지는 부분을 그려달라고 내 책상 앞으로 줄을 섰다.

거절을 못했던 나는 친구들의 그림을 그려주느라 미술시간을 꽉 채워 썼고, 정작 완성하지 못한 내 그림은 선생님께 말씀드려 집에서 그려오곤 했다. 국사숙제로 지도 그리기가 나오는 날이면 집으로 전화가 왔다.

언니의 공주놀이에서 신데렐라 주인공을 나에게 시켜 줄 때, 그게 방청소 때문인지 몰랐을 정도로 나는 잘 속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특히 분위기 파악 못하고 순진했다.

순진한 호구 스타일이었던 나는 감기몸살 상태에서도 다른 친구의 국사 숙제 지도를 대신 그렸고, 혼자 숙제가 많아 억울한 마음도 있었지만, 이렇게 자랑을 늘어놓을 만큼 나는 지금 손바닥 사이즈의 그림도 채우지 못한다. 지금으로써는 유일한 내 그림이 쓸모 있던 좋은 기억들이다.



우리 동네는 하나밖에 없는 초등학교에서 하나밖에 없는 중학교로 자연스럽게 입학했기 때문에, 중학교 다음은 고등학교를 가야 한다는 것도 인지를 못했고, 어느 고등학교로 진학할 것인지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대책도 없었다. 그게 다른 친구들처럼 발을 동동 거리지 않았던 이유였으나...

음악 선생님이 떠드는 아이들을 야단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분명하게 잘 알고 준비하는 사람도 있다며 본받으라고 나를 언급했다. "너 예고 갈 거지?" 이어진 갑작스러운 질문에 무안하던 고개가 얼떨결에 끄덕여졌고, “ 좋겠다. 너는 예고 가면 되고...”나는 의도치 않게 부러움을 샀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언니와 같이 버스로 4~50분 거리에 있는 미술학원을 다녔다.

미술학원 선생님은 짧은 커트머리에 안경을 낀, 당시 유재석을 닮았다고 생각했던 여자분이셨다.

다른 학생들보다 일찍 도착해 학원 문을 열면, 선생님은 늘 이상하게 눌러진 까치집 머리를 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내려오는 테트리스 블록을 옮기느라 바쁘셨고, 고개를 힐끔 돌아보고는 “어어~준비하고 있어 봐.”하셨고, 그림 그릴 준비를 다했을 때쯤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며 말하셨다.

“어제 하던 거 있으면 해.”또는 “하던 거 완성했으면, 보고 그리고 싶은 거 골라서 그려봐.”

내 입장에서는 편했지만, 한편으로는 되게 쉽게 운영하시는구나 생각했다.


언니는 차분하게 과일이 있는 정물화나 자연이 예쁜 풍경을 골라 그렸고, 나는 파라솔에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있는 옛날 슈퍼, 놀이공원의 범퍼카, 자판기, 뽑기 기계 등 볼거리와 색깔이 많이 들어간 풍경을 골라 그리기를 좋아했다. 이런 부분을 캐치해 선생님은 엄마와의 상담에서 나에게 수학을 가르치지 않는 게 창의력에 도움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선생님은 나랑 같은편이 분명했다. 안 그래도 심하게 못하는데 명분이 생겨 수학은 당당하게 재꼈다.

학원에서 <그림 읽어주는 여자, 한젬마>라는 책을 딱 한 페이지 읽고, 냉장고에 그림을 그리고, 이유 없는 숫자들을 그리는, 상식 밖의 작품에 반해버렸고, 그렇게 처음 알게 된 예술 천재, 낙서 화가 ‘장미 쉘 바스키아’가 되리라 마음먹었을 때였다.

다른 학원 선생님들과 개최하는 전시회 준비로 선생님도 학원에서 그림을 그리셨는데, 문짝 사이즈의 커다란 캔버스에 노란색 바탕을 깔고, 삐뚤빼뚤한 선들로 손바닥 만하게 칸을 나누고, 칸 안에 각종 포즈의 졸라맨 들을 채우셨다. 중학생이었던 내 눈으로 봤을 때는 약간 충격적일 정도로 아주 형편없었다.

어떻게 이런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지?

유명화가의 실수로 찍은 점하나도, 튀긴 물로도 값비싼 작품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엄마가 나중에 나보고 미술학원을 차리면 되겠다고 말했을 때,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기껏 열심히 실력을 올린걸 복습하며, 남에게 가르치는 일?

엄마는 도대체 내 실력을 그렇게 밖에 안보나? 내 가능성을 정말 못 알아보시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미술학원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나에게는 어떠한 큰 도전들의 실패 끝자락에 위치한 최후의 자리였다.

그 정도는 그냥 하면 되는 거라 생각했고, 그전까지는 내 가능성의 한계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겸손하게 내색했지만, 속은 나조차도 낯선 야망이 하늘을 찔렀다.




어느 날 선생님은 야외수업을 한다며, 내성적이라 부끄러운 건지, 주눅이 든 건지, 다른 의견도 없고 수동적으로 따르는, 말 수가 적은 우리 자매를 차에 태워 고기를 구워 먹으러 갔다.

방지턱을 날아오르는 선생님은 운전 실력마저도 과감하고 터프했다. 그게 독특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입에서 이렇게 땡땡이치는 날도 있어야 한다며, 고기를 구워주시는데도 말 한마디 없이 입을 꼭 다물고 구워주는 고기만 먹던 언니와 나를 데리고 2차로 노래방에도 갔다.

누구 앞에서 노래를 불러 본 적도 없고, 마이크 앞에 입을 떼지도 못하는 언니와 나는 당시 모르는 사람이 없었던 박경림의 ‘늪’이라는 노래를, 반 강제적으로 선생님과 춤추며 불렀다. 언니는 부끄러워 웃음이 터졌고, 잘 웃지도 않던 어리둥절한 나는 어른이 시킨 거니까? 그냥 나라도 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성실하게 불렀다.

선생님의 자유분방한 모습은 처음 보는 선생님의 모습이자, 처음 보는 어른의 모습이었다.


겨울이면, 학원에 켜 둔 난로 위 따뜻한 물주전자로 타 주신 코코아, 율무 차.

시간이 지나 학원에서 함께 웃으면서 달고나를 만들어 먹었던 기억도 있는 걸 봐서는 선생님과의 사이가 꽤 좁혀졌던 것 같다.

이렇게 곱씹고 돌아보니, 말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우리 자매를 다른 어른들처럼 말을 하라고 혼내지도 않고, 답답해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게 하기 위해, 마음 써주신 것 같아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든다.

15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살면서도 몇 없는, 뇌리에 자리 잡은 멋진 어른, 멋진 분이시다.

마음 한켠에는 늘 그런 자유분방한 사고를 가진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미술, 그림 그리기라는 것, 또는 창작은 기술이 아닌, 과감한 소신과 자유분방함을 배우는 게 도움되는게 아닐까싶다.



유화를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밤 배경,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노란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풍경 그림을 보고, 똑같이 그려 내야 하는 미션을 받았다. 며칠 동안 손톱만 한 붓으로 노란색의 명도, 채도를 수십 단계로 나누어 찍고, 또 찍었다. 도저히 찍을 때가 없어 보였는데도 눈치를 보며, 반복해서 찍다가 인내의 한계가 다다랐을 때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이거 언제까지 그려요?”

“끝났어?”선생님이 되묻자,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저는 다 한 것 같은데...”

“그러면 끝! 네가 다했다고 생각하면 그게 완성이지.”

선생님 기준에서 미완성으로 보일까 전전긍긍하며 의미 없는 붓 터치로 눈치만 살피던 내게, 내가 그리는 그림은 내가 완성을 정하는 내 그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 인상 깊은 가르침이 있었다.

그동안 나는 내 견해에 대해 힘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늘 존재감이 없는 편이었고, 내 의견을 말할 기회도 없었으며, 내 의견이 뒤로 밀리거나 묵살되는 경우가 더 많아서, 늘 남의 의견, 또는 다수결에 따르는 게 익숙했다.

내 주체적인 사고에 감히, 확신을 가져도 된다는 것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우유부단함으로 단정 짓기에는 혼자로써의 소신과 취향이 무척 확고한 편이다.

귀한 가르침이 있었음에도, 이후에 내가 스스로 만족하는 완성의 그림을 그려내지 못했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언젠가는 그려낼 것이라는 가능성을 열어 두려는 기록이다.


p.s 선생님도 어디선가 까치집 머리를 하고 여전히 자유분방한 모습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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