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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키스사건

성추행

by mato


루즈해진 방 안 공기, 비워낸 술병들을 구석으로 옮겼다.

삼삼오오 앉아있던 친구들은 무거워진 상체를 바닥으로 눕혀 자리를 확보해갔다.

한 시간 뒤면 해가 떠오를 것 같은 시간이라, 기숙사로 가서 자는 게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았다.

“지금 기숙사 갈 사람?” 꽤 거리가 되는 오르막길을 혼자 걸어갈 생각을 하니, 무섭기도 하고 막막해서 물었고, 친구 하나가 지금 걸어서 올라가면 기숙사 식당 문 여는 시간쯤 되겠다며, 아침 먹고 자야겠다고 나와 함께 새벽길을 나섰다.




도심에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자연에 둘러싸인 어둡고 한적한 새벽, 캠퍼스로 가는 길.

여자 1. 남자 1. 보통 이쯤에서 어느 정도 눈치를 채거나 의심을 가졌어야 했나?

술에 취해 자취방에서 뒤엉켜 잠들고, 느지막이 일어나 뒹굴뒹굴 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 택한 움직임이었다. 꼭두새벽부터 걸어올라 차오른 숨을 내뱉으며 도착한 기숙사 식당의 문손잡이는 굳게 닫혀있었다. 아침밥을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었던 나는, 몇 분 뒤면 열릴 것이니 조금만 기다리자는 말에 딱히 의견이 없어서 계단에 앉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말초신경이 예민해지면서, 한 계단 뒤에 앉아있던 친구의 시선이 내 목덜미 뒤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다는 게 이런 것일까. 쉬고 있던 내 동공이 날카롭게 식당 문손잡이를 향했을 때였다. 찰나에 문이 열려 누군가의 인기척을 바랐던 것 같다.




얇은 재질, 느슨했던 나의 옷 후드를 잡아 내 콧등까지 씌우고, 내 상체를 뒤로 눕혀 덮쳤다.

짐승 같은 혀가 꼭 다문 내 입술을 떼려 했고, 당연, 소리를 지를 수 없었다.

가슴 앞 꽉 쥔 내 주먹을 걷어내려 했다. 뭐 대단한 가슴이라고 내가 가진 힘 전부를 써서 버텼다.

성추행. 이것은 성추행이었다. 설마 이걸 기습키스를 거절한 거로 생각하진 않겠지.

‘기습키스’ 누가 만든 단어인지 썩 불만스럽다.

사전적으로 ‘기습’은 생각하지 않았을 때 갑자기 들이침, 갑자기 공격함의 뜻을 가졌는데,

어떻게 ‘키스’ 앞에 갖다 붙인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키스 공격을 당했다. 성추행.

몇 분 전까지 만해도 친구였던, 쪼다 새끼는 힘으로 성욕을 해소하려던 것이 실패임을 알아챘는지, 손에서 힘주는 것을 포기하고 물러섰다.




나는 질끈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꼭 다문 입술의 힘도 빼지 않았다. 안전하지 않음에 긴장을 놓지 못했다.

가슴 앞의 주먹도 뼈가 으스러지듯 꽉 쥐고 있었다. 싸늘한 침묵 속에 온몸이 떨렸다.

누군가 사과는 급사과라고 했던가.

“미안해.”라는 말이 침묵을 깼고, 쥐고 있던 두 주먹을 펴 얼굴을 가렸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마치 죄를 지은 사람이 나인 것처럼 시선을 떨구고, 기숙사 입구로 발길을 내디뎠다. 나를 따라와 내 앞에 서더니, 내 손목을 잡아 가리고 있던 얼굴을 보려 했다.

나는 쳐다볼 수가 없는데 “미안해.. 술 취해서 실수한 거야. 괜찮아? 나 좀 봐봐. 진짜 미안해.”

계속해서 괜찮냐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해왔지만, 두 말 다 내가 대답할 만한 거리가 없었다.

실수라니. 괜찮냐니. 술에 취해 남이 입고 있던 옷의 후드를 씌워 힘으로 키스를 시도한 것이,

미안하다는 말로 내가 괜찮다고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실수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어느새 해는 떠 날이 밝았다. 나는 잡힌 손목을 뿌리치고 도망가고 싶었다.

반복되는 말에 고작 “들어갈래.. 나중에 얘기하자”라는 말로 겨우 그 자리를 벗어났을 뿐이었다.

이후로도 미안하다는 문자가 왔지만, 아무래도 말과 글이 그 일을 덮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앞뒤가 다르고, 계산이 맞지 않은 것과 같다.

결론적으로 뻔히 미안할 일이었고, 행동도,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어야 맞는 일일 뿐이다.

단체모임에서 마주치기도 했는데 그 자식과 가까이 앉거나, 말을 섞는 일은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같은 공간에서 웃고 떠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미 쏟아진 물에 제스처만 취하고, 닦지 않겠다는 태도가 괘씸해 보였다.

주변 친구들에게 이 얘기가 들어가고, 소문이 퍼지고, 하나의 우스운 가십거리가 될까 봐 불안 한건 오히려 나였다. 되도록 마주치지 않게 피했다. 애꿎게 내 후드 집업을 보는 것이 불편했다.




다행히 곧 방학이 되어 캠퍼스를 한동안 떠날 수 있었고, 그 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에게 이 일에 대해 말했다. 나이가 조금 많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나보다 어른이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했던, 혼자 끙끙대던 어린 날의 고민 상담이었다. 얘기를 듣고 화들짝 화를 끌어올린 남자 친구는 당장 연락을 하라고 했다.

그날 아침, 그 자리에서 신고는 물론, 한 대 때리기는커녕. 괜찮냐는 말에 ‘전혀 괜찮지 않다.’라는 의사표현 한마디도 못 하고, 조용히 피했던 나로서는 할 수 없는 반응이어서, 내심 기대를 했다.

나를 대신해 화를 내주고, 잘못을 깨우칠 만한 말을 하거나, 어떻게든 해결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는 그랬다. 일어난 성추행에 해결이 없다는 것을 몰랐던 그때는.

전화 연결이 되자, 쌍욕부터 퍼부으며 폰을 들고 자리를 비웠다.

뒷 내용은 직접 듣지 못했고, 조마조마하며 기다리던 나에게 씩씩거리며 돌아온 어른 남자 친구가 말했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며, ‘잘못했다고, 잘못했다고.’ 말해서 용서해줬어.”


용서... 용서라니? 누가? 왜?

쪼다 새끼에 병신 하나 추가. 그야말로 따끔하게 혼내고 쿨 하게 용서해준, 그저 아주 나이스 한 형이었다.

이것은 나를 생각해서 화난 게 아니라, 화난 척한 것이다. 내 눈에 둘이 그다지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뭘 기대한 거지? 성추행은 당사자만큼 누군가가 대신 괴롭고 화가 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한테는 치가 떨리는, 치욕스러운 사건인데, 그 새끼는 기억이나 할까? 아니. 절대 아니다.

아주 아무 일도 없던 듯 잘 살고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기억한다면, 기습키스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일,

누군가가 전화로 쌍욕을 퍼부어서 기분 나빴지만, 결론적으로 용서받은 일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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