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형벌이 두렵습니다.
성호를 그었다.
눈앞에 떠난 이를 위해, 나를 위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른손 끝이 이마와 가슴, 양 어깨를 지나 모여있던 재자리를 되찾자 혼돈의 물결이 머릿속에서 물러나는 기분이었다.
내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허공에 긋던 손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그에 따라 날 집어삼키던 혼돈의 물결은 더욱 심해졌다.
입을 열면 내가 아닌 소리가 날 것 같아 여태 소리들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더 이상은 한계였다.
결국 떨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신께 나의 존속여부를 물었다.
텅 빈 공간에, 나일지 모르는 목소리가 울러 퍼졌다.
“.. 진짜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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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아이들의 목소리가 내 귀를 스치고 뒤편으로 사라졌다.
PC방 방향으로 뛰어가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난 학원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두 달 뒤 기말고사인대 내 친구들은 너무 별것 아닌 듯 생각하는 듯하다.
저러고 시험 일주일 전에 ‘벼락치기의 신을 보여주겠다’라고 말하며 교과서를 배게 삼아 자겠지. 일주일 내내
물론 혼자만 공부한다고 억울하진 않다.
내 목표는 의대이니, 다른 꿈을 가진 친구들보다 더 노력하는 것이 응당하다. 그리고 그런 높은 대학은 노력한 이들이 들어가는 게 맞는 것이고.
어딜가건 ‘낙재생’이나 ‘꼴등’이란 타이틀로는 남고 싶지 않았다.
생각의 물결이 서서히 발등을 덮을 때 쯔음, 학원에 도착했다.
오늘은 영어학원. 요즘 영어 성적이 좀 떨어져 다시 올려야 했다.
‘10시까지 힘내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힘차게 학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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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 띠- 띠-
가지런한 기계음이 몇 번 울리고 집 문이 열렸다.
10시가 넘은 집은 거실 불만 켜진 채 엄마가 보는 TV 소리만이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아빠는 아직인가 보다.
“엄마 저 왔어요.”
집 안으로 신발을 벗어 정리하고 들어가자, 엄마가 날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한이 왔니?”
“오늘도 수고했어. 엄마가 맛있는 거 해줄게”
난 엄마의 말에 따라 식탁에 앉으며 벽 한편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11시 10분. 학원과 집과의 거리가 꽤 있는 편이라 끝나고 집에 오면 늘 이 시간이긴 했다.
시계 밑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아빠는 오늘 당직이에요?”
“아니, 급한 연락받고 병원으로 갔어. 아마 새벽 넘어서 들어오실 거야.”
“아.. 그렇구나.”
아빠는 외과의사다. 엄마는 교사. 둘 다 성당에서 만나 결혼까지 이어졌다 들었다.
그래서인지 난 남들과는 조금 다른 아이로 성장해 왔다.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만화를 보거나 하지 않고 책과 다큐등의 교육프로를 즐겼다.
물론 내가 12살 때 게임과 만화를 처음 접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아이들이 꺅꺅대며 노는 것은 어렸을 적 내게도 꽤나 부담스러운 행위였다.
난 조용한 게 좋았다. 엄마 아빠가 조용한 걸 좋아하니깐.
두 부모님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따라가면 늘 칭찬과 사랑이 뒤따랐다. 더불어 선물도.
종교, 공부, 책, 꿈 모두 난 언제나 나의 나침반을 따라가곤 했다.
만화나 게임 같은 방향은 나침반이 가리키지 않았다.
언제나 반짝이는 우상 같은 아버지.
언제나 아름다운 사랑으로 날 예뻐하는 어머니.
우리 가족은 그 누구보다 행복하고 화목한 가족이다.
“요즘 성적은 어떻니?”
내가 밥을 몇 술쯤 떴을 때 날아온 문제이었다.
“아.. 영어 빼면 다 괜찮아요.”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깐 걱정 마세요!”
내 말에 엄마는 싱긋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이 따뜻한 것이, 기분 좋았다.
“그래 우리 아들.”
“아들이 열심히 하면 하느님도 도와주실 거야.”
난 해맑게 ‘네’라고 대답하며 밥을 마저 먹었다.
그날 식탁은 나와 엄마뿐이었지만 늘 그렇듯 화목한 분위기로 식사자리가 마무리되었다.
내일은 그 자리에 아빠도 함께하길 원하며, 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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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기계음이 몇 번 울려도 공간은 고요했다.
영혼이 가지는 삶의 욕망을 보여주는 지표가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며 그 의지를 내 오감에 강렬히 새겼다.
하지만 그 지표는 닿지 않는 메아리 같았다.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이것저것 연결된 기계와 전선, 관들이 썩 유쾌한 광경은 아니었다.
흰빛을 띠는 정제된 공간에, 아빠가 누워있었다.
나는 멍하니 의식 없는 아빠를 바라보다, 점점 무너지는 엄마를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중환자실’
자동문 위에 저 단어가 끔찍이도 싫었다.
콜을 받아 수술 후 귀가하는 아빠의 차를 졸음운전하던 덤프트럭이 박아버렸다 했다.
아빠는 그 여파로 앞으로의 직업 존속 여부는 차치하고 생명조차 희미해지게 되었다.
‘식물인간’
생명을 살리던 멋진 영웅이 범죄자 때문에 죽어가는 것을 보자 하니 그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엄마 괜찮아요?”
병원 밖 밴치에 엄마를 잠시 앉혀두고 커피를 뽑아왔다.
그렇게 좋아하던 커피를 엄마는 거들떠도 보지 않으며 날 잠시 보곤 엉엉 울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나도 울 것 같았지만 나까지 울어버리면 엄마가 의지할 것은 없다 생각했다.
난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습관처럼 늘 하던 행동을 했다.
오른손 끝으로 이마와 가슴, 양 어깨를 짚고 다시 손을 모으자, 울컥울컥 올라오던 감정이 가라앉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신에게 내 감정을 의탁시키곤 괜찮은 척 엄마를 달래주었다.
“.. 엄마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 거잖아요.”
“식물인간의 가능성이 높지만, 다른 말로는 회복 가능성도 있단 거니깐. 엄마도 나도 힘내요.”
“제가 열심히 기도하고 도와드릴게요.”
그 말에 엄마는 나를 와락 껴안으며 계속 울었다.
무언의 말을 계속했지만, 그것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여서 뭐라 말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엄마가 의지할 것은 나밖에 없단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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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
집 앞에 도착했다.
안에선 늘 여전한 TV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엊그제와 똑같은.
평소와 다를 것 없었지만, 뭔가 강한 이질감이 들었다.
왜 대화소리가 들리지?
문을 조심스래 열고 들어가자 엄마가 날 맞아주었다.
.. 맞은편 다른 사람도 함께.
옆 동 친한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엄마의 손을 잡아준 채 엄마와 대화하다 인기척을 낸 나를 잠깐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직조한 듯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 지한이 왔니? 오랜만이다.”
“애구 힘들었지? 방에 들어가 있어, 아주머니가 엄마랑 얘기할 게 있어서 그래.”
난 그 말에 분위기를 깨기 싫어 조용히 목례만 하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방문을 닫고 침대 위에 앉아 조금 기다리니, 이내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한엄마 어떡해.. 힘들어서”
“이재 돈은 어떡할 거야.. 중환자실 돈이 얼마인데, 지한엄마 혹시 보험 같은 건 있어?”
“보험 있죠.. 근대 그래도 부담이에요.. 치료기간도 기간인대 지한이도 살려야 하니깐..”
“그리고 식물인간이면.. 언제 회복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말하며 다시 훌쩍이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몇 번 휴지를 뽑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우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의사가, 준비하라 말했어요.”
“시간이 지나도 상태가 너무 안 좋다고. 회복 가능성이 너무 낮고 살아도 평생 수술은 못할 거라 그랬어요.”
“그럼 제 남편은 어떻게 살아요.. 사람 살리는 일을 얼마나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살아도 삶을 빼앗겼고, 죽으면 삶을 찾을 수 없는 사랑을 보는 게 너무 괴로워요.”
“당장 숨 막혀 죽는 기분이에요.”
또 울먹이고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고조되던 소리가 서서히 가라앉자 아주머니가 말을 꺼냈다.
“지한엄마, 내 일 기억해요?”
“나도 사고로 남편이 떠났어. 그것도 자살로.”
“내 남편도 속 많이 썩였지.. 애매하게 구조돼서 병원비로 수천이 날아가고, 그 뒤로도 간병하는 나 괴롭히다 죽었지..”
“그래서 저도, 정말 괴롭고 죽고 싶었어요.”
약간 말의 텀이 생겼다.
감정을 가라앉히는 숨소리가 한번 들리고, 아주머니가 말을 이었다.
“근대 지한엄마. 난 뒤가 아닌 앞을 보기로 했어요.”
“내겐 딸이 있었으니깐. 나 때문에 딸이 고통받는 걸 보기 싫었어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선택을 했어.”
“남편인가 자식인가.”
“선택지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문책하는 것도 아니에요. 다만.”
“나는 앞을 봄으로써 새 삶을 찾았으니 지한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아 참 지한엄마.”
“이런 힘든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 있어요.”
“저랑 같이 한번 나가볼래요?”
그 말이 끝나자 엄마가 또 울었다.
이잰 듣기 힘들어 난 이어폰을 끼고 오늘은 일찍 잠들기로 했다.
하지만 난 그 ‘모임’의 실체를, 좀 더 일찍 눈치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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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 뒤로 기운을 차리셨다.
그 모임 덕분인지 예전 같은 모습으로 나를 대하고, 성당에서 기도했다.
엄마의 기도소리는 그 언제보다 크고 간절했다. 나도 따라 성호를 그으며 신께 간절히 빌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을 외치며
아빠의 생을 돌려달라고.
그렇게 6달이 흘렀다.
나의 간절함이 모자랐을까, 아니면 내 삶이 신실하지 못해서일까.
신은 우리 가족의 기도를 짓밟아버렸다.
6달간 매일 새벽과 주말 미사에 나가고, 병원에 가 아빠를 볼 때마다 기도하고, 내 행동이 문제가 되면 신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을까 해서 그동안 더욱 착하고 성실한 학생으로 살아왔다.
길바닥에 쓰레기 하나 버리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았다.
그리고 오늘 아빠는 공식적으로 뇌사판정을 받았다.
이잰 기계 없인 장기들이 죽어가는 일만 남았기에, 아빠는 기계가 없으면 숨조차 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와 반대되게, 난 대학에 합격했다. 목표하던 의대에.
공부할 때면 늘 현실과 분리되는 기분이라 아빠의 사고 이후론 더욱 현실을 바라보지 않은 듯했다.
‘앞을 봄으로 새 삶을 찾았다’
아주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아직 내 앞은 보이지 않았다. 의대 합격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저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내 앞을 비춰주던 것은 부모님이었다. 하지만 그 나침반이 부서진 지금 난 어둠에 싸인 길을 홀로 나아가야 했다.
나도 선택해야 했다.
부서진 나침반을 붙잡을지, 내 믿음대로 나아갈지.
난, 내가 살아야 엄마를 돌볼 수 있다.
나침반을 수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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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간 대학은 꽤 나와는 안 맞는 곳이었다.
MT, CC, 과팅 등등 썰이야 다양하게 들었지만 막상 이런 것을 들이대는 동기들을 보자니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내가 즐길 처지는 아니니깐.
하지만 MT를 강력히 권하는 학생회 일원의 고집으로, 난 억지로 MT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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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술게임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무식하게 채워진 술잔이 패자의 뱃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반복되었다.
난 그 속에서 늘 방관자 아니면 패배자였다.
좀 많이.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일까, 속에서 먹은 것이 올라오려 해 난 양해를 구하고 빠르게 방을 빠져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한번 게워내자 속이 한결 편해졌다.
게워낸 것은 지금 내 속 사정같이 냄새가 독했다. 보는 것이 흉하여 난 빠르게 물을 내리고 뒷정리를 한 뒤 칫솔을 가지러 방으로 돌아갔다.
칫솔과 치약을 가지고 입을 한번 씻고 난 뒤,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본능에 절여진 채 이성을 담보로 게임하는 그곳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난 잠시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쐐기로 했다.
“후…”
아직은 차가운 3월의 바람이 내 달아오른 양 뺨을 때렸다. 술로 인해 올라간 채온이 자연스레 내리는 기분을 만끽하며 난 잠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때 그분이네?”
들려온 소리에 뒤를 보니 그곳엔 나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작은 귀여운 여성이 서 있었다.
엄마처럼 이쁘고 고운 인상이었다.
“아~ 이름이 뭐라 했더라.. 그.. 그!”
“지한이요.”
“맞아 지한 씨!!”
“지한 씨도 술 많이 마셨구나! 저도 머리 어지러워서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요.”
“저.. 근대 저희 어디서 봤죠?”
내 말에 여성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씽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기억 안 나세요? 저 이다예예요!”
“예과 2학년 학생회!!”
“아… 아? 그때 그분?”
그래 그랬다. 날 MT로 오게 만든 장본인.
예과생 한 명도 빠질 수 없다 말하며 안 가려는 날 설득해 여기로 끌고 왔다. 솔직히 썩 반가운 사안은 아니었다.
그래도 대놓고 싫어할 순 없으니 예의는 차려 벽을 치기로 했다.
“아 그분.. 기억나네요.”
“MT는 즐거워요?”
“어 딱히요.”
“제가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진 않아서요.”
내 말에 다예는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잠시 눈을 굴리더니 날 다시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아.. 그래서 여기 계신 거구나.”
“MT가 많이 시끄럽긴 해요! 지한 씨는 조용한 거 좋아하나 봐요?”
“네. 전 조용한 게 좋아요.”
“왜요?”
순간 날아온 문제에 당황했다.
조용한 걸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이유를 묻는 건 무슨 문제인가.
“어.. 그냥요?”
“그냥 좋아요.”
내 말에 다예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약간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해 시무룩한 모습이었다.
“아~ 뭐 그런 사람들도 있죠.”
“저도 조용한 거 좋아하거든요. 시끄러운걸 더 좋아하지만!”
“각자만의 매력이 있어서 좋아요.”
그리곤 날 보며 다시 물어왔다.
“지한 씨는 뭐 좋아해요?”
여기서 끊을까, 생각도 했지만 이 사람은 앞으로 내 대학 선배이자 직장 선배도 될 사람이다.
여기서 싸가지 없이 말을 끊으면 내 평판이 안 좋아질 것이다.
난 적당히 대답했다.
“전 책이나 다큐 같은 거 좋아해요.”
“아.. 그런 게 재밌어요?”
“전 공부는 의무로 했어서, 노는 게 더 좋더라고요.”
“신기하네요.”
할 말이 다 떨어진 건지 정적이 둘 사이를 매웠다.
고요한 나뭇잎 스치는 소리와 바람소리. 그 주체가 되는 찬 바람이 내 코를 간지럽혔다.
난 여러 의미로 차가워진 공기가 점점 견디기 힘들어 ‘그냥 술자리에서 죽은 척할까’라고 생각하며 방 안으로 들어갈까 고민했다.
“.. 의대는 왜 들어오신 거예요?”
“네?”
“의사는 왜 되려 하시는 건지 궁금해서요.”
“꿈이었어요?”
“…”
꿈이었을까. 아니면 나침반이 가리킨 환상이었을까.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사는 삶이 옮다고 믿고 그것이 즐거웠는데 그렇다면 그것이 정답이고 내가 원하던 것 아니었을까?
환상이, 꿈이 될 수도 있지 않나?
“네.”
“와~ 멋지네요!”
“전 그냥 성적 맞춰왔거든요 하하!”
“.. 아직은 먼 이야기 같은데, 벌써 사명감이 있으신 것 같아서 멋져요.”
사명감. 사명감이라.
아빠의 삶이 생각나니 문득 울컥하는 기분이었다.
타인을 위해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나의 우상이자 영웅. 그의 삶을 움직이고 있을 원동력이 나에게도 있단 이야기는 머나먼 비약이자 와닿지 않는 환상 같았다.
다시 찬 공기가 우리 사이를 지나며 서로 간의 온기를 가져갔다.
다예가 혼자만 떠들며 띄워놓은 분위기는 바람에 실려가 버렸다.
난 이잰 슬슬 추워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내가 몸을 뒤로 돌릴 때, 다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기.”
“네?”
“오늘 대화 재밌어서 그런데.”
“인스타 교환하실래요?”
.. 거절하면 관계가 애매해지겠지. 아무래도 학생회 선배니깐.
그래 학생회니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니깐.
아까의 대화가 즐거웠단 것을 나만 모른 채 난 인스타를 맞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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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고등학교를 졸업해 더 이상 교복을 입지 않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그것을 입은 채 매일 학교를 등교하고 있었다.
다들 자유로이 시간표를 짜고 과 CC, 과팅이나 술모임 등을 가졌지만 난 개강총회 같은 의무적인 모임만 나갈 뿐 그 이상의 관계는 쌓지 않았다.
물론, 다예가 가자고 조르면 가긴 했다. 다예와의 대화는 즐거웠으니깐.
그렇게 우리 둘은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취미, 호불호, 연애사, 가족사 등등..
대답이 ‘그냥’인 나와 다르게 다예의 신념은 언제나 확고했다.
‘자유’ 자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 그녀는 그것을 아주 싫어했다. 때문에 다예의 행동 원리는 모두 근본을 따지고 보면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나 같기도 하고,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의대는 생각보다 타 대학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듣는 것과 달리 ‘그렇게 까지 힘들진 않은대?’ 라 생각했다.
딱 예과 때까지만.
본과로 넘어오니 엄청난 공부와 과제가 날 맞이했다. 고등학생때와는 비교되지 않을 수준에 난 알바도 관둔 채 시험이 있는 날은 밤늦게까지 공부했다.
성당은, 아빠가 뇌사판정을 받은 이후로 엄마만 가고 있었다.
엄마는 간절히 같이 가자며 빌었지만 난 간절히 외치던 나의 원을 짓밟아버린 신을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정중히, 엄마에게 말했다.
‘난 앞을 보기로 했어’
라고.
그 앞은 결국 돌고 돌아 하나 남은 가족인 ‘엄마’로 이어지는 것 이었지만.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 했다.
나침반의 침은 지금 제 갈길을 못 찾고 미친 듯 재자리를 돌고 있지만 난 그 길을 가리키는 원동력이 ‘사랑’ 임을 알고 있다.
죽은 아빠가 그러했듯, 그날 이전 엄마가 그러했듯.
과거에서 망가져 버려 삐걱대며 제 자신이 아닌 기도소리를 내는 엄마도 결국 그 근본은 사랑일 것이다.
언제부턴가 시계 밑엔 예수의 십자가가 때어져 있었다.
대신, 십자가를 휘감는 뱀 조각상이 식탁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고 엄마는 늘 그 조각상을 옆에 두고 밤이 되면 간절히 기도했다.
예수 조각상의 행방을 물어도 엄마는 ‘인테리어를 바꿨다’라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뱀 조각상은 불쾌했다. 지금은 아무리 불신자라지만 이 뱀은 성물인 십자가를 마치 쥐어 부술 듯 휘감고 있었다.
옆 동 아주머니도 더 자주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그리곤 주말마다 우리 엄마를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지곤 했다.
내가 출처를 아무리 물어도 엄마는 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내며 울 때도 있었다.
‘엄마에게 대드는 것이냐.’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냐’라고 소리 지르며 악을 써도 그 끝은 결국 몇 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는 곪은 울음이었다.
그 풍경과 소리는 자애롭고 신실했던 과거의 엄마가 아니어서 난 그럴 때마다 무어라 더 추궁하지 못한 채 엄마를 껴안고 달래주었다.
그 울음은 점점 내 영혼을 썩게 만들었다.
결국 난 시체가 되어 죽지 않기 위해 과거 늘 습관처럼 하던 행동을 했다.
오른손 끝으로 이마와 가슴, 양 어깨를 짚은 뒤 모이는 손.
하지만 성호를 긋는 손끝에 불신자의 죄책감이 묵직하게 느껴져서인지, 아니면 신은 애초부터 없던 것인지.
토해낸 그 작은 안위는 은총이 사라진 내 공허 속에서 흩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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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한아.”
“지한아?”
“..ㅇ.. 어 네?”
학식 먹고 수업 시작 전 좀 일찍 와서 공부하려 했는데, 어제 그 일탓인지 어제 잠을 못 잤다.
잠깐 잠들었는지 눈이 무거웠다.
날 깨운 다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너 괜찮아?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아.. 이러면 좀 힘들겠네..?”
“뭐가요?”
다예는 잠시 ‘음’ 하는 소리를 내다 말을 이었다.
“나 오늘 진짜 오랜만에 술 마시러 갈 건대 같이 갈 사람 구하고 있었지!”
“근대 다들 일정 있거나 거절해서.. 그래서 너한테 물어보러 온 건대..”
“많이 피곤해 보이네, 그럼 담에 보ㅈ”
“갈게요.”
“어?”
내 조급한 말에 다예가 당황하는 소리를 내었다.
나도 재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살짝 당황했지만, 지금 무언가 숨을 쉴 곳이 필요했다.
매일같이 낮밤을 가리지 않고 공부만 하는 데다 밤에는.. 그런 일까지 주기적으로 있으니 심장이 너무 답답했다.
난 다예를 보는 둥 마는 둥하며 성급하게 튀어나온 말을 갈무리했다.
“아.. 니 요즘 너무 공부만 하니깐 저도 힘들어서요.”
“전 가서 술 조금만 마셔도 되죠?”
“하하! 내가 언제 너보고 술 강요한 적 있었니?”
“너 주량대로 마셔. 무리하지 말고.”
“그럼 이따 보자! 수업 잘 듣고.”
‘다 끝나면 연락해’라는 말을 남기고 다예는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전 손을 흔드는 그녀에게 나도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오늘은 늦을 것 같아요. 그래도 12시 안으론 들어갈게요’라는 문자를 엄마에게 남겼다.
그리고 난 슬슬 들어오는 학생들 사이로 마저 교과서의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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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가게들은 으스스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술집 한편에 장식된 박쥐와 마녀모자를 쓴 해골이 어두운 블랙과 우드 톤으로 꾸며진 고급감과는 썩 어울리진 않는 저렴함이었다.
내가 전에 갔었던 소주와 맥주를 무식하게 마셔대는 떠들썩한 술집과 달리 이곳은 조용했다.
와인잔을 부딪히며 스테이크를 써는, 그런 분위기였다.
일단 자리에 앉은 후 메뉴판을 보며 선배에게 걱정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선배.. 여기 가격 장난 아닌데 딴 곳으로 가면 안 될까요?”
“제가 찾을게요.”
“야야, 걱정하지 마. 내가 사줄 거니깐.”
“뭐 샐러드 2만 원 하는 거에 졸고 그러냐. 그리고 나 돈 많아~”
맞다. 이 선배 돈 많았었지.
하긴 그러니깐 매번 본인이 연 술자리는 본인이 다 계산했었지. 그때마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20~30만 원 싹의 돈을 일시불로 긁는지 궁금했는데.
묻는 것도 실례고, 나 말고 다른 후배나 선배들이 물어도 답을 안 해주니 굳이 나도 묻진 않았다.
우린 세트메뉴를 시켰다. 난 파스타 하나면 충분하다 했지만 선배의 열렬한 스테이크 맛집 전도 때문에 결국 나도 세트메뉴로 주문하고 말았다.
파스타 하나 스테이크 하나 와인 하나 하면 세트보다 비싸니깐.. 나눠내도 비싼 와인을 고르는 모습에 기함했다.
메뉴를 기다리는 동안, 와인이 나왔다. 고기엔 레드와인이 잘 어울린다 하여 무슨.. 암튼 이름이 복잡한 와인을 시켰다.
웨이터가 부드러운 솜씨로 와인을 따라주었고 우린 그것을 받아 나만 기념비적인 ‘짠’을 했다.
“오..”
“어때? 어때?”
“좀 떫네요. 그리고 알코올도 있고.”
“포도향 살짝 있고… 향수 같기도 하고..”
난 그 외의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단 12만 원이 넘어가는 와인인대 맛이 고작 ‘향수 같은 포도향이 나는 떫은 알코올 희석액’은 아닐 것 아닌가.
하지만 와인을 처음 마셔서인지, 이것 이상으로 떠오르는 인상이 없었다.
일단, 그냥 갈무리하기로 했다.
“죄송해요. 맛은 있는데 제가 이런 걸 잘 몰라서..”
“하하! 아냐 아냐.”
“원래 술은 처음 마시면 다 그래. 인상이 단순하지.”
“좀 단 걸로 시켰는데 이것도 떫은 모양이내?”
“아 제가 원래 쓴맛을 잘 느껴요.”
“그래서 약도 잘 못 먹어요.”
내 말에 다예가 다시 ‘하하’ 웃으며 ‘그럼 다음엔 화이트 와인을 시키자’라고 재안 했다.
얻어먹는 처지에 거절할 깜냥은 안 되니 나도 알겠다 말했다.
이내 정적이 흘렀고, 난 내 옆에 나있는 큰 창 너머 자연으로 꾸며진 작은 정원을 잠시 바라보았다.
작은 연못과 돌다리, 물 위에 떠있는 단풍과 낙엽이 간신히 매달린 앙상한 나무.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찾아올 때면 간신히 매달려 있던 낙엽은 이따금 재자리를 놓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지금 그 말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그때의 간절한 기도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간신히 매달린 낙엽이 그때의 나의 모습 같아 썩 기분 좋진 않았다.
하지만 이잰 앞을 보기로 했으니 그때의 기억은 쥐고 후회할 가치가 없는 기억이었다.
바닥으로 힘 없이 추락하는 낙엽 같은 나약한 사람이 아닌, 주체적인 사람이 되기로 했으니 후회는 사치이다.
그래 주체적인 사람.
앞을 보는 사람.
고장 난 나침반에 끌려..
“주문하신 세트메뉴 나왔습니다.”
“아”
생각의 물결이 내 허리까지 차오를 때쯤, 웨이터의 말에 물이 모두 밀려가 버렸다.
난 재빠르게 음식을 받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식사를 시작했다.
“아까 뭘 그렇게 보던 거야?”
“네? 아..”
“그냥 저 정원이 이뻐서요.”
다예의 문제에, 솔직히 대답할 순 없으니 그냥 둘러대었다.
하지만 다예는 ‘흠’ 하는 소리를 내며 나를 그저 보기만 했다.
뭔가.
뭔가 들킨 것 같았다. 도둑질하다 들킨 어린아이마냥 주눅 들게 하는 눈빛이었다.
“어.. 선배 왜 그러세요?”
내 말에 바로 대답 없이 다예는 잠시 눈을 굴리다 썰려있는 스테이크를 한 조각 집어먹곤 대답했다.
“넌, 너어무 이질적이야.”
“네?”
“그니까 음..”
“현실에 붙어있는 것 같지 않아.”
“눈빛, 행동, 말투 하나하나 모두 다.”
“.. 공부 재밌어?”
난 늘 머릿속에 입력된 값을 출력했다.
“네 그럼 재밌으니깐 하죠.”
“.. 너 그거 알아?”
“너 긴장하거나 거짓말할 때마다 왼쪽 손을 자꾸 떨어.”
그 말에 난 나이프를 든 내 왼쪽 손을 보았다.
손이, 진짜로 미 새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걸 왜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지?
“근대”
“너 평소엔 안 그런다?”
“처음 만났을 땐 추워서 그런 줄 알았지. 하지만 너 곤란한 상황이면 무조건 그러는 거 보고 느꼈어.”
“이거 습관이구나.”
“그리고 그 상황들이 다 심각한 사안이 아니야. 그냥 너의 취미를 묻는다던지, 요즘 유행하는 컨탠츠에 대해 묻는다던지.”
“넌 그럴 때마다. 손을 떨어.”
난 멍하니 다예의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말 저런다고?
물론 저런 문제들이 나오면 당황하는 경우는 있었다.
난 넷플릭스나 왓챠 등을 보지 않으니, 심지어 영화조차 안 보니깐 그에 대한 문제이 나오면 늘 당황하곤 했다.
하지만 저 정도까진 아닐탠대?
“그래서인지 너랑 대화하면 뭔가 허공과 대화하는 기분이야. 마치..”
다예는 술을 한 모금 하고 말을 이었다.
“네가 없는 것 같아.”
“취미,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생각, 목표, 꿈 모두.”
“이유는 ‘그냥’이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난 내 손을 다시 바라보았다. 손은 여전히 미새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나의 내면이 당황스러웠다. 분명 아까까지 주체적이고 앞을 보는 사람이 되리라 마음먹었는데.
지금 내가 보이는 모습은 평소의 내가 아니었다.
고장 난 인형처럼, 삐그덕 대고 있었다.
“진짜. 진짜로 그것뿐이야?”
“…”
“지한. 너란 사람은 어디 있어?”
“아.. 어…”
이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문제였다. 풀이조차 감도 안 잡혔다.
내 의식이 공부로 도피하던 이상에서, 영혼의 지하 끝까지 끌려내려 오는 기분이었다.
그 끝에서 마주한 것은, 가려진 눈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모르겠어요. 진짜로 모르겠어요.”
“가족을 위한 삶이 옮은 삶 아닌가요?”
“누군가가 정해주는 길은 옮은 길이 아니야.”
“스스로 길을 찾는 것이 개인의 정답이지.”
“자유의지가 괜히 있겠어?”
“.. 전 이게 길이라 생각해요. 이게 자유고.”
“왜?”
어?
새로운 문제다. 아직 풀지도 못했는데.
“그야.. 그야.. 제게 부모님은 소중하니깐요..”
“멋지고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어요.”
이 정도면 충분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가족은 소중하지 않은가.
하지만 여전히, 여전히 다예의 눈빛엔 불만족이 남아있었다.
그 무언의 심문에 난 슬슬 기분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전, 제가 앞으로 나아가며 가족을 돕고 싶어요.”
“그게 이유예요. 그니까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해요.”
다예는 잠시 멍하니 나를 보다 이내 생긋 웃으며 ‘그래’라고 답했고 그날의 술자리는 그렇게 어영부영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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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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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요즘 책을 자주 사 오신다.
하나같이 종교서적들이다. ‘신이 진노하는 날에’ ‘천국 문을 두드리는 법’ 등등..
그리곤 그것들을 자신의 방에 소중히 보관한 채, 시간 날 때마다 정독하며 내게도 주말에 시간 없느냐 묻기 시작했다.
이쯤이면 바보가 아니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난 우선 그 책들의 출처를 확인해야 했다.
‘아브라함 출판사’
‘아브라함 출판사..?’
검색을 해보니, 이 출판사의 전신이 나왔다.
‘열두 지파 장로회’
그리고 이 교회는..
사이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