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색 열쇠
“으...”
전날에 많이 걸어 다녔더니 발이 좀 부은 것 같다.
그래도 한규가 가던 길에 발파스를 사 와 다 같이 붙이고 자니 확실히 발의 붓기가 저번보단 덜한 것 같았다.
준성은 올라오는 힙합정신에 먹힌 건지, ‘야 남자는 그런 거 필요 없어’ 라며 그냥 자버렸지만..
지금 내 발 상태와 작년의 발을 비교해 보니 분명 ‘뼈저리게 후회하겠군’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 일어났냐?”
화장실 쪽에서 나오는 한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방금 일어났어.”
“야 이거 발파스 좋다. 고맙다 야, 너 덕분에 좋은 거 알아가네.”
“뭘, 그거 일본 갈 때 꼭 사 오는 거래. 붙이면 발이 확 좋아진단다.”
“내 껏도 사는 김에 너희 껏도 좀 샀지, 같이 쓰자고.”
“확실히 좋긴 하네!”
기지개를 켜며 화답해 주었다. 그러다 문득 시간이 궁금해져 시계를 보았다.
8시 30분.
곧 있으면 준성도 깨워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다 잠시, 깨우기 전에 잠시 오늘의 계획을 체크 하고 싶어졌다.
“야 오늘은 뭐 하냐?”
“오늘은.. 온천 갔다가 밥 먹고.. 우메다 스카이 빌딩 갔다가.. 밥 먹고.. 술 마시러 갈 거야.”
“온천?”
“아, 너 몰라? 우리 숙소 바로 밑에 온천 있어. 정확히는 무슨.. 찜질방 같아 보이던데..”
그 말에 난 한규가 알려주는 장소를 검색해 보았다.
‘소라니와 온천’ 예쁜 포토존들이 많은 욕탕 같아 보였다. 찜질방내부에서 사진 찍기 좋겠단 생각이 들어 ‘카메라를 챙겨가야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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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이 되어 우리는 욕탕으로 이동했다.
프론트에서 주의사항등을 듣고 결제 후 기모노를 빌리기 위해 탈의실 옆 대여실로 이동했다.
준성은 바로 손에 잡히는 검은 기모노를 잽싸게 집곤 갈아입고 오겠다며 순식간에 탈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준성과 달리 난 좀 깊은 고뇌에 빠졌다. 검은색이 맘에 들긴 하는데, 허리띠는 남색이 더 예뻣다.
한참을 고민했을까.
“야 그냥 검은 옷 입고 허리띠는 남색 하면 안되냐?”
“오”
“너 천재냐?”
한규의 도움으로 고뇌의 상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기모노를 다 고르자 한규는 남색 기모노를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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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의 후 전신 거울로 이루어진 통로에서 갈아입은 기모노를 보았다. 허리띠 쪽에 나있는 파도모양이 상당히 멋진 옷이였다.
옷은 어두운 남색이여도 허리띠는 파스텔 톤의 하늘색에 반짝이는 금빛과 흰색 실로 파도 모양이 나있어 그런지, 굉장히 힙한 조합이 완성되었다.
자연스래 카메라가 생각났지만 여긴 좁은 통로라 참기로 했다.
“야 너 사진기 들고 왔네?”
바구니가 망으로 되어있어 안이 보여서 준성이 카메라를 발견했다.
쩝, 포토존만 찍으려고 들고온건데.
“야 이 새끼 목욕하러 와서도 사진 찍게? 하하!”
“아 씨 놀리지 마! 공원 같은 곳 있어서 거기 찍으려고 가져온 거야.”
“뭐야, 여기 공원이 있어?”
준성의 말에 한규가 대답했다.
“어. 여기 족욕도 할 수 있고 산책도 가능한 공원이 있어. 3층.. 인가 4층이었나?”
“일단 거기부터 갈래? 발 시리다.”
“어 그럴까?”
둘은 순식간에 날 앞질러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서둘러 나아가며 주변을 조금씩 둘러보았다.
멋있게 꾸며진 식당과 게임장 하며.. 심지어 닥터피쉬도 있었다.
‘신기하네’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담아둔 채, 얼마 뒤 우린 족욕탕에 발을 담갔다.
온도는 기분 좋은 따스함이었다. 마치 커다란 대형견이 내 발 위에 앉아있을 때의 감각이었다.
반대로 10월 후반의 날씨는 약간 시원 씁쓸했기에 그 포근함이 더 가중되어 느껴지기도 했다.
어재의 인천공항에서보단 덜 추웠기에 기모노 한 장으로도 기분 좋게 밖에 앉아있을 수 있었다.
우린 말없이 따스한 물에 발을 담근 채 공원만 구경하고 있었다.
준성은 사진을 몇 장 찍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에게 문자 하는 듯한 타이핑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가족 아님 여친일 것이다.
한규도 잠시 전화를 받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비추는 화면을 잠시 보니 ‘엄마’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문득, 나도 가족이 생각났다. 하지만 연락하기엔 좀 애매했다.
그야 난 도망치듯 집을 나왔으니깐.
음악을 반대하는 가족을 피해 고작 300만 원만 들고 반지하에서 살기 시작한 걸 마지막으로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본 적은 없다.
여태 단 한 번의 지원도 없었고 연락조차 없었다. 내가 음악으로 궤도에 오른 이후에도.
그런 기억 저편에 잊으려 묻어둔 사람들의 칭호를 다시 보게 되니, 뭔가 싱숭생숭한 기분이 들었다.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내볼까..’
그걸로 말을 터볼까 싶었지만, 이내 약간의 자존심이 올라왔다.
사랑이란 이름 아래에서 날 괴롭혀 놓던 그 사람들에게 다시 고개 숙여 다가간다니. 거기에 단 한 번의 선 연락도 없었는데!
그냥 안 하기로 했다.
“야 얘들아. 우리 이재 목욕하러 가자!”
한규의 말에 한참 다른 곳들에 몰두하던 우리 둘은 ‘아차’ 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기모노가 물에 젖지 않게 조심스래 어기적 어기적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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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흐~ 좋다!”
바깥에 있는 제일 뜨거운 노천탕에 나란히 몸을 담갔다.
생각해 보니 목욕탕을 안 간 지 벌써 2년이 넘었는데, 이렇게 타국에서라도 그 감성을 느껴보니 새롭고 추억이 샘솟는 기분이 들었다.
“야, 준성아 한규야. 너희는 목욕 끝나면 뭐 먹었냐? 난 커피우유 먹었는데.”
“야~! 할아버지가 그걸 사주셨어?”
준성이 내 말에 감탄사를 흘렸다. 그렀었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난 조부모님 손에서 자랐다. 특히 할아버지와의 목욕탕에 대한 추억은 각별하지.
“그렇지! 마시고 싶은 거 다 마시라고 하셔서, 그때 커피우유 골랐었어.”
“야.. 부럽다. 난 두유 먹었는데. 베지밀 유리병으로 된 거.”
한규가 부러움을 표시하며 손가락으로 유리병을 그려보았다.
“참 어릴 적은 알다가도 모르겠어. 지금와서 보면 두유도 괜찮은데.”
“그리고 가끔가다 두유가 땡길 때도 있고 말이야. 그렇지?”
내 말을 한규가 받아쳤다.
“그니깐 말이다.”
“난 그때 바나나 우유 먹고 싶었어. 제티랑.”
“난 레스비!”
“커피우유도 먹고 싶었고. 근대 엄마가 커피라고 절~대 안 사주셨지.”
우린 한차레 추억을 회상하며 조용히 끌끌 웃었다.
이내 우리들의 고요한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벽을 때리고 때려 서로 뿐인 공간에 가득 차버렸다.
그러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런 도란도란함과 오래간만의 유치함이 포근하다고 말이다.
시시한 농담 따먹기와 함께 어릴 적 추억을 상기시키니 그날. 할아버지 손을 잡고 커피우유를 먹던 내 안에 소년이 고개를 빼꼼하고 내미는 기분이었다.
“야 몸 불겠다. 나가자.”
물에 잠겨오는 몽글몽글한 감정이 준성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그는 탕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우리도 따라 나가며 뒷정리 후 기모노를 다시 입고 1층 식당가로 내려왔다.
“음.. 배고픈데...”
“여기서 밥 먹을까?”
“아냐 아냐, 우리 밥 먹기 전에 사진 한번 찍자.”
아까의 기분 탓일까, 약간 유치한 행위가 하고 싶었다.
단체사진 같은 거 말이다.
“앵? 웬 사진?”
“야 씨 너 여자냐? 뭔 사진이여 사진은..”
“그리고 지금 머리도 촉촉해서 못생겼구먼 찍을 거면 아까 찍지.”
내 제안에 준성이 머리를 털며 불만의 의견을 내놓았지만 그건 이내 한규에게 묻혀버렸다.
“오.. 사진 좋네.”
“저기 다리 어때.”
한규가 가리킨 곳엔 마치 일본 에니매이션에서 자주 볼법한 다리 모형이 있었다.
그 뒤로 꽃문양이 그려진 엘리베이터가 있는 것이 사진의 배경으론 꽤나 훌륭한 광경이 될 터였다.
“아 좋다!”
“근데 이거 누구한테 찍어달라고 해야겠는데..”
난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고민하다 게임장에 서있는 직원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오사카 특유의 호쾌한 미소로 흔쾌히 승낙을 받은 후, 우리는 다리 위에 섰다.
“근대 포즈 뭐 하냐.”
아차.
생각을 안 했는데.
그렇다고 저 직원을 멀뚱히 세워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야 그냥 자유포즈해!”
그 말에 우리는 각자 하고 싶은 포즈를 취했다.
누구는 멋진 포즈를, 누구는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누구는 손하트를 날리는 등 사진의 미적 조합은 총체적 난국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직원은 이런 모습이 꽤나 웃겼나 보다. 약간씩 올라가는 입꼬리를 참으며 사진을 찍고 우리에게 손가락 하나를 더 펴 보이며 ‘한번 더 찍을건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솔직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포즈가 고민이었다.
무슨 포즈를 할까 생각하던 찰나..
“아.”
“왜?”
“야, 우리 그거 할래?”
“죠죠서기”
둘의 눈빛이 서로 마주치더니, 씩 웃어 보였다.
그렇게 욕탕에서의 마지막 추억은 기묘한 기운이 담긴 사진으로 마무리되었다.
인화된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내가 필름 카메라를 산 이유는 이거였지’라고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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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우메다 스카이 빌딩으로 이동했다. 저번에 간 도쿄 스카이 트리와 유사한 전망대라고 한다.
이번엔 기대를 좀 했다. 하늘이 맑기를 말이다.
그리고 신이 내 기도를 들어주신 걸까, 하늘은 첫날의 그 청량한 유리빛으로 쨍하게 빛나며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와..!”
사진을 한 장 남기고 난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나는 듯한 높이에서 보는 맑은 날의 도시는 다른 의미로 내게 생경하게 다가왔다.
하늘에 외로이 우뚝 선 시리우스.
생각해 보니 내가 이 광경을 준성과 한규 없이 혼자 보았더라면, 이번에 낸 앨범의 앤딩과 딱 어울리는 꼴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외롭게 서지 않았다. 난 지금 한국 힙합신을 함께 걷는 두 친구와 함께 자유로운 여행을 하며 도시의 정상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내 내면엔, 아직 뭔가가 정제되기만 한 깔끔함을 가진 채 특색없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깔끔함은 이상하리만치 공허했다.
유리감옥을 깬 댓가일까? 아님 또다른 감옥이 날 기다리고 있는걸까.
커리어는 이미 내려놓지 않았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청량하고 시원했던 공기는 어느새 쓸쓸하고 약간 쓴 공기로 바뀐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아까의 기분 좋음이 서서히 멀어지는 감각이 들었다.
..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 여행에 불필요하니 말이다.
우린 타워를 내려가 밥을 먹고 술집으로 향했다. 난바에 아주 오래된 바가 있다고 해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짤랑-
경쾌한 종소리와 바텐더들이 우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자리를 안내받아 카운터에 나란히 앉은 우린 주문을 위해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 역시나 칵테일은 어려웠다.
그래도 한규가 이런 쪽으론 경험이 풍부한지라, 우리에게 이것저것 술을 추천해 주기 시작했다.
“시그니처 칵테일? 야 이거 빨간 거 뭐냐?”
내 물음에 한규가 대답했다.
“이거.. 체리는 아닌 것 같고.”
“야 이거 우매보시 아냐?”
“그 매실장아찌? 그걸 왜 술에 타마셔”
준성이 약간 투덜거리는 투로 한규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내 씩 웃더니 장난스럽게 말을 틀어버렸다.
“.. 당장 마시자, 나 이거 할래!”
준성과 한규는 마실 술을 정했고 난 아직 정하지 못해 추천을 받기로 했다.
결정장애는 이래서 괴롭다.
“추천이라면.. 어떤 맛을 원하시나요?”
“음.. 시그니처 칵테일 중에 제일 무난한 게 있나요?”
내 말에 바텐더가 책장을 훅훅 넘기다 이내 한 페이지에서 손을 멈추었다.
「유즈」 페이지 상단에 크게 프린팅 된 유즈라는 영어가 눈에 들어왔다.
“유자..? 이름이 직관적 이내요?”
“네. 이 칵테일은 유자를 이용한 칵테일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이것저것 술을 꺼내오며 이 술을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했다.
보면서 생각했다. 유자, 유자라.
유자청을 꽤 좋아하는 나로선 할만한 도전이었다.
“네 그럼 그걸로 주세요!”
나만 힘든 주문이 완료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음료가 주르륵 나왔다.
순서대로 받아 들고 난 음료를 소심하게 홀짝거렸다.
쨍한 유자맛에 절로 눈에 반응이 왔다. 세상 유자가 이렇게 신 과일이었나.
하지만 동시에 달콤하고 은은한 유자향이 감도는 것이 기분 좋아 계속 손이 가는 술이었다.
“야, 야 이거 먹어봐. 하나도 안짜!”
준성은 술을 대범하게 한 모금 마시곤 신기해하며 우리에게도 자신의 술잔을 권했다.
솔직히 우메보시가 들어간 술은 좀 그런데.
한규는 늘 이런 것에 거부감이 없다. 딱 맛볼 정도만 마시곤 잔을 나에게 넘겼다.
참 돌도 씹어먹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섬세하고 맛에 대한 지식과 곤조가 확실한 사람이라 늘 대단하다 생각하는 친구였다. 더불어 음악도 참 잘하고 말이다.
난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앞에 둘이 마셨는데 나도 조금은 궁금해졌다.
눈 딱 감고 조금만 마셔보기로 했다.
“음.. 어? 이거 왜 맛있냐?”
“그렇지, 맛있지! 이거 설탕만 조금치면 더 맛있을 것 같은데..”
“야 이거 그럼 우메보시는 국물팩 용도야?”
“아, 아니야. 아까 그거 절반정도 마시면 빻아 마시라고 했어.”
내 말에 준성은 남은 술을 보곤 우메보시를 꾹꾹 누르며 빻기 시작했다.
한규는 자신이 시킨 초록빛 준벅을 홀짝거리며 이 가게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맛이 좋다’나 ‘좋은 리큐르를 쓴다’ 등, 어제의 복어집과는 다른 만족이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준성은 우메보시를 다 빻은 술을 마시더니, 약간 멍하니 술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우리에게 말했다.
“야 왜 안 달게 만들었는지 알겠다.”
“근대 다음 잔은 나도 니 거 먹을래.”
그렇게 말하며 준성은 한규의 준벅을 가리켰다.
‘참 한결같다’라고 둘 다 놀려대며 사람들의 목소리가 꽤 모인 바에 우리들의 목소리도 함께하게 되었다.
한규와 난 만족해도 준성은 만점을 주지 못한 듯했지만,
그래도 바텐더의 ‘맛이 괜찮으냐’라는 질문엔 셋 다 따봉을 날려주었다.
엄지의 값어치라도 하듯 거기서만 술값이 27만 원이 나왔지만..
3명이서 4잔씩에 안주까지 한 거면 그러려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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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 온 옷들을 펼쳐놓고 뭘 입을지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그야 오늘은, 좀 신경 써야 하는 날이니깐.
오늘 밤 나는 이 둘을 내버려두고 드디어 히나와 마스터를 만나러 간다.
히나도 오늘 신경 써서 나온다고 했으니깐..
“야~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냐.”
“대충 입어, 넌 그냥 대충 입어도 핏 나오잖아.”
준성의 칭찬 아닌 칭찬에도 난 아직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야..
비니를 써야 잘생겨 보일지 벗어야 잘생겨 보일지 도저히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야, 준성아 한규야.”
“왜?”
한규는 양치 중인지 입 안에 거품을 가득 문 채 웅얼웅얼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일본 여자애들은...”
“비니 싫어할까?”
“아하하!!”
“야 너 그것 때문에 지금 1시간째 고민하고 있던 거야?!”
한규가 양치 거품을 뱉고 입을 헹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배경음 삼듯 난 손사래를 치며 준성의 말에 반박했다.
“아니 아니 아니, 이 룩엔 비니가 잘 어울린다고.”
“근대 전여자 친구가 비니 싫다 그랬어서..”
“그건 니 전여자 친구만 그런 걸 수도 있잖아.”
이내 양치를 마친 한규가 입을 닦으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한규에 말에 준성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음 음 그렇지. 새끼야, 니 전여자 친구가 싫어하면 세상 만물이 다 싫어하는 거야?”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그냥 용기 있게 널 보여줘! Show and Probe 하라고!”
준성의 말에 약간의 용기가 생겼다.
“그.. 럴까?”
“야 랑아,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것도 과거엔 고작 만원 따리지 않냐?”
“음, 그렇지.”
“넌 지금 그렇게 하면 평생 만원 따리인 거야. 그렇게 쫄아있고 널 보여주지 못하면 니 값을 올릴 수 없다고.”
“음악 앞에서도, 여자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당당해야 네가 멋져진다 랑아.”
“이 형님의 조언이야.”
그렇게 말하며 준성은 팔짱을 낀 상태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기분이 풀어진 난 ‘새끼 가오잡네’ 라며 하하 웃어대었고 이에 발끈한 준성에 의해 잠시 유치한 말씨름이 벌어졌다.
승자는.
“그만해 이 새끼들아!!”
한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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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솔직히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
준성이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유니버셜의 화려한 풍경을 보아도 내 머릿속엔 저녁의 히나를 만날 약속만이 맴돌았다.
그래도 고전게임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마리오월드의 퓨전요리 같은 화려함은 좀 인상 깊었다.
“올 때가 됐는데...”
발에 차이는 나뭇잎을 잘근잘근 밟으며 히나를 기다렸다.
약속시간에 30분씩이나 먼저 와놓고 상대가 빨리 오길 기다리는 고약한 심보였다.
약간의 긴장 섞인 심술이 너덜 해진 나뭇잎에 남아 내가 옮기는 발길에 따라 바스락 소리를 내었다.
난바에 있을 땐 거리의 호박들을 빼면 못 느꼈는데, 나라에 와서 오랜만에 사슴공원을 보니 가을임에도 앙상히 뼈만 남은 나무들이 지금의 계절을 말해주었다.
가을, 핼러윈의 으스스하고 화려한 날이 아닌 원랜 쓸쓸하고 쌉싸름한 계절.
내가 출국 때 한국에서 느꼈던 공기와 썩 다르지 않은 익숙함이 포근하기도 했고, 슬슬 재미없기도 했다.
그녀 생각에 오늘 일정이 재미없던 걸 수도 있겠지만..
난 비니를 고쳐 쓰고 옷 메무세를 다듬으며 다가오는 약속시간에 대비했다.
“천 씨?”
“왁!”
“히나 씨.. 깜짝아 뒤에서 오시면 어떡해요.. 진짜 놀랐잖아요...”
놀라게 해 주려던 건지 그녀는 양손을 가볍게 든 채 가볍게 웃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인지 그녀의 머리는 많이 자라 있었다.
풍성한 긴 머리를 뒤로 넘겨 핀으로 대충 고정해 놓았는데, 그 모습이 완벽히 꾸며진 저번과는 또 다른 분위기라 좀 더 눈길이 갔다.
“하하! 천 씨 나뭇잎이랑 놀고 계신 게 좀 질투 나서 방해하고 싶었어요. 죄송해요.”
“아, 아니에요 죄송할 거 까지야.”
‘질투’라는 단어에 약간 핀트가 꽂혔지만 금방 잊기로 했다.
난 히나에게 마스터의 바를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가죠, 여기 맛있어요.”
그녀도 ‘좋아요’라 말하며 우린 바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핼러윈을 맞아 사방이 주황빛 별로 반짝였다.
입구에 놓인 작은 젝 오브 랜던 오브제가 반갑다며 짓궂게 웃어주는 느낌이 들어 경직된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오랜만에 방문해서 ‘날 잊었으면 어쩌지’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완전 기우였다.
“그때 그 사람 아닌가!”
“저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럼~! 내가 들었던 고민 중에 재일 인상 깊은 고민이었어~ 이런 대 스타가 찾아온 것도 처음이었고.”
그 말에 약간은 부끄러워져 어버버 거리고 말았다.
히나가 관심을 가져하는 게 보였기에 더욱 자만할 수 없었다.
“아이.. 아닙니다.”
“엄청 대단하진 않아요.”
“허허! 겸손한 사람이야!”
“자 일단 앉게, 옆에 여성분은 일행인가?”
“네.”
마스터와 히나의 주량 관련 대화가 오가고 마스터가 간단히 술을 추천해 주었다.
난 저번에 먹었던 블랙 러시안을, 히나는 마티니를 시켰다.
“첫 잔에 마티니? 너무 쌔지 않아요?”
“마티니는 천천히 마시는 술이니깐요.”
“원래 전 바에 오면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아요. 한잔만 시켜서 오래 마시는 쪽이죠.”
“그리고 천 씨도 블랙러시안 시키셨으니 저랑 비슷하죠 뭐.”
“음.. 아무래도 그렇죠.”
반박할 말이 없어 대충 뭉개고 넘어가기로 했다.
잠시 마스터의 술 섞는 소리와 피아노 클래식만이 공간을 매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말을 심사숙고할 그때.
“블랙 러시안.. 그리고 마티니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시게나 다들!”
그렇게 말하곤 마스터는 주방으로 가버렸다.
뭔가.. 뭔가 무대가 차려진 기분이었다. 다른 바텐더들은 모두 제 할 일만 하고 있었고 가게의 공기 흐름은 오로지 우리 둘에게만 넘어온 상태였다.
근대 망할, 라인으로는 잘만 대화했는데. 막상 하도 대화를 많이 하다 보니 소스가 다 떨어져 버렸다.
“천 씨는 오사카에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내 번잡함을 꿰뚫는 히나의 훌륭한 기습질문이었다.
난 빠르게 마시던 술을 내려놓곤 대답했다.
“어, 내일이면 가요.”
“진짜요?”
“어디로요?”
“교토 4일, 그다음에 도쿄로 가서 4일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요.”
“아 교토! 교토 좋죠.”
“교토 가신다면 기요미즈데라는 가실 건가요?”
“기요.. 네?”
아무리 일본어과를 나왔어도 이런 기습 대명사엔 늘 당황하기 마련이다.
내가 또 어버버거리자 히나가 호호 웃으며 음절을 살려 발음해 주었다.
“기요미즈데라. 절이에요 절.”
그리고 그녀는 절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화려한 단풍을 배경으로 한 훌륭한 목조건물의 디자인에선 최소 수백 년은 될 것 같은 위용이 뿜어져 나왔다.
“야.. 이거... 직접 가보신 거예요?”
“네, 저 절이나 신사 좋아하거든요. 꾸준히 참배하러 가기도 하고.”
“자연 속에 어우러진 과거의 유산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선조들도 이걸 짓기 위해 진심을 다했을 태니, 나라고 진심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라고요.”
“아..”
“그 당시는 지금같이 건축기술이 발전되지 못했잖아요?”
“그런데도 노력으로 이루어낸 저 멋진 결과물을 보면 저도 심장이 물들어요.”
“어떻게요?”
내 질문에 히나가 방긋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 모습에서 새삼 ‘순수한 어린아이’가 느껴졌다.
“열정으로요!”
“.. 히나 씨는 정말 멋진 것 같아요.”
“전 그런 걸 보면 그냥 쌉싸름함을 느끼는데, 관점의 차이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내 말에 히나가 약간 의문이 생긴 표정으로 반문했다.
“왜 그런 감정을 느끼시죠?”
“아.. 음..”
“저번에 들으셔서 알겠지만, 슬럼프 때문에 준비하던 앨범이 있었어요.”
“다행히. 잘 됐어요, 상도 받았고.”
“그럼 잘된 일 아닌가요?”
“그렇죠. 객관적으론 잘 된 일인데..”
“뭐랄까... 전 앨범을 작업하는 내내 또다시 어딘가에 갇혀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여기 온 건대..”
더 이상 이 분위기를 지키면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준성의 말에 Show and Probe라는 포부를 들고 왔지만 이 이상 내면을 꺼냈다간 공기가 완전히 죽고 말 것이다.
그건 그녀에게도 긍정적인 방향이 아닐 것이다.
“그냥, 그냥 사람이 피곤한 성격이라 그래요.”
“그래 보이진 않는데 생각 많고 예민한 타입.”
“히나 씨는 어떤 타입이신가요?”
“전 천 씨랑 완전 반대예요.”
“생각보다 생각 없고, 예민해 보이지만 예민하지 않죠.”
“제가 옛 건물들에게서 열정을 느끼는 이유도, 전 그 사람들의 ‘후일담’은 신경 쓰지 않아서 그래요.”
“ ‘누가 이 종을 만들고 참수당했다더라..’라던지 ‘이 건물을 만든 인부는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던지..”
“과거나 지금이나 불합리로 돌아가는 게 세상이에요.”
히나는 잠시 술을 한 모금 마시곤 잔을 살포시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 불합리 속에서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근대!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대신.”
“제가 내린 한 가지 철칙이 있어요.”
“뭐죠?”
“어떤 방식이건 최선을 당한 사람은 충분히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라는 철칙이요.”
“천 씨, 예민하고 생각이 많다고 하셨죠?”
“제가 보기엔 천 씨는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아..? 네?”
당황하는 난 아랑곳 않고 히나는 술잔의 입가를 쓸며 말을 이었다.
“스스로 자세를 낮추는 건 중요하죠. 하지만 자세를 낮춘다고 스스로의 가치까지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요.”
“존중이 없으니, 스스로를 진정으로 보지 못하게 되죠.”
“그니까 천 씨는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먼저 아셔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그 ‘갇힌 곳’에 대한 정체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요?”
완전 말로 얻어맞아버렸다.
존중, 존중이 없더라. 그럼 내가 쫒던 자유는 타자나 외부 요인에 의해 억압된 자유가 아닌 스스로가 억압하던 자유였나?
커리어라는 족쇄를 벗어도 또 다른 수갑이 있음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래도 조언해 준 히나에게 감사를 표하며 우린 ‘교토까지 뭘로 이동할 거냐’나 ‘가서 이거이건 꼭 먹어봐라 등’ 소소한 이야기들로 더 떠들었고, 얼마나 지났을까.
“앗! 막차 끊길 시간이다.”
“천 씨 저 가볼게요! 근대 천 씨는 안 가세요?”
“아 저는 여기 문 닫을 때까지 있으려고요. 돈도 많으니 택시 타죠 뭐.”
내 말에 히나는 약간 걱정하는 눈치로 대답했다.
“택시 비싼데.. 그래도 돈 있으시다니깐! 조심히 드시고 들어가세요!”
‘히나 씨도 조심히 들어가세요’란 말로 작별인사를 남긴 뒤 우린 해어졌다.
그리고 귀신같이 마스터가 나왔다.
“아 마스터 씨.”
“술 다 마셔가는구먼, 한잔 더 할 텐가?”
“일단 좀 쉴게요. 술김이 올라오는 건 아니고 속이 더부룩해서요.”
“그거 액체만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래.”
마스터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뭔가 부스럭거리고 끓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를 내왔다.
작은 컵에 담긴 생강차였다.
“내가 먹으려고 사다둔 거였는데, 속 안 좋다 하니 이따 좀 가라앉음 먹게나.”
“에? 그럼 먹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허허! 내게 더 많아!”
“물배는 금방 꺼지니깐 괜찮을 거래.”
마스터가 내어준 차를 양손으로 쥐어보았다.
따뜻한 온기의 느낌이 가게를 매운 핼러윈의 주황빛 별과 대조되면서도 어울리는 기이함이었다.
“.. 마스터 이거 핼러윈 테마로 꾸미는데 얼마나 걸리셨어요?”
“이거? 금방 해. 한 하루면 뚝딱이지.”
“아~”
“신기하네요 조명도 그렇고 오브제도 그렇고 신경을 많이 쓰신 게 보여서 시간이 꽤 걸렸을 줄 알았는데..”
“에이 우리보다 더 화려하게 꾸미는 곳도 하루면 다 끝나~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내.”
이내 가게엔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마스터가 컵과 기구를 정리하는 소리들만 나무로 이루어진 공간에 악기처럼 튕겨대었다.
“청년.”
“이름이 천 씨인가?”
“아 네. 천랑입니다.”
“천.. 랑.. 천.. 발음이 어려우니 나도 그냥 천 씨라고 부르지!”
“천 씨. 내가 스스로를 존중하는 꿀팁을 줄까?”
약간 의문스러운 말에 난 ‘에?’하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떤 걸요?”
“아주 간단해.”
“자신을 안아주게나. 나처럼 해봐.”
마스터는 양팔을 교차시켜 마치 마스터 스스로가 자신을 안는 자세를 취했다.
나도 마스터를 따라 나를 안아주었다.
뭔가 익숙지 않은 나 자신이 ‘나’에게 주는 포근함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한쪽 팔을 천천히 쓸면서 나에 대한 위로의 말을 전하는 거야.”
“무엇이 되었건 상관 없내. 대신,”
“이건 정말 힘들 때 해야지만 효과가 있어. 아무 때나 막 한다고 효과가 나오진 않아!”
난 왼쪽 팔을 천천히 쓸며 말했다.
“오.. 뭔가 몽글몽글한 기분이에요.”
“에, 지금 그렇게 힘들었어?”
“아뇨 아뇨. 그건 아니고 그냥 이렇게 온기가 전해지니 느낌이 ‘몽글몽글’하다는 기분이여서요.”
내 말에 마스터는 미소 지으며 아까의 포즈 그대로 자신의 한쪽 팔을 톡톡 쳤다.
“그렇지. 처음 자신을 안아줄 땐 기분이 몽글몽글하지.”
“하지만 여러 번 안으면 안을수록”
“스스로를 부서지도록 안게 되더구먼.”
“아.. 그럼 마스터는 요즘도 자신을 안아주시나요?”
내 말에 마스터가 강렬한 눈빛을 보내며 ‘아니!’를 크게 외쳤다.
이내 마스터는 눈빛을 풀곤 다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 표정이 아까 열정을 말하던 히나의 색과 유사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근간은 다른, 아예 별개의 감정 말이다.
“지금은 아내가 날 안아주지.”
“아내가 있으면 좋아. 날 부서지도록 안지 않아도 되거든.”
“자네는 사랑하는 이가 있는가?”
사랑. 그 감정은 꽤나 무섭고 무거운 것이었다.
‘사랑해서 이렇게 하는 거야’라는 이름아래에 행해진 그동안의 웃픈 추억을 생각해 본다면 내게 사랑은 절대 가벼이 입에 놀릴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다.
내가 더 이상 사랑에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 부모에게, 씬에게, 리스너들에게, 더 나아가 좋아하는 이에게도 말이다.
그래서 그날은 얼버부리고 지나갔던 것 같다. 물론..
마스터의 눈빛은 이미 다 본 드라마를 또 보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