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우스가 추락하는 날 - 별의 색은 무슨 색 E.03

오사카는 참 붉구나.

by Quasar

“아.. 으아...”

“아니 어제 얼마나 마셔댄 거야..”

“야 빨리 일어나. 우리 체크아웃해야 해!”

한규의 호통에도 내 머리와 뱃속에 타종소리는 끊일 생각을 안 했다. 준성이 편의점에서 사 온 신라면을 먹으니 조금은 나아졌다. 속만.

“으아아.. 미안하다...”

“됐어 새끼야! 그럴수도 있지.”

난 어떻게든 몸을 추슬러 짐을 챙긴 뒤 방 밖으로 나왔다.

로비에서 시원한 10월의 공기를 맞으니 머리가 좀 깨는 느낌이었다.

우린 배낭을 메고 이동하며 일정 수행을 위해 계획표를 체크했다.

“어디 보자 지금은..”

“어 브런치 가게를 갈 거야.”

“아오! 너도 여자냐?”

“아니 여기 맛집이래. 타베로그 별점 4점 대야.”

“.. 그러냐?”

한규와 준성의 티키타카를 들으며 이번에 갈 가게를 검색해 보았다.

사이트 리뷰 란엔 5점 만점에 3점과 4점짜리 평가들이 수두룩했다.

꽤 깐깐한 사이트로 알고 있는데, 이 정도로 칭찬 일색이면 나도 기대를 안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미약한 기대를 품고 우린 가게 앞에 도착했다.

호텔 안에 위치한 가게는 꽤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안내받아 앉은자리 뒤로 있는 창문에 맑은 태양빛이 은은히 들어오는 것이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켜 주었다.

뭔가 우리가 있기엔 썩 어울리진 않아 보였지만, 무슨 상관이랴. 맛만 좋으면 그만이지.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주문했고 핸드폰으로 시간을 지우던 중 드디어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주문한 건 버섯 리조토였다.

짙은 아이보리색 죽 같은 것에 간헐적으로 버섯이 올라가 있었고, 그 위엔 파마산 치즈가 뿌려져 있었다.

준성과 한규는 이미 자신들이 시킨 파스타를 후루룩 먹는 중이었다.

우선 고풍스러운 공기 속 과격한 식사의 시간과 리조토의 향기를 사진에 담은 후 나도 식사를 시작했다.

음, 맛은.

맛있다. 확실히 맛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 너무 짜다..

저번 여행 때도 일본사람들 짜게 먹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짰다.

그렇다고 기왕 시킨 걸 남기기엔 마음이 찝찝했기에 난 입을 달래줄 커피를 시키곤 커피와 함께 리조토를 해치웠다.

.

.

“야.. 한규야 도대체 어떤 식당들로 예약을 잡은 거야..”

“우리 3일 동안 벌써 밥값으로만 50은 쓴 것 같은데”

“야, 걱정하지 마. 우리 숙박비 경비 재외하고 350씩 모아 오기로 했잖냐.”

“뭐 그중 50만 원 나간 거 가지고 뭐..”

“술값 기타 비용 별도야.”

내 투정에 한규가 핸드폰으로 무언갈 두드리더니 말했다.

“저번에.. 밥값으로 52만 원, 술값은 33만 원, 기타 비용으로 114만 원.. 이니깐.”

“각자 350만 원 중 66만 원 나왔네. 3일 동안.”

“기타 비용 100만 원?? 아니 어디서 나간 거야?”

“유니버셜에서. 패스권 3개에 90만 원이다 랑아.”

“와 씨..”

저번에 칼을 안산게 의문스러울 정도의 지출이었다. ‘생각보다 90만 원은 싼 금액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며 한참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을까.

「이번 역은. 모리노미야, 모리노미야 역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하철 역 밖으로 나가보니 어느새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젠장. 망할 놈의 가을장마 같으니

우린 준비해 온 우산을 펼치며 한규의 뒤를 따라 어느 곳으로 걸어갔다.

마치 커다란 공원 같은 곳이었다.

“야 여긴 뭐냐?”

“여기 랑이 네가 보고 싶어 했던 곳.”

“오사카 성이야.”

그랬다. 오사카 성.

저번 여행 땐 일정이 너무 짧아 보질 못해 아쉬웠었는대, 한 번쯤은 보고 싶어 일정에 넣어달라 했었지.

아까의 식당보다 심장이 좀 더 두근대기 시작했다. 사진으로만 봐도 아름다웠는데, 실제로 보는 그 자태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길은 꼬불꼬불하고 한참을 들어가야 했었다. 이번엔 풍경이 예쁜 것이 많아 그 시간을 담고 싶어 성벽과 나무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하지만 필름을 아끼기 위해 조금만 찍고, 이따 오사카 성을 더 찍기로 하며 카메라를 넣어두었다.

그렇게 마침내 본 오사카 성은, 생각보다 별 위용은 없었다.

사진으론 멋들어진 벚나무나 푸른 초목과 어울려 그 위용을 내뿜던 것이었는지, 성 자체만으론 무언가 대단한 느낌은 받지 못했다.

대신 추적추적 내리는 빗 속에서 보는 화려한 흰색과 청빛의 성은 마치 뿌연 필름을 낀 사진처럼 연무 속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주었다.

찰칵-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한 장 찍기로 했다.

필름엔 지금 친구들의 뒷모습과 뿌연 필름 속 성을 메우는 빗소리가 담겼다.

이 축축하고 눅눅한 시간도 결국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땐 그랬지’따위의 추억으로 회상할 수 있을 테니.

서서히 진흙으로 바뀌는 땅을 뒤로하고 우린 자리를 떴다.

.

.

“그래서..”

“오늘 밤 뭐 타고 넘어간다고?”

준성이 흰쌀밥을 입안 가득 우물거리며 한규에게 물었다.

“오늘 막차 타고 캡슐 호텔에서 잔대.”

“한규가 단톡방에 올려놨잖아 어제. 그걸 기억 못하냐..”

“아니 기억 못할수도 있지!”

잠시 티키타카가 오가고 서로 간의 열기가 가라않자, 한규가 입을 열었다.

“캡슐호텔에서 자고, 내일 일어나자 마자 호텔에 짐 맡기러 갈꺼야.”

“그리고 교토일정 시작해야지.”

그 말에 준성의 눈빛이 반짝였다.

“교토! 드디어!!”

“나 여우신사도 보고싶고 잔린지? 젠린기?”

“젠린지야.”

“아 암튼!”

“그것도 보고싶어!!”

그 말에 한규는 낄낄 웃으며 ‘이새끼 계획표 안봤네’라고 말했고 그러며 계획을 다시 설명해주었다.

그걸 듣던 중, 순간 뭔가에 꽃혀버렸다.

“야 한규야. 우리 교토 일정은 그럼 이게 끝이냐?”

“어 그치”

“그럼 한규야, 괜찮다면..”

“일정 하나 빼고 여기 넣어줄 수 있냐?”

내 말에 한규와 준성이 ‘에’하는 소리를 내었다.

“일정? 뭘 빼라는 거야?”

“어.. 여기, 헤이안 신궁 말고. 기요미즈데라 가보는건 어때?”

“거기가 지금 가을이라 엄청 예쁘데.”

“어짜피 헤이안 신궁은 그냥 시간때우기 용으로 넣은 곳이였잖아! 거기다가 여기 서로 거리도 가깝네~”

“어때?”

내 말에 준성은 숟가락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고 한규는 음-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다 한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기 이쁘긴 하던대.. 사람 존나 많아보여서 뺐던거라..”

“너 괜찮겠냐 랑아? 사람 많은거 싫어하잖아.”

싫어하긴 한다. 꽤나 많이.

하지만 히나가 영감을 느꼈던 장소에 호기심이 돋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정돈 괜찮아~”

“뭐 많아봤자 얼마나 많겠어? 사진 상으론 뭐 할 만 해보이네.”

내 말에 준성도 낄낄대며 동의했고 그렇게 우리의 계획은 즉석으로 수정되었다.

이후 식사를 마치고 우린 술집으로 이동했다.

.

.

“야 한규야 이번 계획은 뭐냐?”

“이번 계획은..”

“없어.”

“오사카에서의 마지막 날인데 정처 없이 떠돌다 눈에 보이는 아무 집에나 찾아 들어가 보는 낭만은 챙겨야 하지 않겠어?”

“오..”

꽤나 일리 있는 말이었기에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우린 술집을 고르기 시작했다.

화려하고 멋진 간판과 내부는 모두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저런 곳은 이미 갔었으니깐.

우린 서로 다른 느낌들의 가게를 찾고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로컬’이란 키워드를 꼭 끼워두곤 했다.

그러다 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지붕과 양 옆으로 늘어진 두꺼운 바람막이용 비닐.

가게 앞엔 멋들어진 한자가 쓰인 붉은 등이 나름대로의 고전미를 풍기고 있었다.

“야 여긴 어떠냐?”

내가 친구들을 잡으며 말했다.

둘은 멈칫하며 가게를 보더니 느낌이 나쁘지 않지만 조금 더 둘러보고 오자 말하던 중.

가게 주인이 우리 쪽을 가리키며 손을 휘적이는 장면을 내가 보고 말았다.

그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어서 오세요!”

.. 저렇게 활짝 웃으면서 오라고 하는데 그냥 가버리면 마음에 남을 것 같은데...

나머지 둘도 그 소리를 듣곤 잠시 서로를 쳐다보며 눈빛으로 무언의 문답을 던져대었다.

그리고 이내 우린 소리 없는 ‘그래 가자!’를 외치곤 가게로 들어갔다.

“몇 분이세요?”

“아 3명입니다.”

“아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우리 옆에 4인석 테이블을 정리해 주었다.

앉으라는 안내에 앉아 메뉴를 보기 전, 난 잠시 가게 안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를 주목했다.

일본 현지인들 3명이 가게 안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뭔가 ‘신뢰가 가는 가게’란 생각이 들었다.

우린 우선 간단한 횟감이나 튀김등의 안주를 주문하였다. 겸사겸사 속을 씻어줄 두부도 같이.

그러며 술을 추천받았다.

“사시미엔 사케, 텐부라엔 맥주, 두부엔.. 소주지 아무래도.”

“음.. 뭔가 종류가 많네요?”

“스타트는 맥주나 소주로 끊는 게 좋아요~ 사케를 처음부터 마시는 건 너무 무거우니 추천하진 않고.”

“아, 우리 이모 소주 새로 들어온 거 있는대 그거 소다와리로 줄까요?”

오. 굉장히 흥미가 돋는 조합이었다.

고구마 소주에 탄산수라니.

“아 좋아요! 그럼 그걸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금방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게 여행의 묘미인 것 같았다.

어디에서, 어떤 게 나올지 모르는 그 재미. 엉망진창인 진흙밭조차 어릴 땐 그리 즐겁게 놀았는데..

지금의 여행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그랬다. 정돈된 흰 빛의 카펫은 예쁘지만 계속 보면 재미가 없듯이, 이잰 어그러지고 주름 잡힌 무작위의 천조각이 내겐 더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구겨진 천 조각이 지금 내 술에 담겨 나왔다.

과연 어떤 모양으로 구겨져있을까?

바로 한 모금 마셔보았다.

짭- 짭-

“흠..”

“야 이거 존나 고구마야. 고구마 빤 물.”

“맛없단 뜻 아냐 그럼?”

“엄.. 아냐 맛없진 않은대...”

“확실히 이건 튀김이랑은 잘 안 붙는다. 두부랑 이따 나올 회랑 먹어야지.”

일본에 와서 구겨진 천 위에 놓인 체험 중 하나는 단연 음식이었다.

뭔 말이냐면 이 양반들, 강렬할 땐 너무 강렬한 맛이고 은은할 땐 너무 은은한 맛이다.

지금 이 술과 안주들이 딱 이랬다. 은은하고 심심한 맛의 음식과 술이었다.

바로 방금 밥으로 먹었던 돈카츠 소스의 강렬한 시고 짜고 달달한 맛을 떠올리니 이 시소 같은 와리가리가 아직도 적응이 힘들었다.

‘적응할 법 됐는데..’

“여기 사시미입니다~”

“이건 방어, 이건 네기토로, 이건 쥬도로, 이건 광어.”

“맛있게 드세요!”

“오 회!”

“이 토사물 같은 건 뭐냐.”

준성이 네기토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토사물이 아니라 참치살 다져놓은 거다 새꺄.”

“조금씩 덜어먹어라. 이거 양 적ㄷ..”

준성은 내 말은 아랑곳 않고 다진 참치를 굵직하게 덜어 먹었다.

이 씨..! 양 적다니깐..

그에 질쎄라 나도 한입 했다.

“음.. 음.. 오?”

맛있었다. ‘이 가격에 이런 퀄리티라고?’싶은 수준의 맛이었다.

아까까진 은은하고 심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심심함이 아닌. 뭔가 ‘맛이 차분하다’라는 느낌까지 들었다.

“야 이거 존나 맛있다.”

“한국에서 이 정도 퀄리티의 회를 먹으려면 배가 되는 돈을 줘야 하는데..”

한규가 감탄하며 광어회를 2점씩 집어먹었다.

나도 여러 종류의 회를 집어먹으며 참치로 기름져진 입안을 고구마 소주로 입가심했다.

그렇게 마시니, 아까까진 심심했던 ‘고구마 빤 물’ 같은 술이 ‘은은한 고구마 향’의 잔잔한 호수 같은 술이 되었다.

갑자기 저번에 먹었던 복어가 생각났다.

그때 우리가 복어를 먹고 맛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경험이 없기에 그랬던 것 아니었을까?

솔직히 말해 지금 이 회와 그때의 복어에서 받았던 느낌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종류에 따른 맛에 차이만 있을 뿐.

크게 퀄리티 적 차이를 눈치챌 만큼 내 입맛은 섬세하지 못하다.

하지만 지금 내게 이 회는 그때의 복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맛있다.

가격은 몇 배나 싼값인데, 깨끗하지도 않고 카운터 석 엔 의자도 없으며 사람들이 시끌벅쩍하게 깔깔 웃는 저렴한 분위기임에도.

이곳은 내게 그 어느 식당보다 기억에 남는 고급감을 주었다.

“손님.”

“왁!”

사장이 한창 기분 좋게 빵빵히 부풀던 내 생각풍선을 터트렸다.

그는 날 놀라게 한 건 아닌지 사과를 하며 우리에게 ‘카운터 석으로 이동할 건지’에 대해 물었다.

“카운터 석으로 이동하겠냐는대?”

“카운터 석? 근대 저기 의자 없잖아.”

“일본엔 타치노미라고 서서마시는 술집이 있어. 여기가 그런 술집인 것 같은대?”

한규의 유식한 발언에 준성이 리액션을 해주었다.

“오오.. 똑똑한데..”

“야 그럼 카운터 석으로 갈까? 기왕 일본에 왔으면 문화체험! 좀 해줘야지!”

우린 모두 ‘좋다 좋아’를 외치며 카운터 석으로 옮겼다.

그리고 카운터 석으로 옮기고 얼마나 있었을까, 사장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 도시 사람인지..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 그러니 ‘한국사람이 많이 온다’며 관련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준성은 알아듣지 못하는 듯 보였지만 일부일부의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바디랭귀지로 대화했다.

사장은 그런 준성이 재밌는 듯 깔깔 웃으며 나에게 ‘재미있는 친구다’따위의 말을 하였다.

“근대 셋은 어떻게 친해진 거예요?”

“저희요? 저희 셋 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에요.”

“저기 덩치 큰 친구랑 마른 친구랑 저까지, 모두 랩 해요.”

“아 진짜?”

“랩.. 랩이라. 전 랩은 아니지만 옛날에 힙합을 췄었죠.”

“오사카에 유명한 팀에도 들어갔었어요!”

힙합이라. 나도 한규도 한국에서 그 장르를 추는 친구를 알기에 꽤나 반가운 소식이었다.

“오 힙합이요?”

“저랑 저 친구도 힙합 추는 친구가 있어요.”

“힙합 친구!”

한규와 준성이 어설픈 일본어로 말했다.

그 말에 주인이 우리가 주문했던 사시미를 썰며 말했다.

“그때 정말 재밌었죠.. 도쿄 대 오사카, 후쿠오카 대 오사카 이런 식으로 지역 대항전을 붙어보기도 하고.”

“큰 경연에서 팀으로 우승했을 땐 다들 기쁨에 취해 다 같이 밤새 술을 마시기도 했죠.”

내가 해석해 주자 그 말에 준성이 뜨문뜨문한 발음으로 무언갈 질문했다.

“그럼... 지금은 왜 이.. 이자카야! 그래 이자카야. 이자카야에 계신 거예요?”

사장은 주문했던 사시미 2개를 슥- 하고 놓으며 한숨을 한번 쉬곤 대답했다.

“현실에 부딪혔거든요. 30이 넘으니 신체도 예전 같지 않고.. 점점 폼이 떨어져 가는 게 느껴지니 더 이상 팀에 남을 수 없었어요. 민폐 같았거든요. 그리고,”

“집안 사정이 많이 어려워졌어요. 돈을 벌 사람이 저 밖에 안 남은 상태였죠.”

“그나마 삼촌이 이 작은 가게를 주셔서 회생이 가능했지 아니었음 진짜 위험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사장은 허탈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내, 눈에 빛이 들어왔다.

40이 훌쩍 넘어 보이는 사내의 눈에 들어온 그 빛은 마치 꿈결 같은 노을 녘 구름의 색이었다.

뭔가, 그 눈빛에 공기가 달라졌다.

“그래도 저 포기 안 했어요!”

“왜냐면 제가 팀을 만들었거든요.”

“‘백화요란’ 제가 만든 팀 이름이에요.”

백화요란. ‘여러 가지 꽃이 어우러져 핀다’라는 의미의 일본 사자성어이다.

대학시절 사자성어를 배울 때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뜻과 발음이 예뻐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니 참 반가운 단어였다.

뭔가 머릿속에서 수많은 꽃들 중 강렬한 주홍빛 색의 꽃이 떠올랐다.

그야 그 색은 지금 사장의 색이었으니깐.

“뭔가 화려하고 멋진 팀명이내요.”

“대단해요!”

‘난 앞길이 막막한데’따위의 생각을 하며 사장의 꿈을 축하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오사카의 색은 참 붉었다. 히나도, 마스터도, 사장도.

다들 열정과 사랑, 꿈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이었다. 그것이 푸르른 바다를 낀 ‘항구도시’의 키워드와는 맞지 않는 색인지라,

그때 느꼈던 마스터의 가게 인테리어인 핼러윈 조명 같은 기이함이 들었다.

하지만 난 이 화려한 대비가 참 좋았다. 여러모로.

그러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의 색은 무엇일까?

이 ‘색’이, 내가 갇힌 곳을 나갈 수 있는 열쇠가 될까?

.

.

.

표를 교환하고 개찰구로 향하는 중이었다.

곧 오는 지하철이 교토로 가는 막차라고 했기에 난 시계를 한번 보았다.

11시 45분.

막차는 12시 10분이라고 했다.

그렇게 친구들이 개찰구 너머로 넘어가고 나도 표를 넣으려는 순간.

“야 랑아!”

“음?”

“지금..”

“누가 너 쪽으로 뛰어오는 것 같지 않냐?”

그 말에 난 역의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진짜로 누군가 뛰어오는 탁- 탁- 탁- 소리가 역 안을 채우며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난 눈으로 그 소리를 좇았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히나?”

히나는 한참 달려와 우리 앞에 서더니 잠시 숨을 골랐다.

잠시 헉헉대던 그녀는 이내 호흡을 진정시키고 자신이 매고 온 가방을 뒤적거렸다.

“하아.. 좋은 저녁이에요!”

“천 씨한테 그때 깜빡 잊고 못준 게 있어서 그거 줄려고 왔어요.”

“못준 거요? 뭘..”

이내 히나는 가방 안에서 무언가 털실뭉치 같은 것을 꺼냈다. 그것은,

비니였다. 붉은색의 시보리가 포인트인 두꺼운 비니.

“천 씨 작년에 봤을 때 비니가 잘 어울리기도 했고.. 비니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준비했어요. 원래는 저번 약속 때 드리려고 했는데..”

히나는 멋쩍은 듯 하하-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까먹고 안 가져왔지 뭐예요!”

그리곤 그녀는 나에게 비니를 두 손으로 내밀었다.

그러며 약간 발그래진 볼을 하곤 내게 말했다.

“.. 이거, 지금 한번 써주실 수 있어요?”

난 비니를 조심스래 받아 들며 잠시 그것을 멍하니 보았다.

약간 반짝이는 실로 만들어진 비니엔 선이 두꺼운 간격으로 그어져 있었다. 패션으로만 따지면 내가 아닌, 그녀에게 더 잘 어울릴 법한 비니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 취향의 괴리가 그녀의 선물을 더 소중하게 만들어주었다.

날 위해 본인의 역량 안에서 최선을 다해 골랐을 것을 생각하면, 히나의 부탁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난 힘차게 ‘당연하죠’를 외치며 빨리 비니를 써보았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셀카모드를 켜 내 모습을 보았다.

객관적으론 내 힙한 패션과 귀여운 비니의 조화가 꽤 웃긴 모양새였다. 히나도 그걸 눈치챈 걸까, 눈 마주친 그녀의 표정엔 약간의 걱정과 당황이 담겨있었다.

“천 씨.. 맘에 들어요..?”

난 그녀의 걱정을 한 번에 날려버릴 정도의 밝기로 감사인사를 전했다.

“진짜 맘에 들어요! 고마워요 히나 씨!”

내 밝음에 히나 얼굴에 그림자가 걷혔다. 그녀도 어느새 배시시 웃으며 ‘다행이다’를 연발하였다.

카메라, 그래 이런 순간은 반드시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

“히나 씨, 같이 사진 찍으실래요?”

“사진이요..?”

“좋아요!”

그렇게 기차가 언제 올지 모르는 오후 11시의 밤.

빨간 비니와 함께 공명하는 감정이 사진에 담겼다.

교토의 캡슐 호텔에 누워 사진을 보았다.

붉은 비니를 쓴 나와 붉은 스카프를 한 히나.

‘자네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 질문에 그저 얼버부리기만 했다. 그 당시 나는 두려웠으니깐.

하지만 오늘 깨달았다.

두려워하고 무시하기만 해선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단 걸. 붉은색의 비니가 강렬하게 말해주었다.

자신의 진실된 마음과 스스로조차 무시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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