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아의 패러독스 .1

영원불멸은 사랑에 대한 모순이다.

by Quasar



"이데아."


"내 이름은 이데아야."




내 눈앞에 놓인 거대한 검고 반투명한 존재가 말했다.


머리 위로 갈수록 색은 짙어졌고, 온몸엔 마치 별과 같은 부유물이 떠다니며 은근한 빛을 내었다. 온몸이 마치 오로라처럼 빛나, 이 세상 그 어떤 생명보다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입은 없어 보이지만, 마치 부드럽고 위용 있는 목소리가 나의 뇌를 울리듯 스쳐갔다.


존재는 나에게 손을 내밀며 뭔가 요청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 행위는 '악수'를 요청하는 듯 보였다.




"아... 어..."




내가 얼빠진 듯 바라보고만 있자, 존재는 이내 손을 거두더니 굽힌 다리와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그 덩치가 아빠 차 정도는 되어 보였다.




"ㅁ.. 뭐야? 너..뭐야?"




나는 한 발자국씩 멀어지는 존재를 보자, 드디어 경의로움에서 오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말할 수 있었다.


존재는 내게 눈처럼 보이는 것을 고정한 채로, 점점 떠오르며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뇌를 울리는 목소리가 불러왔다.




".. 난 너의 패러독스야."




존재의 목소리는 서글퍼보였다.


그렇게, 그는 밤하늘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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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마치 방금 자의로 누웠다 일어난 것처럼, 부드럽게 눈을 뜨고 일어났다.




"... 꿈을 꿔도 이런 걸 꾸냐.."




그렇게 혼잣말하며, 난 시계를 보았다.


10시 10분. 지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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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께 엄청나게 죄송하다 말하고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당연했다. PPT를 만드는 족족 날아가 과제도 못해오고, 발표당일 지각도 했으니..


안 그래도 열정적이고 집착적인 교수님이 과제를 안 해온 이들에게 단단히 뿔이 나셨다.


그나마 교수님의 화는 풀어드렸지만, D나 F는 면하지 못할 것 같단 사실이 날 절망하게 만들었다.




"하... 진짜 힘 빠진다.."




"야 괜찮아~ 계절학기 들으면 되잖아~"




이호가 엎어져 있는 내 등을 두드리며 날 위로해 주었다.




"그런 말이 있잖아. 땅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하늘이야."




"태클 걸지 마 설아! 근대 너 컴퓨터 괜찮냐?"




이호의 말에 난 문득 컴퓨터가 기억났다.


용산에 신도림에 갈만한 곳은 다 갔지만, 가서 고쳐도 파일 삭제, 블루스크린 등 온갖 버그에 문제가 겹치며 결국 과제를 못했다.


정말이지, 이것 때문에 컴퓨터에만 돈을 엄청나게 썼다.




"모르겠다.. 괜찮다가도 안 괜찮고.. 그냥 아주 자기 맘대로야."


"아 짜증 나 진짜, 돈이 얼마나 깨진 거야!!"




"얼마나 깨졌는데?"




"150.."




"150만 원?? 야 3번했다매."


"메모리가 요즘 30이면 교체가 가능한데, 너 어디서 한 거야?!"




이호가 내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용.. 산... 전자센터..."




퍽-




"아!"


"왜 때려!"




이호가 내 등을 퍽- 소리 나게 때리며 날 못마땅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으휴... 진짜... 됐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렇게 말하며 난 이호의 손에 이끌려 식당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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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오늘도 새로운 과제를 위해 컴퓨터를 켰다.


저번의 그 소동과는 달리, 야속하게도 잘만 돌아간다.


이번엔 분자생물학 리포트 과제가 있다.


이번 교수도 정말 깐깐해서, 입맛에 맞춰 만들지 못하면 원하던 대학원은 꿈도 못 꾸게 된다.




탁- 타닥-




한참을 썼을까, 하도 앉아있으니 허리가 아파왔다.


난 리포트를 저장 후, 시원하게 머리부터 발 끝까지 기지개를 켜며 굳은 몸을 폈다.




"으그극..."




굳은 몸이 풀어지자, 이내 배가 고파왔다.


하지만 지금 시간은 11시 43분이었다.


뭔갈 먹으면 분명 살로 가고 말 것이다.




'물이나 마시자..'




그렇게 생각하며, 난 부엌으로 향했다.


시원한 물을 따르며 무심결에 컴퓨터 쪽을 보았다.


내 150만 원을 빨아간 원수.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망치로 한대라도 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150만 원에 추가로 130만 원까지 날아갈 것이 뻔했기에 그럴 순 없었다.




'이번엔 멀쩡하겠지..?'




그리 생각하며, 물컵을 집어 들었다.




이때, 무언가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나와 공간을 분리시키는, 온몸 주위의 공기를 삭제시키는 듯한 숨 막히는 기분.


하지만 무언가 친근한 이 모순된 감각.


난, 본능적으로 이 이질적인 누군가를 반가워하고 있었다.




"어.. 어?"




이때, 내 컴퓨터 본체로 검고 반투명한 얇은 촉수가 순식간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러자, 모니터에 블루스크린이 떴다.




몸을 덮는 이질감이 이내 사라졌다. 동시에 난 무의식적으로 참던 숨을 토해내며 멍하니 컴퓨터 본체를 바라보았다. 물컵은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가 드디어 과제 때문에 미쳐버린 걸까.


하지만 이내, 아까 봤던 촉수의 정체를 생각할 새 없이 모니터에 뜬 블루스크린을 발견했다.




"아! 아!! 안돼!!"




그날도 내 원룸에서는 나의 절규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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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작업을 PC방에서 하기로 했다. PC방에서 하고 자리를 비우면 바로바로 저장하는 걸로 했다.


그렇게 하자 다행히 분자생물학 수업 리포트를 재시간에 제출할 수 있었다.


.. 물론 그 이후로 그때의 그 이질적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스트레스 탓이겠지' 하고 넘겨버리고 말았다.




"현설 학생! 현설 학생!"




"ㄴ, 네!"




나를 부르는 노인의 목소리에 난 엎어져있던 강의실 책상에서 바로 일어섰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자생물학 교수 박천이었다.


무서운 교수였기에, 난 교수를 따라 끌려가듯 그의 방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세요 교수님..?"




"현설 학생, 이번에 낸 리포트 말인대.."




난 절로 식은땀이 났다.


대학원 못 가면 어떡하지.




"아주 좋았어요. 훌륭했습니다."




나는 절로 탄성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교수에게 감사인사를 표했다.




"아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번 말학기 성적도 훌륭하고.. 학사경고도 없고... 그래서 말인대 현설 학생."




"네 교수님."




"저희 대학원 들어오지 않을래요?"




난 그 자리에서 바로 크게 YES를 외치고 교수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 자발적으로 간 걸 땅을 치고 후회한 건 6개월 후의 일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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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나 잠은 언재자..."


어느새 대학원에 들어온 지 1년이 지났다.


내 눈앞엔 적어야 하는 논문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난 대학원에서 눈 코 뜰새 없는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곳은 분자생물학을 연구하는 연구소였다.


대학원에 들어오면 내가 하고 싶었던 줄기세포 연구나 유전자 가위로 원하는 유전자 만들어서 배양하기, 쥐한태 실험하기 같은 걸 실컷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실상은 표본정리와 대학 때와 비슷한 논문 폭탄뿐이었다.


덕분에 난 대학원 생활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진짜, 생일날 이래야 해?'


'뭔가 재밌는 일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난 늘 그랬듯이 논문을 쓰기 위해 한글을 켜고 외장하드를 연결했다.


이상하게도, 내가 이 대학원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내가 손대는 컴퓨터마다 블루스크린이 뜨는 일은 없었다.


그저, 그저 이전과 같은 지루한 평범함이 계속되었다.




이때, 또다시 이질감이 들었다.


공기가 분리되는 이 기분, 이 기분은..




내가 1년 전 집에서 느꼈던 그 기분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번엔 뭔가 이상했다.


뭔가가, 뭔가가 가 다가오고 있다.


내 방 밖으로, 바닥을 서서히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들리는 울림에 비해 성인의 것이라기엔 너무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하지만 그 어울리지 않는 위압감은, 나의 잊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비집고 끄집어내는 듯했다.


난 떨리는 한쪽 손을 부여잡으며, 다가올 것에 대비했다.




끼익-




이내 방문이 열리고, 무언가 들어왔다.


.. 연구 가운을 입은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새까만 눈과 머리카락, 하지만 밑으로 갈수록 반투명한 느낌을 주는 진회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탓에 나이가 추측되지 않는 얼굴. 그 얼굴과는 상반되게, 키가 나보다 컸다.


전반적으로 뿜어지는 사람 같지 않은 묘한 분위기에, 난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말을 걸었다.




"어.. 어 누구세요?"




"아.. 아..? 아 여기가 아닌가?"


"아 죄송해요! 제가 방을 잘못 찾았나 봐요!"




고요해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표정을 지으니 좀 더 사람다워졌다. 말에선 맑고 새된 목소리가 났다.


.. 딱히 나쁜 사람 같진 않아서, 나도 긴장을 풀게 되었다.


왜 그렇게 긴장했는지, 순간 나 자신이 한심했다.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헷갈릴 수도 있죠~"


"처음 보는 얼굴인데, 신입인가 봐요?"




"아.. 네.. 오늘 들어왔어요.."


"근대 여기 길이 좀 복잡하네요.. 벌써 30분째인데, 박천 교수님 방이 안 보여요.."


"혹시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아.. 박교수 님? 박교수 님 방 이 층 아니에요."




내 말에 여성은 놀란 눈치였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졌다.




"네? 다른 연구원이 저보고 박교수 님 방은 4층에 있다 했는데..?"




"아.. 그 연구원이 좀 잘못 알려줬나 봐요. 교수님 방은 5층이에요."


"5층 오른쪽 복도 끝, 거기가 교수님 방이에요."




내 말을 들은 여성의 얼굴이 환해졌다.


여성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연구원님! 정말 고마워요!"




"아니 뭐 이런 걸로.."




여성은 내게 성큼 다가와 손을 덥석 잡으며, 연신 감사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이내, 초롱초롱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혹시 연구원님, 이름 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난 당황하여 되물었다.




"네?"




"아.. 어.. 그... 감사한 분이라서 이름을 기억하고 싶어서요."




이 말을 들은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같은 대학원 사람에게 굳이 경계를 할 필요까진 없는 것 같아, 나의 이름을 알려주기로 했다.




"현설이에요. 현 씨에 눈 설할 때 설."




내 말을 들은 여자는 이름을 듣자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현설 씨! 예쁜 이름이네요."


"그리고.. 아... 저 혹시..."


"제 이름도 알려드릴까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앗 감사합니다! 제 이름은.."


"이상이에요. 상이라고 불러주세요."




내 생일에 만난 묘한 사람, 이상과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


.




그녀는 무료한 내 일상에 나타난 먹같은 존재였다.


흰 도화지에 먹이 닿으면 번지듯, 그녀 또한 내 일상 속에 점점 스며들었다.


머리카락은 검은빛과 잿빛이 공존해도, 그 눈만큼은 순수한 먹같은 검은색이었기에, 난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무언가 끌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 뒤로 몇 달간의 시간이 더 지났다.


이상은 나와 마주치는 시간이 늘더니, 요즘 들어 유독 내 옆에 자주 붙어있는다.


일 안 해도 되느냐 핀잔을 주어도 그녀는 괜찮다며, 오늘치 일은 다 했다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아무도 이상에게 뭐라 그러지 않았다. 꼭 그녀가 나에게만 보이는 듯, 이상을 종종 쳐다보긴 하지만 다들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


나도 순수한 그녀가 싫진 않았으니, 이상이 치대는 걸 그냥 내버려두었다.




"상이씨, 저도 일해야 해요. 논문 밀렸다고요."




"앗! 죄송해요.. 제가 너무 귀찮게 굴었나요?"




또다. 이상은 내가 뭐라 그러면 풀이 죽은 목소리와 축 쳐진 표정으로 날 곤욕스럽게 한다.


꼭 현실적인 이야기를 할 때면, 이상은 풀이 죽었다.




"죄송해요..."




"어휴.. 아니에요 상이씨. 그래도 저 이건 해야 하니깐, 다 하고 놀아드릴게요."


"일 다하면 저기 카페나 같이 가요."




난 한 가게에 시선을 두고 창 밖을 가리켰다.


'우주선' 카페의 이름이었다.




"앗..! 넵! 좋아요!"




이상은 그 카페를 보자 방긋 웃었다.


거기가 그리도 좋은지, 이상은 저 카페를 가자고 하면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웃곤 했다.


하긴, 나도 저 카페가 좋다.


저곳은 내가 학창 시절 자주 애용하던 장소였으나 깐. 저곳에서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소중한 이들도 참 많이 사귀었었다.


그중 한 명이 누구였더라..




"현설 님!"


"저 그럼 이따 올게요!"




한참 생각에 빠질 무렵, 이상은 다시 오겠단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가버렸다.


하고픈 말이 생각날락 말락 했는데, 본인이 가버렸으니 잠시 머릿속에 넣어두고 나중에 묻기로 했다.


'우리가 언제 만난 적 있는지'에 대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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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의 공기는 따뜻하고, 커피와 나무향이 은은하게 깔려있었다.


난 주문 후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이상이 주문을 끝내고 오길 기다렸다.




"현설 님은 뭐 시키셨어요?"




"아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상이씨는요?"




"아 저는 딸기 라떼 시켰어요!"




"늘 시키던 것만 시키시네요. 그렇게 계속 먹으면 안 질려요?"




이상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전 딸기가 좋아요. 좋아하는 사람이 추천해 준 거 여서요."




그 말에 난 흥미가 돋았다.




"좋아하는 사람? 상이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 네. 지금은 멀리 떠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좋아해요!"




의외네. 라 말하며 다음 토픽을 던지려던 중, 음료가 나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한결같았다. 언제나 같은 맛과 온도로 날 평온하게 만들었다. 카페인도 겸사겸사 있고.


그리고 이상도 한결같았다.


늘 시키는 똑같은 음료들, 언제나 비슷한 대화에도 깔깔 웃는 그녀의 모습은 가식적이기보단 '연극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어린아이들이 늘 식상하고 같은 연극을 재밌어하듯, 이상도 늘 똑같은 나날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습에서, 하도 오랫동안 하여 능숙해져 버린, 어리숙한 연기가 느껴질 때도 있었다.


참 뭐 하는 사람일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나저나 상이씨."




"네!"




"상이씨는 어디서 왔어요? 생각해 보니까 여태까지 상이씨 고향을 들은 적 없네."




"전.. 전 해외에서 왔어요."




"해외?"




'아, 그래서 생김새가 그렇게 이질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은 내가 아는 인종 중에선 닮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첫인상도 뭔지 모르겠다였었는데..




"해외 어디?"




"아.. 기억이 안 나요. 저 진짜 어릴 때 한국에 왔는데, 이후로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셔서요."




"아."




이런, 말실수를 했다.


근대 이상의 표정이 이상했다.


분명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 함에도, 표정이 변하지 않고 평온했다.




"아 상이씨 미안."




"아니에요!"




이번엔 부드럽게 눈을 접으며 웃는다.


.. 기분 탓이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 그럼 현설 님. 현설 님은.."


"운명을 믿으세요?"




풉-


순간 먹던 커피를 뿜었다. 당연했다 너무 뚱딴지같은 질문 아닌가.




"아니 부모님 얘기하다 갑자기.."




난 휴지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이에 이상은 '아차'하는 얼굴로 눈알을 굴렸다.




"아.. 어.. 음... 화재를 좀 돌리면 어떨까 싶어서요."


"주제가 너무 뜬금없었다면 죄송해요!"




다시 쭈글해지는 이상을 보며 난 손사래를 쳤다.




"아냐 아냐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갑작스러워서 그래요."


"운명... 운명이라."


"그건 그냥 미신이죠! 인간끼리의 만남은 무작위적인 건대, 거기에 오컬트 적인 사상을 대입하는 건 좀 웃기다 생각해서요."




내 말에 이상은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자연스럽게 만들고, 내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저는 운명을 믿어요."


"저의 사랑은, 정말 운명적인 시작이었거든요."


"그래서 여전히 믿고 있어요."




이상은 딸기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탁자에 내려놓은 연분홍 빛 우유에 비친 실루엣을 빤히 바라보았다.




".. 어떤 걸요?"




이상은 시선을 올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검은 눈동자에, 내가 비친다.




"제 이상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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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이상과 같이 지낸 지도 1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그녀와도 많이 친해졌다. 말도 놓고, 내 집에 초청해 같이 놀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다른 친구들에게 이상을 소개해주는 것은, 꺼려했다.


그녀는 나 말곤 다른 사람들을 만나길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은 쉬는 날이라 우리끼리 어디 쇼핑이나 맛있는 거라도 먹으며 놀기로 한 하루였다.


신나게 쇼핑을 하고 예쁜 포토존이 있는 카페도 가고 밥을 먹은 뒤, 우린 분위기 좋은 바에서 술을 마시기로 했다.




"여기 분위기 정말 좋데."




"진짜? 기대된다~"




이상의 딱딱한 말투도 어느새 더 자연스러워졌다.


어느 지점부터 그녀의 '연극하는 어린아이'는 사라지고, 대신 '그냥 어린아이'가 나타난 느낌이었다.


.. 나이 좀 먹은.




우린 바의 카운터 석에 차례로 앉아 주문을 하기 위해 메뉴를 둘러보았다.


근대 이상의 표정이 좀 곤란해 보였다.


'아, 생각해 보니 이상은 이런 곳이 처음일 수도 있겠구나.' 란 생각이 들어 이상에게 물었다.




"상아, 너 이런 곳은 처음이야?"




"아? 어 그건 아닌데.. 찾는 게 없어서.."




"뭘 찾는데?"




".. 블루 하와이."




그 말을 들은 나는 책장을 쭉 넘겨보았다.


.. 진짜로 블루 하와이는 없었다.


이상은 정말로 당황한 눈치로, 동요하고 있었다.


.. 난 그녀가 손톱을 뜯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뭐야 왜 그렇게 당황해. 그리고 손톱 뜯지 마, 안 좋아 그거."




"어? 어? 아! 아니야! 내가 지금 좀 블루 하와이를 많이 먹고 싶었나 봐. 미안."




오랜만에 보는 작위적이고 딱딱한 모습.


하지만 이런 거에 태클걸기엔 그녀는 언제나 이래왔다. 그리고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기도 했고.


난 그녀에게 블루 하와이 같이 달달한 칵테일을 몇 개 추천해 주었고, 우린 그곳에서 기분 좋은 수다를 떨다 집으로 돌아왔다.


.


.


.


오늘은 이상을 만난 지 정확히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니까, 내 생일이라는 소리이다.


참 기분 좋은 날이었다. 대학원 일도 얼마 없어 일찍 끝날 것 같았고, 이상과 함께 갈 멋진 레스토랑도 몰래 예약해 두었다.


서프라이즈로 말해주면 분명 좋아할 것이다.




나는 빠르게 일을 끝내고 황혼이 내리는 저녁에, 이상에게 찾아갔다.




"상아~! 거기 있어?"




"어? 응!"




이상은 내 목소리에 놀란 듯 튀어나오며 나를 반겼다.




"왜?"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내 말에 이상은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얘졌다.


하지만 이내 혈색을 되찾고, 나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무슨 날인데?"




"내 생일이잖아! 그래서 오늘 내가 멋진 식당 하나 예약해 놨어, 거기에 밥 먹으러 가자."


"나 일도 다 끝났어! 옷만 갈아 입ㄱ.."




덥석-


이상이 갑자기 내 소맷자락을 잡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자제하려는 듯, 팔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


하지만 손은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 상아? 왜 그래?"




"그으... 있잖아 설아..."


"오늘은 식당 말고 우리 집으로 가면 안 될까..?"




"앵? 왜?"




"어... 음... 좀 더, 소중한 장소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어서.."


"그래도 될까?"




난 잠시 고민했다.


이상이 말하는 건 진실되어 보이고, 어쩌면 애원하듯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식당은 내가 3개월 전부터 어렵게 예약한 곳이었다.


이상이 좋아할만한 곳이기도 했지만, 나도 정말 가고 싶은 곳이었기에 포기하긴 싫었다.




"미안, 나 여기 진짜 어렵게 예약했거든. 그리고 나 여기 꼭 가고 싶었어서, 좀 어려울 것 같아."




난 그 말을 하며 이상을 보았다.


이상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날 보지 않고 있었다.


.. 하지만 그녀의 소맷자락을 잡은 손이 더 떨리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어, 그 설아. 그, 어. 안돼, 오늘은 안돼."


"안돼 오늘은. 진짜 안돼."




"... 어? 그게 무슨 말이야?"




"..."


"오늘은 땅이 너를 붙잡고, 하늘이 너를 버린 날이야."


"너는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 붉은 먹을 뿌렸고, 그건 나에게 깊게 스며들었어."


"난.. 난..."




이상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더 꽉 쥐었다.


그녀의 눈에선 굵은 눈물이 방울 방울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난 너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너의 이상이자, 너의 모순이야!"


"수십 년을 찾아다닌 끝에 찾은 너를, 여기서 잃을 순 없어."




'이데아.'


'네 이름은 이데아야.'




지금 와서 이 말이 문득 생각나는 건 왜일까.


그 이상했던 기억, 내 머릿속 깊숙한 심연 저편에 묻어놨던 기억이 살아나는 기분에 난 그때의 감각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낮 섬에서, 경의로움에서 오는 공포감. 하지만 나를 해칠 것 같진 않았다는 안도감.




'이데아, 나의 패러독스'




이상, 그것은 나의 모순.


하지만 어째서?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 그녀의 행동이 특이하긴 했어도, 오늘같이 이상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 그리고 내 기억과 이어진 그 말들은, 나를 무언의 공포감으로 몰고 가기 충분했다.




"... 전부터 묻고싶은게 있었어."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어..?"


"어떻게..! 어떻게..!?"




난 이내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말을 뱉고 말았다.




"너, 정체가 뭐야..?!"




내 말에 이상은, 아니 이상이라 불렀던 것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정말 슬프게 울고 있었다.


방금 그녀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들었는데, 기억 속 이질적인 존재를 겹쳐 보았었는대.


그녀의 표정은 이런 나의 생각을 너무나도 헷갈리게 만들었다.




"난.. 난.."


"난 널 사랑하는 이상이야!"




그 말을 들은 나는, 빠르게 자리를 이탈했다.


인간이 아닌 것이 사람의 표정을 짓는 것인지, 그 반대인 것인지.


나를 어떻게 하려 드는 것인지에 대한 공포감이 그녀의 마지막 말을 기점으로 폭발했다.


그녀의 비명 같은 만류를 무시한 채, 나는 대학원 밖으로 달려 나가 택시를 잡으러 대학원 앞 대로로 나갔다.




"택시... 택시..!"




하지만 택시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상하게 차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도 없이, 난 일단 한 블록 더 떨어진 대로로 뛰어가기로 했다.


바로 앞에 횡단보도가 있었기에, 바로 초록불이 되는 것을 확인하고 건너려는 순간.




"현설!!!"




그것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왔는지, 그것이 내 뒤에서 30m 떨어져 있었다.




난 주변을 살필 새 없이 바로 횡단보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느새 나타난 밝은 빛이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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