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기태 장편소설_문학동네
여행지에 챙겨간 책이다.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추천한 세 권의 소설 중 한 권. 그러고도 많은 사람들이 참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더랬다. 그래서 읽고 싶었던 책. 전혀 모르는 작가의 책이지만 손에 들고는 놓는 게 아쉬웠다. 재미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생각이 많아지는 책이었으며, 풍자와 현실 인식, 선한 마음의 회복 그런 어떤 마음들의 경계가 느껴지는 책이었다. 온전히 공감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아주 작은 파문이 일어나는 듯한.
1. 세상의 모든 바다
무엇을 했어야 할 의무는 내게 없었다. 하지만 할 수도 있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기분. 내가 고작 한 일이란 나조차도 완전히 믿지 않은 소문을 전한 것. 퍼포먼스 주동자들이 소문을 일부러 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누군가의 단순한 망상이 와전되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영록에게 전한 것은 나였다. 그 틀림없는 사실이 나는 참을 수 없이 불편했다. (31쪽)
지금은 펼치지 않고도 떠올릴 수 있는 그 세계지도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이 다소 무섭다. 바다를 등지고 아무리 멀리 가도, 반드시 세상 어떤 바다와 다시 마주치게 될 테니까. 그 불편한 예감에 시달릴 때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 지하 소극장에서 본 오타쿠들이 떠오른다. 그 기모이한 오타쿠들의 열렬한 구호. 가치코이코죠. 진짜 사랑 고백. 좋아 좋아 정말 좋아 역시 좋아…… 그것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 (37쪽) / ‘세상의 모든 바다’ 중
책에 실려있는 첫 번째 단편은 ‘세상의 모든 바다’이다. 읽고 나서는 한참을 ‘근시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했다. 서울에서 유학 중인 한국계 일본인. 특히 한국의 가수를 좋아하여 한국어를 배우고 꿈을 가지게 된 사람.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의 표는 없었지만, 공연장 주변을 찾아 한 학생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학생에게 전한 스스로조차 ‘완전히 믿지 않은 소문’. 그것이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그날 학생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사회적으로 선한 일을 주도하는, 지지할 수 있으며 또한 거리낌 없이 좋아해도 되는 그룹의 영향력, 그 영향력을 바탕으로 다른 이들이 벌인 퍼포먼스 그것이 불러온 사고였다. 목적과 의도는 좋았으나 온전히 좋은 의도만으로 결과를 예측할 수는 없으며,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생각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 그것이 사고를 일으켰다. 어쩌면 소셜미디어를 통해 퍼진 가짜뉴스였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향한 마음을 이용한 일이었으니 의도마저 좋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 속 주인공인 ‘하쿠’가 느끼는 혼란, ‘세상의 모든 바다’ 그룹의 영향력과 가치, 반전시위로 인한 퍼포먼스가 일으킨 인명피해, 그리고 사람들의 다양한 논쟁 속에서 하쿠는 무엇이 좋은지, 어떤 것을 지지해야 하는지 의견을 가질 수 없었다. 그 마음에 온전히 공감이 갔다.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단 두 가지만의 시선으로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옳고 그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편적인 도덕관’을 가져야 한다. 세상의 모든 바다는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으며, 거의 모든 일들이 복합적이면서도 다층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 가짜뉴스가 온전히 진실이라고 믿으며, 편향된 사고방식으로 좌중을 선동하고, 자신의 믿음만이 온전하다고 여기는 마음. 그것을 폭력으로 해결하고자 하며,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위협해도 된다고 여기는 것, 그건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런 편향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2. 나는 잘 살고 있을까?
나는 잘 살고 있을까.
잠들기라는 마지막 과제를 수행하려면 “나는 잘 살고 있다”라고 핵에게 알려주는 편이 좋다. 그러나 그 주문은 너무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다. 내가 연구한바, 구체적 행위나 상태에 대한 간결한 주문일수록 효과가 높다. 나는 통원 치료 중인 질병이 없다. 나는 임금 근로자 평균 이상을 번다. 나는 일 년에 삼주 이상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소송에도 연루되지 않았다. 나는 건조기와 식기세척기와 세 곡 이상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가졌다. 나는 방 세 개에 화장실이 두 개인 자가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주택의 자산 가치는 상승 중이다. 나는 명절이나 경조사가 아니더라도 연락하는 친구가 세 명 이상 있다…… 이런 주문들의 총합이 어떤 임계점에 도달하면 ‘나는 잘 살고 있다’라는 주문이 유효해질까. 위에서 나열한 주문들은 대개 사실이 아니지만, 전부 사실이라면 충분한 걸까. 만약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 같은 주문이 포함되어야 한다면 어떨까. ‘사랑한다’는 ‘잘 살다’만큼이나 모호해서 다시 여러 하위 주문을 요구한다. 연쇄적인 분열을 일으키는 질문들은 하루의 과제를 마치고 어둠 속에서 방심할 때쯤 투하된다. 나는 선할까, 나는 유능할까, 나는 매력적일까, 나는 행복할까, 그리고 나는 내가 잘 살고 있을까를 따지기 전에 필요한 질문을 깨닫기도 한다.
나는 살고 있을까. / ‘팍스 아토미카’ 중
잠을 자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는데, 아니 평소에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편이었는데 왜 이렇게 바뀐 걸까? 방학이어서 밤낮이 바뀐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방학을 하고도 계속 출근을 했다. 여행을 다녀와서인가? 여행이 길고 시차가 있기는 했지만 돌아와서 잘 극복했다고 믿었다. 며칠 잘 자다가 다시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다. 혹시 치솟는 혈당을 관리하지 못해서 잠을 못 자는 걸까? 아님 갱년기인가? 분명 잠을 자지 못해서 든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들로 잠이 오지 않는다.
‘팍스 아토미카’는 강박증을 앓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으면서 남자가 찾은 극복 방법은 ‘주문’이라는 명명이다. 스스로 끊임없이 자신이 한 행동을 되새기는 것. 그러면서 했다고 인지하는 것. 주인공이 잠들지 못하는 밤, 자신의 대뇌에게 주문하는 말. ‘나는 잘 살고 있다’라는 구절. 이렇게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주문은 오히려 주인공에게 진정 필요한 질문을 깨닫게 만들어준다. ‘나는 살고 있을까?’
주인공은 인지한다. 스스로 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구체적 행위로 표현되는 것이며, 그것이 그나마 극히 부분적으로 살고 있음을 지지한다는 것. 그래서 주인공은 잠들기 전에 ‘나는 잘 살고 있다’라고 주문을 명명하기 전에 ‘나는 알람을 오전 여섯 시에 맞추었다’라고 해야 한다는 것.
잘 살고 있을까? 나는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나는 사랑받고 있을까? 나는 선할까? 나는 유능할까? 나는 매력적일까? 나는 행복할까? 이렇게 모호하고 포괄적인 질문들 앞에 결국 나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답은 일상의 순간을 말하는 것뿐이다. 사람들마다 ‘잘 살고 있다’의 기준을 저마다 다양하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겠지만, 나에게는 적어도 일상의 루틴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잘 살고 있다의 기준이 된다.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일상을 얼른 회복해야 한다.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피로가 축적되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늘었다. 강박은 아니지만, 빨리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 소설의 제목 ‘팍스 아토미카’는 핵을 보유한 국가 간의 상호확증파괴를 전제한 평화적 시기를 말한다고 한다. 불안과 공격을 전제로 하는 평화. 과연 지속할 수 있는 평화일까? 주인공의 강박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지만,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상황을 마주함으로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그래,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마음, 그 마음으로 나는 나의 불안을 평화로 받아들여야겠다.
3. 정리
소설 속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었다. 단편의 주인공 ‘진주’와 ‘니콜라이’의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었다. 또한 ‘보편 교양’은 읽으면서 ‘고전 읽기’ 수업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하여 고민했고, 교사의 일상과 마음이 너무 잘 제시되어 있어 놀라웠다. 내 생각이 늘 깊지 못해, 소설을 이해하는 폭이 나의 경험에서 비롯된 고만고만의 이해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생각할 것들이 참 많은 소설이었다. 그러면서 어느 작품하나 속 시원하게 환상적 긍정과 희망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은 지금 사회의 모습과 맞닿아 있어서 인 것 같았다. 현실의 모습을 참 잘 담고 있는 소설이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나조차도 완전히 믿지 않은 소문을 전했던 경험이 있다면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어떤 내용이었으며, 그로 인해 일어난 사건과 결과는 무엇인지, 나의 변화는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자신만의 강박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그 강박을 벗어나기 위한 나만의 주문이 있는지 이야기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