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윤 소설_문학동네, 북클럽 문학동네, 이달책
책의 표지가 참 예쁘다. 문학동네 북클럽의 ‘이달책’이어서 신청했지만, 사실 그전에 이효석 문학상에서 안윤 작가님의 ‘담담’을 읽었기에 문학동네 북클럽의 ‘이달책’을 선택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책을 다 읽고는 참 고통스럽지만 결국 봄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담’에서 보여준 정서가 책 속에 그대로 담겨 있기도 했으며, 내가 막연히 좋아하는 정서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책을 읽는 순간엔 참 많이 고통스러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이 책이 좋아졌을까, 한참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책을 다 읽은 후 북클럽 문학동네 멤버십 회원을 대상으로 하는 작가와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도 줌으로 참여하였다. 편집자와 작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참 귀한 시간이었다. 사실 작가에 대한 어떤 배경 지식도 없었고, 작가의 소설 중 읽어본 작품은 ‘담담’밖에 없었기에 궁금하기도 했다. 줌토크에 참여하고 나니,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모두 읽어보고 싶었다. 방학 때 한두 권 정도 읽어야겠다. 책을 읽을 생각만으로도 참 좋다.
1. 그럭저럭 이어지는 삶.
통증에 관해서라면 지언과 나는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했다. 다른 종류이긴 하지만, 우리는 통증을 만성적으로 견디는 삶의 질감과 색조를 자연스럽게 공유하고 있었다. 통증은 불시에 찾아온다. 마음대로 통제할 수도, 갖다 버릴 수도 없다. 오랜 기간 통증과 더불어 살다 보면 내가 내 몸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이 온다.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으면 달래면서 살 방법을 모색하게 되고, 그러면 또 그럭저럭 삶이 이어진다.(187쪽)
지방도 살기 좋잖아, 같은 말들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만남을 피한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청춘을 오롯이 바치고도 무엇 하나 이룬 것 없다는 자격지심과 심신의 병을 얻어 가족 곁으로 돌아간다는 수치심, 실패한 인생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이 마음속 여러 겹의 껍질 속에 교묘히 감춰져 있었다. 친구들의 만나자는 요청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여러 차례 거절하고 난 뒤에야 내 안의 뿌리 깊은 부끄러움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192쪽)/ ‘하지’ 중.
전체 일곱 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단편들 모두 조금씩 비슷한 정서를 보여준다. 여성의 시각과 여성 곁에 머물러 있는 참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이 소설에 나는 감정이입이 잘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좋은 친구도 생각났고, 그도 생각났으며, 아이도 생각났다.
인용 부분, ‘하지’는 더 이상 빵을 굽지 못하게 된 ‘수림’과 이유를 알 수 없는 통증으로 삶의 청춘을 다 보낸 ‘지언’의 이야기이다. 읽으면서 ‘통증’을 표현한 부분에 마음이 갔다. 사람들은 종종 이야기하곤 한다. 이유 없는 일은 없다고. 근데 살면서 내가 느낀 일 중의 하나는 나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어떤 일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일은 인정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그렇게 인정하고 나면, 아주 조금 마음이 달라졌다. 물론 인정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인지만으로도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언의 통증은 만성적이었다. 공부하면서 생긴 허리디스크에서부터 어느 날 갑자기 목 뒤를 지나가는 찌릿함으로 발생한 전신통증까지. 통증은 서서히 일상을 잠식해 나갔다. 일상적인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렇게 통증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지연은 우울증이 왔고, 통증을 달래며 같이 살아가면서 조금씩 일상을 회복하였다.
때때로 무력감이 엄습할 때가 있다. 갑자기 ‘툭’ 하고 오는 어떤 감정. 예전엔 그런 감정이 오면, 이유가 뭔지 찾아보려 했었다. 해야 할 업무가 너무 많아서 그런가, 그 사람이 화나 보이던데 나한테 섭섭한 것이 있어서 그런가, 그런 이유. 하지만 감정이라는 것이 나 스스로의 의지로 통제가 잘 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그냥 ‘내가 그런 상태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우울하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양치질을 하고 출근을 하고 빵을 먹었다. 그냥 일상을 살아가는 일. 소설의 구절처럼 그러면 또 그럭저럭 삶이 이어진다.
수림은 갑자기 오랜 시간 동안 해 오던 빵 굽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어느 날 빵 냄새를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독립하고 가게를 열어 정착하던 그 시간 동안 빵을 구워 팔면서 얻게 된 팔목의 통증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이겨 낼 수 있었던 수림이었다. 하지만 역겨워진 빵 냄새를 수림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가게를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한동안 사람도 만나지 않고 피하던 수림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부끄러움, 무엇 하나 이룬 것 없다는 자격지심, 수치심, 두려움.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할 때가 많다. 나는 가족에게도 그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고스란히 나의 몫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안정적이지 못한 일상에서의 방황. 그 감정이 가족들에게 짐이 될까 봐 말하지 못할 때도 많다. 하지만 그 감정을 나 자신에게까지 속이지 않는다. 괜찮다, 괜찮다 말하지 않는다. 불안하고 방황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방법을 온전히 찾지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미래의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아가는 것. 나에게는 그것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방법이다.
얼마 전 친구에게 너무 많이 먹어서 걱정이라고 했더니, 친구는 음식이 무슨 맛인지를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나는 우리 둘 다 우리 마음을 잘 들여다보자고 이야기했다. 내가 너무 많이 먹는 것, 그가 음식의 맛을 모르는 것,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우리 마음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며칠 전 ‘동지’에 팥죽을 먹으면서, 이렇게 계절감을 느끼는 음식을 먹는 것, 행복한 일이구나, 그런 마음도 들었다. 그러면서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있음이 온몸으로 다가왔다.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 그리고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동지를 지나면서 다시 낮과 밤의 길이는 서서히 비슷해지고 삶은 그렇게 그럭저럭 살아진다. 그래, 그렇게.
2. 작은 눈덩이 하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거리에 있는 이십사 시 마트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동아리 사람들이 술이나 안줏거리를 사러 곧잘 들르는 곳이었다. 봄기운이 완연한 밤이었다. 준수는 차도와 가까운 쪽에서 걸으며, 내일은 출근하지 않는지, 회사 생활은 어떤지, 요즘 뭐가 가장 힘든지 물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건네는 질문들이 따뜻하게 느껴졌고 그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가 나를 세진의 절친한 친구나 사회 초년생이 아닌, 나라는 한 사람으로 대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때 내 눈에는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준수가 완전한 어른처럼 보였고 영화감독을 꿈꾸는 그가 내게 보여주는 관심이 조금은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의 물음에 답하면서 나는 내 안에서 울컥 치미는 무언가를 알아차렸고 그것이 불쑥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돌이켜보면 그건 숨겨져 있던 내 오랜 열등감과 갑작스레 피어난 그에 대한 열망이 한데 뒤섞이며 일어난 멀미 같은 것이었다. (138쪽)/ ‘작은 눈덩이 하나’ 중.
‘작은 눈덩이 하나’는 의선과 준수의 이야기이다. 이십 대 청춘의 사랑, 그런데 끝끝내 다가가지 않는, 또는 못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고려의 풍속에 첫눈을 봉하여 지인의 집 앞에 갖다 놓으면 그것을 받은 이가 반드시 한턱을 내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 이야기 속의 ‘작은 눈덩이 하나’가 소설의 제목이 되었다.
대학을 나오지 않고 일을 선택한 의선과 의선의 친구 세진의 선배 준수. 의선은 준서의 따뜻한 친절에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봄이었고, 밤이었으며, 일상의 소소함을 조심스럽게 물어봐 주는 남자였으며, 함께 길을 걷는 순간이었기에 의선을 대학생이 아니라는 열등감과 어른 같은 그에 대한 열망이 뒤섞여 멀미 같은 감정에 휩싸인다. 사랑이다.
하지만 의선과 준수는 끝끝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엮이지 못한다. 나의 부끄러운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과 함께하지 못하는 어떤 마음, 그런 것.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의선은 일을 하였기에, 영화를 찍는 대학생 준수보다는 여유로웠고, 준수가 영화제작비가 없어 힘들어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준수에게 돈을 건넨다. 준수는 돈을 다 갚지 못했고, 더 이상 의선에게 다가가지 못했으며, 세월이 많이 흘러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도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살아간다. 의선은 준서를 오래 잊지 못한 채 마음에 두지만 눈 내리는 밤 준서의 카페 앞에 눈덩이를 모아 두고 나옴으로써 그와의 관계를 마음에서 정리한다. 이별이다.
이 소설이 마음에 남았던 이유는 일렁이는 어떤 감정들 때문이었다. 끝내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지만, 열등감과 열망이 뒤섞인 어떤 감정. 그 감정의 순간들. 살면서 한 번쯤은 맞이하게 되는 그런 상황.
이미 연락이 전혀 되지 않지만, 봄밤 대학 기숙사를 향해 함께 걸어가던 철길, 선배와의 시간이 생각났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은 희미해졌고, 그때의 순간은 미화되어 아름답게만 기억되지만 그래도 그때의 멀미 같은 감정. 선배가 참 좋은데 말을 못 하겠고, 나를 끝끝내 봐주지 않던 선배에 대한 야속함과 이렇게 따뜻하니 그 또한 나와 비슷한 감정일지 모른다는 설렘. 그 마음이 공존하던 시간.
하지만 그 선배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어쩌다 들리는 어디서 뭐 한다더라, 그런 말들에 검색해 보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소식도 결국 그것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3. 정리
안윤의 인물들은 관계의 적정 거리에 민감하다. 그들은 연인이 된 후에도 각자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는다. 상대방에게든 자신에게든 무엇을 바꾸거나 이해시키려고 애쓰지 않고 각자와 서로의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두고, 또 받아들이다. 그리고 관계에서 파생한 감정과 의미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두려 한다. (266쪽)/ 해설_안서현_시간 관찰자 시점 중.
이거였구나, 내가 이 소설집이 참 좋았던 이유. 뭔가 모를 어떤 마음들. 이거였구나. 해설을 읽고 명확하게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관계의 적정 거리’. 내가 원하는 삶의 어떤 모습이 이 책 속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 책이 좋았나 보다. 처음 ‘담담’을 읽었을 때, 섣부르지 않은 마음을 가진 인물을 닮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안윤 작가님의 책 ‘모린’을 읽고는 ‘기다릴 만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단 마음이 들었다. 결국 내가 원하는 어떤 모습을 이 소설의 인물들이 가지고 있었던 거였다. 관계의 적정 거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참 좋은 소설을 만나 마음이 따뜻하다. 비록 읽는 순간엔 그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참 힘들었지만 결국은 봄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이기에 나는 이 책이 좋다. 겨울 방학 동안 안윤 작가님의 책을 읽어보아야겠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내 안의 수치심이나 부끄러움을 발견했던 순간이 있습니까?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열등감과 열망이 뒤섞인 멀미 같은 마음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언제였으며 그 마음은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