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파챌린지_북클럽문학동네_신주의 장편소설_북다
제목이 좋았다. 제목만으로 뭔가를 연상할 수 있는 제목이었다. '종말'이란 단어에 '친애하는'이라고 수식어를 붙이니, 누군가의 종말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게 만들었다. 끝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있을 거라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읽은 책이다. 하지만 막상 읽을 땐, 많이 고통스러웠다. 정말 잘 읽히고, 술술 읽히며,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지만, 내용 자체는 고통이 가득한 글이었다. 단순히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스스로 죽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의지를 가지기도 전에 주입된 헛된 믿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지극히 무난하게 청소년기를 보낸 나에게도 수치스러웠던 어떤 순간들이 있었지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오래, 아주 오래 살고 싶지는 않단 마음이 생기기는 했다.
이 책은 믿음이라는 허상아래, 자신의 의지를 가지지 못한 아이들의 성장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다만, 성장하였지만, 밝고 희망찬 성장이 아니라, 꾸역꾸역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나'의 목적의식보다는 그냥 살아지니 살아가는 것이란 생각이 더 강하기 때문에. 그래서 고통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낸 아이들이, 지금의 내 나이 또래의 삶이 되어서도 그 고통이 가벼워지지 않고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마다의 삶의 무게가 다르듯, 그것을 이겨내는 방식 또한 다르리라고 생각한다.
1. 믿음의 차원
교회에 다닌다고 다 똑같은 게 아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교인이고, 신을 믿는 사람은 성도고, 신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니까. 믿음에도 차원이 있다는 소리지. 아버지는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됐단다. 이제 네 차례다. 너도 하나님의 진짜 자녀가 되어야지.
제 믿음은 변함없어요.
아니, 아니지. 너는 신이 네가 원하는 걸 해줘야 한다고 믿고 있잖니.
그래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건 진짜 믿음이 아니란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신이 내게 행하는 가장 옳은 일이라고 믿는 정도는 되어야지. (90쪽)
이 책은 사이비 종교 단체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설립한 성화고에 다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휴거를 믿는 사람들, 그리고 휴거가 일어나지 않자 휴거에 대한 날짜 계산이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었다며, 다시 또 휴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1992년에 나는 중학생이었다. 그때도 옆 학교에 다니는 누군가가 휴거를 기다린다는 소문을 들었고, 조금, 아주 조금 궁금하긴 했다. 정말 세상이 없어질까? 그런 마음.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그다지 그런 일들에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잊고 살았더랬다.
시집을 오면서 시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성경책을 열심히 읽었고, 새벽기도에도 나갔으며, 금요 철야에도 나갔었다.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가 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끝끝내 내가 바라는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다를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셨으며, 분명 더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라고 믿음을 지키라고 말씀해 주셨다. 더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다만, 매일 감사일기를 쓰듯 주님께 감사함을 고백하고 있으며, 아침 출근길엔 찬송가를 듣고, 아침에 눈 뜨면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나지막이 기도를 드린다. 교회라는 눈에 보이는 공간에 가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내 주변에 계신다는 것을 안다. 백석의 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의 구절처럼,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곤 한다. 나를 만드신 이가 하나님이시기에, 나를 거두어가실 이도 하나님이란 생각이 저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내게 종교란 그런 것이다. 나의 생각과 영역을 벗어난 부분. 그렇지만 그것이 나의 비도덕적 행동에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을 잘 안다. 역설적으로 종교적 구속과 제약이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들었음도 아주 가끔 느낄 때가 있다.
책 속 아이들은 스스로 종교에 대하여 받아들이는 시간도 주어지지 않은 채 부모를 따라 믿음에 대하여 강요받았다. 아버지가 이사장인 백보훈과 아버지가 학교의 교목인 여호수아, 그리고 아버지가 이단이었음이 밝혀져 아이들 사이에서는 믿음 없는 자이면서 동시에 왕따가 되어버린 주하나와, 드라마만이 희망이었던 구영진, 네 명의 아이들은 성화고 학교 신문에 '자기 주도식 종말'을 의미하는 유언을 싣기로 한다. 그러면서 네 명의 아이들에게 얽힌 삶과 죽음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모태신앙이 아니라, 지극히 자유의지에 의하여 교회에 나가고,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나였기에 교회를 나오는 것은 쉬운 선택이었다. 아이에게도 굳이 종교를 강요할 생각이 없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간다는 말이 두렵지 않았다. 지금 내 삶에서 천국을 맛보지 않으면 천국에 대한 갈망이 없을 거라고, 그래서 나의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지금은 아무도 내게 교회에 나오라고, 다시 하나님을 믿으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교회 다닐 동안 나는 사실 모든 행동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평가받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잘 되면 하나님의 은혜이고, 잘 안되면 믿음이 부족한 거라는 식의 평가가 어이없기도 했었다.
소설 속, 하나, 휴거 때 믿음이 부족하여 자신만 남게 될 것이 두려운 그 마음도 이해가 되었으며, 영진을 만나 끊임없이 믿음에 대하여 고민하는 보훈도 이해가 되었고, 나중에 자신의 이름을 호수라 바꾸게 되는 여호수아도 이해가 되었다. 믿음은 강요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아이들에게도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가치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기에.
2. 각자의 불행을 떼어 서로에게 떠 넘기는.
주하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정확히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백보훈의 사고로 인한 충격 때문인지, 스스로 손목을 그은 구영진에게서 느끼는 상실의 마음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믿음이 협박처럼 쓰이는 이 세계를 떠나겠다는 여호수아 때문인지. 다만 하나는 확신했다. 십일조처럼 각자 조금씩 자신의 불행을 떼어 서로에게 떠넘겼다는 것. 주하나는 그 어떤 것도 더는 믿지 않기로 했다. 누구에게도 미래 같은 것을 함부로 위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245쪽)
초등학교 시절, 서로의 비밀을 이야기하며,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같이 타던 친구가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의 꽁무니를 졸졸 잘 쫓아다녀, 친구들이 놀릴 때, 나를 옹호하고 변호해 주던 친구도 있었다. 좋아하는 배우의 초상화를 그려주던 친구도 있었다. 도토리의 속을 파내고 거기에 편지를 적은 종이를 돌돌 말아 넣고 뚜껑을 씌워 내 자리에 두던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하고 연락처도 몰라 연락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오면서 내겐 참 많은 친구들이 있었지만, 지금껏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친구는 몇몇이 되지 않는다. 굳이 연락을 이어하지 않는 나의 습관도 문제이겠지만, 그 당시 그렇게 중요했던 사람들이 살면서 만나는 다른 이들에게 묻혀 잊히기도 하였다. 뒤늦게 관계의 소중함을 알았지만 이미 많은 시간이 흐른 뒤라 반성만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지금 곁에 있는 이에게 그 마음을 잘 표현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소설 속 하나와 영진, 그리고 보훈과 여호수아는 믿음을 강요하던 폭력적인 공간에서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무엇이 바른 길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대로 가르쳐주는 어른을 만나지 못했던 이들은, 자신만의 불행을 서로에게 전염시키며, 또는 모른척하며, 또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면서 함께 자기 주도식 종말을 기다리며 유언을 남겼고 그렇게 서로의 곁에 있었다. 소설에서 나는 오히려 그 모습이 고통스러웠다. 각자의 불행을 떼어 떠 넘기는 삶. 그걸 원하지 않았지만, 얽히고 얽힌 관계는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다. 잊고 싶을 만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을 만큼. 그리고 스스로의 손목에 상처를 새길만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여전히 하나를 생각하며 유언을 남기던 영진, 다양한 우울증 약들을 섞어먹어 가며 종말을 기다리던 영진은 하나와 재회하게 된다. 그리고는 드디어 종말을 끝낼 수 있었다. 다시 살아가겠지. 예전의 시간을 추억처럼 이야기하면서 또 그렇게 버티면서 살아가겠지. 소설은 끝까지 살아남은 자로서 종말을 스스로 끝내는 인물의 유언으로 끝맺는다. 참 오래 아픈 인물의 고통이 조금은 가벼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유서를 쓰지 않고도 잘 살아내기를 바랐다.
3. 정리.
앞부분은 숨 막힐 정도록 이야기가 빨라,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갈수록 내가 상상했던, 아름다운 결말이 아니라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영진과 하나에겐, 이 결말이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죽고 싶었던, 종말을 기다리던 두 학생은, 서로의 곁에 있으줌으로써 종말을 끝냈단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믿음의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에 대한 어떤 불신들도 생겼으며, 내가 아는 하나님과 그들이 아는 하나님이 다를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마음도 들었다. 무엇보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폭력성에도 속이 상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지금 내 곁에 있는 참 좋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불행을 떼어 넘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줄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이 현재를 살게 만들어 주는 건 아닌가, 그런 감사함이 마음에 스민 날이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종교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특별히 자신의 삶에서 종교가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있는지, 또는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가 있는지, 그 종교는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한때 참 친했지만, 자신의 불행을 서로에게 떼어 넘긴다고 여겼던 관계가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지금은 그 사람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으며, 어떤 과정 속에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