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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시간 126.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 진은영 산문_마음산책

by 벼리바라기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_사진.jpg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참 좋은 책을 읽었다. 읽으면서 문맥을 따라 가가기 쉽진 않았지만 아주 오래 천천히 스며드는 문구에 마음이 갔으며, 생각이 깊어졌으며, 책에서 소개한 철학자들과 작가들을 찾아보았으며, 다른 책들이 읽고 싶었다. 그러면서 책이란 그런 거지,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세계에 대한 궁금함을 품게 만들었으며, 내 마음이 조금 더 깨끗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슬픔이 가슴 저 밑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리고는 끝내 울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읽고 싶단 마음이 들었던 건, 잘 알지 못하지만, ‘진은영 시인’의 산문집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월호에 대한 진은영 작가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연민과 수치심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들어줬던 글, 그래서 작가님의 책이 더 읽고 싶었다. 그 마음에 발견하자마자 읽은 책.

이 책은 고전이라 불리는 책에 대한 소개, 비평이 주를 이룬다. 무엇보다 작가님의 서문이 참 좋아서 읽으면서 궁금해졌다. 작가님의 다른 글들이, 그리고 작가님도 나처럼 읽었던 책을 두고, 읽었던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싶어 마음이 참 좋아졌다. 어떤 위로처럼.

사람들이 내게 책을 왜 읽어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떤 말을 할까? 보통은 “책을 읽으면 쉬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전 기뻐도 책을 읽고 슬퍼도 책을 읽어요.” 이렇게 말을 하곤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책을 통해 느꼈던 어떤 감정을 명확하게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한다고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다 기억할 수 없는, 죽고만 싶었던 숱한 순간에 나를 살린 누군가의 문장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도 회복의 과정도 전부 잊었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 나는 위대한 책들을 읽고서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했고 인류를 구원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나처럼 평범한 대부분의 독자에게 독서란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저 삶을 연명하고 있을 뿐이라고 고백했던 헤르베르트를 봐도 그렇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한 뼘이라도 더 훌륭해지는 건 아니라고 장담했지만 그는 쉼 없이 읽었다. (8쪽)


나의 어떤 순간들에 나와 함께 한 이야기가 있었으며, 문장이 있었으며, 지금은 다 잊었다고 해도 그 시간들이 나를 살게 했음을. 나는 그러했음을. 그래서 결국 다시 책을 읽고 있다고 이렇게 조심스럽게 고백할 수 있다.


1. 제의의 핵심


관습이나 종교에 따라서든, 혹은 책을 만드는 방식으로든, 우리가 애도를 위해 선택하는 모든 제의의 핵심은 이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다른 이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고인이 살았던 삶의 역사를 세상에 알리며 그와 정중히, 그리고 천천히 작별하는 것.

2022년 우리가 거리에서 많은 젊은이를 잃고서 치러야 했던 사회적 제의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핵심이 전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패도 사진도 없는 분향소에서 우리는 고인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누군지도 모르는 고인을 애도하고 추모했다. 세상을 떠난 당신이 누구였는지 알고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바로 그 제의에서 말이다.(189쪽)


눈물이 났다. 책을 다 읽고는 진은영 작가님의 시가 읽고 싶어졌다. 그런데 읽은 시가 ‘그날 이후’였다. 아직 4월이 지나지 않았고, 나는 뜻하지 않은 일들에 마음이 지쳐 있었고, 내 이런 감정마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운데, 아이가 아프다는 말이 가슴에 콱 박혀 마음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아이가 아프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존재. 이미 참 많이 큰 아이여도, 어엿한 성인으로 사회의 한 구성원이어도, 아이는 내게 아이다.


인용문이 실린 부분은 ‘앤 카슨’의 ‘녹스’를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작가는 그 책에서 ‘제의’의 의미에 대하여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아빠의 제삿날, 아빠가 돌아가신 지 36년이나 지났지만 우리는 그날 아빠에 대하여 이야기하곤 한다. 내겐 참 다정했던 아빠가 동생에겐 무서운 아빠였다는 사실을 듣고 나는 웃는다. 이런 것. 우리의 기억 속에 있는 죽은 사람을 떠올려, 슬프지만 슬퍼만 하지 않는 것.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와 있어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가 없는 이 시간을 함께 슬퍼하는 것, 그러면서 같이 다시 살아가야 할 이유들을 발견하는 것. 그런 것들이 제의의 역할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공감했다.


진은영 작가님은 이 부분에서 이태원 참사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을 애도하는 국가의 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많이 공감이 갔다. 인권을 보호한다고 앞세워 그들의 이름도, 그들의 사진도 걸지 못하게 한 국가의 애도 방식. 누군가에게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뺏어버린 느낌이다. 그리고 다시 읽은 진은영 작가님의 시 ‘그날 이후’. 울지 않고서는 읽을 수 없는 시이지만, 가만히 예은이의 이름을 부르며,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을 이름 하나를 새겨본다.


2. 단순한 반복이 주는 다정한 위로, 안정.


아! 즐겁다. 그저 나열한 걸 읽었을 뿐인데 이 시인과 친해진 느낌이 든다. 옛 음악 듣기를 즐거워하고 새로운 음악에서 즐거움을 느낄 줄 아는 그에게 호감이 간다. (중략)

세상에는 기쁨을 주는 복잡한 양식도 있다. 그러나 지쳐 있을 때에는 단순한 반복이 안정을 준다. 이런 안정감은 우리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경험한 엄마의 심장 소리에서 연유한다는 견해가 있다. 목록을 쓰면서 행복해하는 사람들은 이 원초적 리듬을 즐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록 작성에 능통한 작가들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백석(1912~1996)이다. 그처럼 목록을, 문학 용어로 말하자면 열거법을 잘 활용한 시인도 없다. (114쪽)


이 책이 참 좋아졌던 이유는 백석 시에 대한 비평문 때문이었다. ‘하나도 잊지 않고 모든 것을 호명하는 다정함이 빚은 시’라는 제목도 마음에 들었다. 이 글을 읽고 나선 슬프고 우울한 세상에서 다정함을 주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만드는 좋은 글의 힘에 대하여 믿음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이 글을 읽고 수업시간에 활용해 봐야지, 하는 그런 마음도 들었다.

백석의 시 ‘모닥불’은 그림이 그려지는 시이다. 모닥불을 쬐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 떠오르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느 바람이 잔잔하게 부는 밤의 따뜻한 불빛이 느껴지는 시. 작가님은 글에서 백석의 시는 별것 아닌 것들을 세다 보면 어느덧 누군가의 절망적인 시간이 지나가고 공포도 불안도 덜어지게 만든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게 바로 다정함의 힘이 아닐까? 분명히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순간, 함께 비명을 지르지 않더라도 그 사람 곁에서 중얼거리듯 있어 주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호명하는 소소하지만 일상 속 어떤 것들의 이름. 그래서 이 글을 읽고서는 다정한 것들을 불러보고 싶어졌다. 단순한 반복이 주는 다정한 위로.

3, 정리.


책이 너무 좋아서 사람들에게 막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책 속에서 소개하는 ‘롤랑바르트의 「밝은 방」, 앤 카슨의 「녹슨」, 존 버거의 「A가 X에게」’는 찾아서 읽고 싶어졌다. 책을 읽으면서 더 읽고 싶은 책들을 발견하게 해 준 좋은 책이다. 또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책이기도 했다. 나의 이해는 좁고 연약해 어떤 상황에서든 쉽게 무너지기 쉬운데,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단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참 좋다. 그러면서도 마음껏 슬퍼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책이다. 슬픔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또한 문학의 힘에 대하여 생각하게 해 준 책이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자신이 읽었던 책 중에 가장 좋았던 책이 있다면 서로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그 책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좋았으며,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단순한 반복이 주는 안정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자신에게 안정을 주는 다정한 것들을 소리 내어 불러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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