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해연 장편소설_엘릭시르
책을 좋아했던 그 처음을 생각해 보면, ‘셜록 홈스’가 있다. 우리 집에는 그 책이 없었지만 산 윗동네 작은어머니 댁에는 셜록 홈스의 작은 책 시리즈가 있었다. 그래서 작은어머니 댁에 가면 그 책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때로는 빌려 달라고 말씀드리고는 가져다 놓는 것을 잊기도 했다. 그만큼 그 책이 좋았다. 수사물 시리지를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추리 소설 같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책을 선택하는 성향은 조금 바뀌기도 했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더 좋아했으며, 어쩌면 심심한 그런 이야기들이 주는 위로가 좋았고, 장편보다는 단편소설을 더 좋았다. 그러면서 SF소설이나, 스릴러를 다룬 소설이나 추리소설은 많이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다 정유정 작가님의 ‘7년의 밤’을 읽고는 감탄했었다. ‘아, 내가 이런 심장이 쪼이는 듯한 소설을 좋아했구나’ 그런 마음.
이번 책은 그 어떤 배경지식도 없었지만, 그냥 읽고 싶었다. 북클럽문학동네 웰컴키트 선물로 선택한 책. 막상 책을 펼쳤을 땐, 거부감이 들었다. 45세 교사와 제자의 성관계를 묘사한 장면 때문에. 그런데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몰입감. 이야기를 계속 읽고 싶은 마음. 그리고 그 결말이 궁금하여서.
나중에 책을 다 읽었을 때, 이 책이 27쇄나 인쇄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재미있다. 그리고 반전. 또 반전.
1. 너를 이해하는 건 나뿐이라는 착각
선생님을 이해하는 건 나뿐이에요.
다현은 자주 그렇게 말했다. 준후도 그 말에 동감했다. 자신을 가장 솔직하게 내보일 수 있는 것은 다현뿐이었다. 그 역할은 아내도 해주지 못했다. 그런 다현의 그 말을 ‘우리는 서로를 잘 알아’라고 이해했던 것은 자신 뿐이었다. 자신은 다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170쪽)
“난 당신을 잘 알아요.”
영주가 준후를 따라 벌떡 일어섰다. 준후는 말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다현도 그랬다. 선생님을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안다고 말했다. 왜 ‘안다는 것’에 그렇게들 집착하는 걸까. 자신을 가장 잘 안다던 다현은 알까? 다현의 죽음에 자신이 그렇게 슬프지 않다는 것을. (266쪽)
그를 한창 사랑할 때, 나는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내게만 보여주는 어떤 표정을 읽을 수 있었고, 그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었고, 그가 긍정의 대답을 할 때 하는 말투와 거절할 때 하는 말투의 미묘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보는 세상을 나도 본다고 믿었고, 어쩔 땐 그보다 내가 그를 더 잘 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결혼생활 동안 늘 배신의 연속이었다. 내가 아는 모습의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오빠. 변했어.”라고 말할 때면 그는 늘 말했다.
변하지 않았다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모습만을 본 거라고.
책 속 준후는 사립학교의 선생님이다. 다현은 준후의 학생이었고. 다현은 준후를 사랑하면서 늘 선생님을 이해하는 건 자신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작 다현이 죽었을 때 준후는 다현을 살인한 사람이 궁금하긴 했지만, 다현의 죽음 자체에는 슬퍼하지 않았다. 다현에게 준후는 자신을 편안하게 내보일 수 있었지만, 그것이 준후의 전부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할 땐 그를 가장 잘 안다고 여긴다. 그 또는 나를 잘 안다고 여긴다. 서로의 모습을 가장 잘 보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나 스스로를 잘 모르겠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순간에 스스로의 선택에 의심이 들기도 한다.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데, 사랑한다는 이유를 상대방을 잘 안다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그래서 소설 속 다현의 말, ‘선생님을 이해하는 건 나뿐이에요.’는 다현에게 있어 어쩌면 그러고 싶은, 그럴 거라고 믿고 싶은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신도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의 표현.
2. 분노의 대상
그는 상속 포기를 하지 말라며 협박했다. 지난 팔 년간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발작하듯 다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인생을 뭉개버린 여자의 자식이 편안히 산다는 생각만 해도 화병으로 몸져누울 것 같았다. 그래도 제대로 된 통화는 딱 한 번 뿐이었다고 했다. 수신 차단이 되어 있었던 것은 몰랐던 모양이다. 집으로 찾아간 적은 없다고 했다. (130쪽)
교육학 수업을 들을 때, 귀인이론에 대하여 배운 적이 있다. 그 이후 늘, 무슨 일이 생길 때면 원인을 어디서 찾아야 하나 생각해보곤 했다. 원인을 외부로 돌릴 때, 나의 잘못은 반감되어도 원망의 마음이 생기고, 원인을 내게로 돌릴 때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친다. 하지만 일의 원인이라는 것은 하나에만 있지 않다.
다현의 엄마는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사기를 쳤고, 그 사기에 걸려들어 집안이 망한 사람들은 다현의 엄마가 죽고 나자 다현이에게 전화를 해 원한의 감정을 고스란히 쏟아냈다. 분노의 감정을 드러낼 누군가가 필요했으며, 그래야 자신의 화를 식힐 수 있었기에.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어린 다현이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었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타인으로 인해 나의 삶에 불행이 다가왔을 때. 나는 그 불행의 원인인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자살하고 난 다음, 나는 누구를 미워하지? 분노가 원인이 된 범죄에는 ‘나는 이렇게 힘든데, 그는 잘 살고 있다’라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내가 힘든 만큼 그 또한 힘들어야 한다는 마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미움은 자신을 해칠 때가 더 많다. 그러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진다. 분노의 대상을 향한 나의 감정이 결국 나를 힘들게 하는 이 악순환.
3. 정리
“스릴러는 경고입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했던 대답이다. 스릴러가 나에게 어떤 의미냐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대답한 것은 진심이었다. 스릴러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경고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겪은 어린 시절의 행복이 그 사람을 얼마나 좋은 사람으로 자라게 하는지보다는, 불행한 어린 시절이 사회를 파괴하는 끔찍한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고 경고하는 것이 스릴러 작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번의 경고는 인정욕구였다. (333쪽)
작가 후기를 읽고 소설이 좀 더 잘 이해되었다. 이번의 경고는 인정욕구였다는 말. 소설을 통해 경고하는 것이 스릴러 작가의 역할이라는 말이 참으로 와닿았다.
나에게도 인정욕구가 있다.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 소설 속 다현이 그러하였으며, 영주가 그러하였다. 하지만 지나친 인정욕구는 결국 자신을 파괴시키며,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 이 소설이 말해주고 있다. 마음에도 적절한 경계가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야겠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다른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서로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자신에게 인정욕구가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의 인정욕구인지, 그것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