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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Mar 13. 2023

책들의 시간 25_유령의 마음으로.

# 유령의 마음으로_임선우 소설집_민음사

  소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을 찾는다면 ‘상상의 힘’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SF적인 상상력을 가진 책은 아니다.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이 드는 어떤 요소를 가지고 있는 책. 그 어떤 배경지식도, 작가에 대한 정보도 없이 읽게 된 책이었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만나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감사한 마음도 들고.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책을 읽으면서 이번 책을 통해서는 잃어버린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하나 있었는데, 그걸 책 뒤편에 실려있는 평론가의 말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평론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를 다시 한번 느낀 계기였다. 작가의 말처럼 책 속에서는 불행 가운데에서도, 힘듦과 고난과 무너짐 가운데에서도 ‘환함과 온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을 작가는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진 빚이라 표현하고 있다. 공감이 간다. 나의 모든 순간 가운데 발현되는 아주 작은 따뜻함과 환함은 나를 사랑하는 이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이 소설은 그런 ‘환함과 온기’를 품고 있는 책이다.      


1. 잃어버린 마음에 대하여. 


  기적을 바라지 않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나는 매장을 청소하며 생각했다. 실망이 쌓이면 분노가 되고, 분노는 결국 체념이 되니까.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는 언제부턴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중략] 

  유령은 뭐랄까. 나보다 내 감정에 훨씬 더 충실하게 반응했다. 유령은 내가 슬픔에 잠길 때면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고, 김지원이 와서 기쁠 때면 김지원 옆으로 다가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언젠가 한 번은 손님이 진열된 빵을 손으로 꾹꾹 누른 적이 있었다. 빵을 만지시면 안 된다고 내가 말하자, 그는 버럭 화를 내면서 만지던 빵들을 그대로 두고 나가 버렸다. 유령은 그날 업무 시간 내내 씩씩거리면서 빵집 안을 돌아다녔다. 정신없으니 그만 움직이라고 말하자 유령은 네가 그렇게 담아두기만 하니까 얼굴이 울상인 거야, 하고 쏘아붙였다. (24~25쪽)


  책에 실려 있는 단편 ‘유령의 마음으로’는 이 책의 제목이면서 가장 따뜻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단편을 다 읽었을 때, 나는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으며, 방이 서서히 환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냥 그런 느낌. 소설 한 편으로 그렇게 따뜻해지기는 오랜만인. 

  처음 유령을 만난 주인공은 자신이 죽지 않았음을 한탄했다.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 쑥 빠져나간 느낌에 자신이 죽었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어서 실망한. 그만큼 주인공의 일상은 단조롭지만 체념이 깊어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는 상태였다. 식물인간으로 2년째 누워 있는 남자친구에게 이별도 고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 대한 그 어떤 표현도 하지 않는 주인공. 유령은 주인공에게 ‘나는 너야’라며 주인공과 꼭 닮은 모습에 정확한 마음을 가진 채 다가왔다. 

  유령과 함께하면서, 주인공은 서서히 잃어버린 마음을 회복한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했으며, 남자친구와 함께 있던 그 시간에 무엇을 함께 했으며,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일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된다. 유령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울 수 있게 된 주인공. 그리고는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하고 다시 맞이하는 일상, 유령은 말이 아닌 어떤 따뜻한 기온을 남기고 사라진다. 

  우리는 언제 마음을 잃어버렸을까? 많은 책들이 마음을 정확하게 들여다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숨기는 일상이 반복되고, 그렇게 숨기다 보니 내 진짜 마음을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다. 주인공에게는 기적을 바라지 않은 삶이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삶으로 이어지고, 기대하지 않는 삶은 마음이 없는 삶을 살게 하였다. 책을 다 덮고 나서, 나는 내 마음을 잘 가지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았다. 다행히 아직은 마음이 옆에 꼭 잘 붙어 있는 느낌.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한다는 소소하지만 작은 일상의 기쁨이 있어서라는 평범하지만 소중한 진리의 확인 때문이다. 조금은 위선과 위악이 아닌 솔직한 감정을 지니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2. 나쁜 세계에서 자신마저 나빠지지 않도록 지켜내는 일의 중요성. 


  한때는 내가 나의 자랑이었다. 수많은 아르바이트로 나를 먹여 살려 왔고,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대학도 졸업했으니까. 그러나 지난 2년간 취업에 실패하면서 내 세계는 점점 좁아졌다. 좁아진 땅에 애인과 친구들이 서 있을 자리는 없었다. 나는 제대로 된 인사조차 없이 그들을 떠나보냈다. 안정된 주거가 사라졌고 균형 잡힌 식단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것조차도 보잘것없어져서 나중에는 머리숱과 규칙적인 생리 주기, 주말 아침마다 보던 영화와 응원하던 야구팀이 사라졌다. 

  마지막에는 지원서도 사라졌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지원서 대신에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242쪽)


  이 책 속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이 부분이 환상적인 요소이다.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상상의 힘으로 이루어진 인물들. 하지만 그 인물들이 결국은 우리네 모습임을.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어쩐지 쓸쓸해지면서도 인정하게 되는. 나는 이 쓸쓸함의 근원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지 잘 몰랐는데 평론가의 표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나쁜 세계에서 자신마저 나빠지지 않도록 지켜내는 일. 

  마지막 단편은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이다. 의도하지 않게 떨어지는 간판을 맞고 죽은 사람이 24시간부터 100시간의 유령의 모습으로 유예 시간을 얻게 되었을 때, 그 시간을 커튼콜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커튼콜의 시간마저 빨리 사라지기는 바라던 유령은 다른 유령들을 만나면서 세상과 천천히 이별하는 법을 배운다. 

  젊은이들이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 버린 요즘, 취업은 어렵고, 취업에 실패한 청년들의 세상은 좁아졌으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삶을 선택한 젊은이도 많아진 세태. 꿈과 희망에서 시작된 사라짐은 결국 모든 것을 사라지게 만든다. 이런 나쁜 세계에서 자신마저 나빠지지 않도록 지켜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체념과 포기 말고,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허황된 꿈을 심어주는 것만 같아 마음이 아프다. 마지막 단편은 죽었지만, 끝내 무대에 서고 싶은 유령의 모습을 통해 세상과 이별할 수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는 것. 작은 목표를 성취하는 것. 혹 그런 것들이 나쁜 세상에서 자신마저 나빠지지 않도록 지켜 내는 일은 아닐까? 결국 마음을 지키는 것.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에 ‘무릇 지킬만한 것들 중에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라는 구절이 있다. 결국 마음을 지키는 일이 이토록 중요한 일임을.      


3. 정리.      


  참 좋은 책이다. 첫 번째 단편을 읽고는 기분이 좋아졌으며, 중간중간의 단편들로 인해 환상을 맛보았고, 살아내는 일의 쓸쓸함을 인지했으며, 마지막 단편을 읽고는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는 삶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다행이다. 내가 아직 소설을 읽을 수 있어서. 소설 속 ‘상상의 힘’에 기대어 지금의 시간들을 잘 보낼 수 있어서. 그 어떤 쓸쓸한 거리를 헤매는 누군가도 책으로 인해 다시 한 발을 내딛을 수 있기를 바라는 아침이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나에게 혹시 잃어버린 마음이 있다면, 어떤 마음인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나에게 죽음 이후 이별할 수 있는 유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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