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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May 22. 2023

책들의 시간 35_스토너, 존 윌리엄스 장편소설

# 스토너_존 윌리엄스 장편소설_김승욱 옮김_RHK


  몇 년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다. 그런데 잘 기회다 닿지 않다가 이제야 읽게 되었다. 진작에 읽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아쉬움이 든 책.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었다. 물론 책을 읽을 시간이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 전에 누워 책을 펼쳐 들면, 잠들기가 아까웠던 책. 이런 책을 만나면 나는 늘 갈등에 빠진다. 빨리 읽고 싶어 안달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읽을 분량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아쉬움. 그래서 아껴 읽고 싶은 마음. 

  책을 읽으면서, 책의 표지에 설명되어 있던 구절 ‘조용하고 절망적인 생애에 관한 소박한 이야기’처럼 이 소설을 잘 설명한 구절이 있을까 생각하였다. 조용하고 절망적인 생애를 산 스토너의 모습이 어떤 순간의 나처럼 느껴진 것은 우리 모두의 삶이 비슷하기 때문일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겉으로 화려하고 아무런 문제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제각기의 불행을 품고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 삶의 불행과 그 불행을 감내한 인내와 그리고 작지만 행복한 순간이 삶을 만들어가는 것임을. 그래서 그 삶을 그냥 살아낼 수밖에 없음을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 생각했다.    

  

1. 불행한 결혼 생활


  이디스는 마치 정복해야 할 적을 대하듯이 아파트로 들어왔다. 

육체적인 노동에 익숙하지 않을 데도 그녀는 바닥과 벽의 물감 얼룩을 대부분 긁어내고, 때로 박박 닦아냈다. 그녀가 보기에는 사방에서 때가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손에는 물집이 잡히고, 표정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으며, 눈 밑에는 거뭇거뭇한 그림자가 생겼다. 스토너가 도와주려고 하자 그녀는 입술을 꼭 다물고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는 공부할 시간이 필요하며, 청소는 자신의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가 억지로 청소를 돕자 그녀는 굴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거의 뚱한 표정을 지었다.(106쪽)     


 한 달도 안 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그는 침묵을 배웠으며,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가 애정을 담아 그녀에게 망를 걸거나 몸을 만지면, 그녀는 그를 외면하고 내면으로 숨어 들어가 아무 말 없이 견디기만 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동안 전보다 한층 더 힘들게 새로운 한계까지 자신을 혹사했다.(107쪽)     


윌리엄은 서둘러 퇴근해서 돌아온 뒤 오후와 저녁에 집을 청소하고, 설거지를 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이디스의 식사는 쟁반에 담아 방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식사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저녁식사 후에 그와 함께 연한 차를 마시는 시간에는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녁에 잠깐 동안 두 사람은 조용히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 친구나 이미 감정이 소진된 원수들처럼.(123쪽)


  스토너는 이디스와 결혼 후 한 달도 안 되어 결혼이 실패작임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것도 맞지 않는 두 부부의 이야기. 자신을 도와주는 스토너의 모습에 굴욕감을 느끼는 이디스와 결혼 후 침묵을 배우고 사랑을 고집하지 않게 된 스토너, 그리고 아주 잠깐의 오랜 친구나 감정이 소진된 사람들이 나눌 법한 편안한 대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너와 이디스는 아이를 낳고 결혼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 

  스토너는 나중에 대학에서 같이 일을 하는 어린 캐서린을 만나 연애를 한다. 이디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스토너를 비웃기도 하지만 그런 시간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 관념에 따른 스토너의 ‘불륜’이 진행되면서 스토너 부부의 관계는 애정과 흡사한 호의를 갖춘 사이로 변화되게 된다. 스토너가 학교에서의 일 때문에 캐서린과 결국 헤어지게 되었을 때, 이디스는 실컷 스토너를 비웃어 준다. 스토너가 불쌍했다. 

  사실 나는 아직 사랑을 잘 모른다. 결혼을 하고 살아가면서, 의리의 감정은 생겼지만, 내가 처음 가졌던 감정이 사랑인가에 대한 의심도 함께 생겼다. 그래서 예전엔 ‘사랑해’라고 말했다면, 요즘은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을 하게 된다. 사랑이 변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그래, 그럴 수 있어.’라고 관대하게 말할 수 있다. 사랑이 나에게는 책임감이라 기대했던 사랑의 모습이 아니어도 괜찮다. 

  아침에 산책을 할 때면, 두 부부가 산책길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참 부럽기도 하다. 저렇게 취미가 비슷하면, 저렇게 뭔가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참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규칙적인 나와 자유로운 영혼의 남편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싸운 적이 없다. 그걸 맞추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싸우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이 소진된 원수처럼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각자의 삶을 살아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그냥 동거인 같기도 하다.      


2. 그럼에도 견디는 삶, 일. 


“장기적으로 내다봤을 때, 날 이 자리에 붙들어둔 것은 이디스도 아니고 심지어 그레이스도 아니오. 반드시 그레이스를 잃을 것이라는 사실도 아니지. 당신이나 내가 상처를 입을 것이라는 생각이나 추문 때문도 아니오. 우리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라는 사실 때문도 아니고, 어쩌면 사랑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도 아니오. 그저 우리 자신이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 우리의 일이 망가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303쪽)      


  하지만 윌리엄 스토너는 젊은 동료들이 잘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 기억 밑에 고생과 굶주림과 인내와 고통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그가 분빌에서 농사를 지으며 보낸 어린 시절을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지만, 무명의 존재로서 근면하고 금욕적으로 살다 간 선조들에게서 혈연을 통해 물려받은 것에 대한 지식이 항상 의식 근처에 머무르고 있었다. 선조들은 자신을 억압하는 세상을 향해 무표정하고 단단하고 황량한 얼굴을 보여주자는 공통의 기준을 갖고 있었다. (중략) 그가 대학의 종신교수로서 누리고 있는 보잘것없는 안정감이 어떻게든 사라지는 일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인식한 이런 일들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들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 깊숙이 숨겨져 있어서 남들은 보지 못하는 부분에서 그를 변화시켰다. 모두가 함께 겪고 있는 곤궁한 생활에 대한 조용한 슬픔이 그가 살아가는 매 순간 한 번도 깊숙이 파묻혀버리지 않았다. (310쪽)


  스토너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토너가 아버지에게 자신이 정말 대학에 가기를 원하냐고 물었을 때, 스토너의 아버지는 농사를 짓는 새로운 방법들을 배우기를 바란다며 스토너를 대학에 보낸다. 스토너가 대학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 그 건물에 압도되어 자신이 이곳에 속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스토너는 농과대학생이었지만 아처슬론 교수의 영문학개론 수업을 듣고는 스토너의 삶을 변한다. 

   슬론 교수가 수업 시간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읊었을 때 숨을 쉬지 않고 들었던 스토너, 그리고 눈을 들어 창밖에서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았을 때, 스토너의 몸속에 섬세하면서도 불안하게 흐르는 피의 느낌. 스토너는 영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그 순간에 대한 느낌으로 어렵게 계속 영문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을 부모님에게 말하고, 그 이후 스토너는 영문학교수로 살아가게 된다. 스토너에게 있어 영문학은 농사를 짓던 부모의 삶을 벗어난 완전한 자신만의 관심과 선택이었다. 그리고 스토너는 그 일을 사랑했다. 

  자신에게 사랑의 정의를 새로 내리게 만들어 주었던 캐서린과의 이별에서도 스토너는 사람들의 추문과 아내와 딸에 대한 생각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파괴될 것이라는 생각, 자신의 일이 망가질 것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전쟁이 벌어졌던 순간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할 때에도 스토너는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다른 교수의 무리한 부탁에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 학생을 평가하였고, 보복성 수업시간표에도 자신이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친 교수였다. 스토너의 가슴 깊숙이 남아있는 ‘곤궁한 생활에 대한 조용한 슬픔’이 스토너를 살아가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불행한 결혼 생활이 캐서린과의 불륜으로 인해 버틸 수 있었음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충분히 공감이 갔었지만 그것보다 더 공감이 되었던 부분은 일을 대하는 스토너의 태도였다. 스토너의 영문학 교수로서의 성실한 삶이 나는 그의 불행을 막아주었던 최소한의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일이,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그 일이, 그렇게 삶을 지속시켜 주는 힘이 된다.      


3. 정리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지만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鄕愁)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274쪽)


  내 결혼 생활이 지극히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렇다고 이건 최상의 결혼 생활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결혼을 통해 책임감을 배워가면서 사랑의 정의는 끊임없이 달라졌다. 순간순간 누리는 작은 행복감이 사랑이었던 적도 있었으며, 가족의 탄생과 아이의 성취감으로 인해 맛보는 기쁨이 사랑이었던 적도 있었다. 스토너의 마음처럼 이제는 사랑이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나도 조금씩 깨닫는다. 그 가운데 내가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나는 나의 결혼 생활 가운데 나라는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임을 믿는다. 그래서 일을 하는 것이 좋다. 

  책을 읽는 내내, ‘절망적인 생애에 관한 소박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것이 결국 우리네 인생이라는 생각, 그래서 때로는 행복도 불행도 적당히 숨기며 살아간다는 것, 굳이 드러내면서 살지 않는다는 것. 그런 생각.


      

[이야기 나눠 보기]

1) 자신만의 사랑의 정의로 결혼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현재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여긴다면, 그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하려 노력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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