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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라헬 Jul 20. 2023

교만의 흔적(칼자국)

(나의 뉴욕이야기 2)

     코로나 덕분에 하루 종일 집에 머무는 시간이 이젠 아무러치도 않다. 유난히 눈 오는 날이 많아서 일까, 익숙해져가는 일상 속 에서 새록새록 소환되는 옛 기억은 기쁨이고 감사다.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지금, 그 추억들은 넘치도록 나를 흥분하게 한다. 그것이 더없는 기쁨이었든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의 아픔이었든. 나는 지금, 그 추억을 들추며 꿈을 기록하고 있는 중이니까. 도마에 칼자국을 무수히 내며 보냈던 수십여 년의 뉴욕 생활. 그 시간 속엔 내 청춘과 꿈이 고스란히 스며져있다. 칼자국은 도마뿐만 아니라, 손바닥 손등 그리고 가슴속 여기저기 많은 흔적으로 남아있다. 마치 훈장처럼 기쁨과 함께 아픔이라는 이름으로. 삼십여 년이 더 지난 지금도, 날 궂은 날이면 꿰맨 자리와 심장에는 스물 스물 가려움과 먹먹함이 동시에 올라온다. 그런 세월을 어찌 지내왔을까 생각하니 끔찍함과 대견함이 함께 자리한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칼과 도마를 진정 사랑할 숙명인가보다. 왜냐하면 그것에서 뿜어내는 다양한 언어와 기억들은 나를 성숙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꿈꾸며 살아갈 나의 앞날의 기록들은 거의 그것들로부터 시작 될 테니까. 그렇기에 나를 키운 팔 할은 칼과 도마라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1980년대 중반, 나의 첫 직업은 뉴욕 브롱스의 유명한 Deli주방일이다. 그곳은 하루 손님의 수가 2천명이나 되는 곳이었다. 초보자는 무조건 설거지와 양파를 까는 일이 주어진다. 수백 개의 크고 작은 그릇을 닦고 200Kg의 양파와 새우 5상자를 혼자 까야만 했다. 매운 양파를 까면서 핑계 낌에 서러움도 눈물과 함께 떨 군다. 새우 가시에 수없이 찔리는 아픔도 기꺼이 감수 해야만 했던 그날들. 꺼이꺼이 서러움을 목구멍으로 넘기다가 드디어 터트리는 내 울음소리에 주방에서 일하는 10명의 여인들도 같이 울었던 여러 해. 그동안 내 손바닥은 아들의 얼굴도, 내 얼굴 조차만질 수 없는 상처투성이의 마른나무 껍데기가 되어 있었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고 해야 할까, 6개월 만에 썰기의 달인이 되어버린 나. 주인은 내 작업대를 손님이 볼 수 있는 오픈된 주방의 중앙에 만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상술이며 이벤트였다. 내손에서 잘려지는 야채들의 장면을 보려고 일부러 아침에 오는 사람들도 있을 만큼 나의 칼솜씨는 유명했다. 손님들은 리듬에 맞추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썰어지는 각종 야채들을 입을 벌리고 본다. 환성을 지르며 홀린 듯이. 생각해보면, 그들은 흥이 아주 많은 인종이다.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도마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도 했으니까. 그 시절 수없이 잘려진 야채와 과일들은 내 꿈을 이루는 밑거름이 되었다. 5년간의 주방생활을 끝내고 드디어 내 가게를 마련해서 그곳을 나오는 날, ‘아오지 탄광(가게 별명)아, 고맙다.’라며 속삭이듯 안녕을 했다.


   누구든 실수를 두려워하며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실수를 계속하며 산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기에. 다만, 사람이니까 하는 실수를 사람이기에 안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리라. 돌이켜보면 나의실수는 늘 교만과 조급함이 함께했다. 그 까짓 거라며 우습고 가볍게 여겼다. 그것이야 말로 대단한 착각이었던 것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더구나 수없이 당했던 칼과 도마 위에서의 상처조차 잊어버린 체, 도마 앞에서 나는 너무나 당당하고 교만했다. 이까짓 칼질쯤이야 라면서. 예상외로 잘된 롱아일랜드의 Deli&Salad Bar는 나를 의기양양 하게했다. 샌드위치와 음식 만드는 것은 재미있고 신기했다. 손님들과 가족처럼 지내던 나는, 개업 오 개월 만에 유명인사가 되어있었다. 손님의 이름을 불러주는 동양여자가 의외로 신선했던 모양이다. 거의 매일 같은 시간대에 오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 그래서인지 삼십대 후반의 나를 그들은 마미라고 부르며 우리가게의 손님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우연히 손님의 생일이라도 알게 되는 날은 쿠키나 음료수로 축하했다. 또는 입학 졸업 결혼 입원 등의 소식을 듣게 되면, 예쁜 봉투에 성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 33년의 세월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내 젊은 날의 역사이며 삶이었으니. 


   바쁜 점심시간, 세 명의 종업원과 나는 주문 들어온 수십 개의 샌드위치를 손 빠르게 만든다. 나는 짬짬이 뒤돌아보며 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눈도 맞추고 농담도 한다. 줄서서 기다리는 손님들도, 만드는 우리도 즐겁다. 행복하다. 내가 만든 것은 뭐든지 맛있다며 엄지 척을 보내는 그들이 더없이 사랑스럽다. 아마 돈과 연결되기에 더욱 사랑스러웠을지도. 매 순간 교만이 꿈 툴 댄다, 나야 나! 라며.  점심시간, 샌드위치를 만들려고 Bagle을 자르는데 누군가가 “Hi Mame!'하며 인사를 한다. 잠깐 목을 뒤로 돌리며 웃는 순간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왼쪽 손에 느껴졌다. 작업대는 이미 피투성이였고 아픔조차 못 느낄 정도로 멍했다. 내게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들 정도로. 느껴지는 아픔은 전혀 없었고 대신 흘린 피가 나를 놀라게 했다. 타월로 손을 감고 놀랜 손님들을 진정시키고 병원으로 간다. 피는 여전히 흐르는데 그것보다 ‘점심시간인데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더 컸다. 어떻게 운전을 했는지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이다. 단골손님인 의사와 간호원 들 덕분에 재빠른 치료를 받았다. 무려 30바늘이 넘게 꿰메임 을 당하고 돌아오면서 그때 알았다. 거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실수는 성급함과 교만 때문이라는 것을.  


나를 키운 칼과도마
롤 샌드위치와 베이글 샌드위치

  이년으로 정했던 모국에서의 시간이 코로나로 묶여 벌써 삼 년째다. 나름, 열심히 계획하고 준비했다고는 했지만 성급했었다는 결론이다. 더구나 ‘내겐 쉼이 필요해’라는 그럴듯한 변명은 모국에 오기위한 핑계와 이유였으니. 그런데 그 그럴듯한 변명이 교만이었음이 점점 확실해 지는 요즈음이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다. 후회라는 말은 하기 싫다. 왜냐하면 후회를 인정해버리면 너무 초라해질 것 같으니까.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펼쳐질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실수는 하지 말아야 한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이라도 신중하게 생각하리라. 또한 치솟는 교만도, 급한 성격도 다독이며 참을성을 키워야 할 테다. 과거는 어제의 일이라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살아보지 않았으니 그 또한 가늠키 힘들다. 그러니 지금 잘 살아야 한단다. 잘 산다는 것, 머리로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허나 내 가슴은 밴댕이 소갈딱지만 해서 감당하기가 힘든데 어쩌면 좋을까. 그러나 확실한 한 가지. 더 이상의 실수는 사절이다. 오늘도 추억을 기록하면서 교만의 흔적인 그때 꿰맨 상처들을 가만히  문질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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