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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라헬 May 27. 2024

섹시한 봄

(죽을때까지 섹시하게)

  

                                                                                                                                       

   어쩌자고 겨울은 꽁무니를 길게 빼고 ‘나 살려’ 하면서 줄행랑치는 걸까. 또, 봄은 왜 이렇게 온 천지간을 소리 없이 흔들며 오겠다고 난리법석인지. 천천히 가고 느리게 왔으면 내 마음이 더없이 기쁘련만. 시간을, 세월을 묶을 수 있는 끈이 있는 곳 아시는 분 어디계신가요?


   겨울답지 않게 한낮의 빛이 곱고 따듯한 어느 날 친구와 남한강에 갔다. 강(江)이 서성거리는 우리를 그곳으로 유혹했음이 분명하다. 여전히 산 아래 꽁꽁 언 강은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입춘이 지난 지 오래건만 그곳은 여전히 얼어붙어 고요하다, 한낮의 온도가 영상임에 불구하고. 동행한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아~하고 신음소리가 나도 모르게 입술사이로 흐른다. 꽁꽁 언 강위에 차갑고 하얀 햇살 머문 곳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기에. 

   얼어붙은 강과 그렇지 않은 강은 사뭇 다르다는 친구의 말에 나는 한참 지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지배한 아니, 심하게 파헤쳐진 뒤로 한강은 얼고 싶어도 얼 수 없단다. 그 옛날 한강이 가지고 있던 건강한 힘을 다시는 볼 수 없음에 안타까움도 토로했다. 살아있는 강만이 언다는 설명을 보태면서. 얼어붙지 않는 강은 더 이상 살아있는 강이 아니라며 씁쓸해 하는 친구의 얼굴에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읽는다 . 


   때문에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을 때 친구는 꽁꽁 언 남한강이나 북한강에 간다고 했다. 강물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완전히 얼어붙어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이 가진 위대함을 느낀다고도 했다. 얼어붙은 강은 속까지 시원하게 해준다는 친구의 말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어려웠다. 그런 내가 답답해서인지 인간의 자연파괴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열심히 한다. 그렇지만 들으면서도 이해하기까진 한참의 시간이 걸렸으니. 

   강을 따라 산책하는데 얼어붙은 강이 끙끙대며 소리를 낸다. 강물이 통째로 얼어붙는 통증 때문에 몸살 앓는 소리란다. 찌이잉, 우우웅 각각 다른 소리를 내며 강이 운다. 얼음이 얼면서, 또는 풀리면서 그 아픔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나는 소리다. 그렇게 생각하며 들어서인지 내 가슴도 덩달아 쿵하며 비명에 가까운 슬픈 곡소리를 낸다. 육십 평생 처음 들어보는 강이 우는소리 탓에 지금까지도 속이 애(哀)리다. 여전히 살아있어서 사정없이 꽁꽁 얼어붙은 강의 끙끙 앓는 소리를 다시 들을 요량으로 내년을 기약해 본다. 나는 그렇게 남한강에서 겨울을 보낼 준비를 했다.


   한적한 어느 날 오후, 동네를 걷는데 달달한 햇빛이 콧등을 ‘툭’ 친다. 그리고는 이내 달콤함이 콧속으로 스민다. 봄 냄새임을 알아차린 나는 ‘안녕, 봄아’라며 반색을 한다. 허나, 일 년에 한번 오는 봄이건만 올해는 그리 반갑지 않은 변덕이 인다. 이유는 나의 남은 시간을 가늠키 어렵기 때문 일 테다. 시간이 빠르고 세월이 덧없음을 뼛속까지 느끼는 요즈음. 계절의 오고 감의 감정도 예전 같지 않음에 또 하나의 슬픔을 가슴에 안는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감성이 무딘 여인이 되어버렸을까’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년 전에 쓴 글 ‘봄밤’ 위에 눈을 얹는다. 그때의 봄을 왜 지금은 못 느끼는 걸까. 봄에는 봄처럼 생각하면 좋으련만 왠 사설이, 핑계가 이리 많은지 모를 일이다. 곧 봄이니까, 아니, 벌써 봄이니까 보는 것, 마음으로 느끼는 것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할 텐데. 이내 떠나갈 봄이 아쉬워 가슴 아픈 후회를 반복하는 일은 없어야 하건만.


   친구가 꽁꽁 언 남한강에서 살아 있음을 느꼈다면, 나는 연두에서 초록으로 그리고 이름 모를 앉은뱅이 들꽃들과 수양버들의 움트는 가지에서 살아 있음을 느껴봄은 어떨까. 애정(愛情) 하는 초봄의 은은한 파스텔 빛깔로 내게 오는 봄을. 가슴을 설레게 하는 그 풋풋하고 달달한 봄의 향기는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고도 남을 테니까.


   얼마 전 ‘죽을 때까지 섹시하기’라는 책을 읽었다. 내게는 안성맞춤인 내용이다. 집에 있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는 요즈음. 혼자니까, 누가 보나 뭐, 귀찮아서, 그래서 꾀죄죄하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라면에 식은 밥 한 덩이를 말아 먹으면서 시간만 죽이는 내게는 꽤나 충격적인 글이었다. 고백하지만, 원초적인 제목에 살짝 끌려서 읽은 책이었으니까.

   섹시하다는 진정한 의미를 가슴에 새기게 해주었던 글을 읽은 후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살기로 마음을 정했다. 흐르고 있는 나의 시간 속에서 유일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섹시하게 사는 것뿐임을 확신하며 또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중이다. ‘섹시’를 ‘부지런함‘과 ’인간다움‘의 의미로 각인 시켜 준 그 책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가는 겨울과 오는 봄을 나다운 섹시함으로 보내고 맞을 테다. 핑크빛 립스틱을 바르고 아이보리색 코트를 곱게 차려입고서. 겨울에게는 ‘아프지 말고 내년에 또 보자’ 라며 손을 크게 흔들어 주어야지. 또한 봄에게는 ‘어서와, 올해도 너를 볼 수 있어서 기뻐’라며 따듯한 가슴으로 꼭 안아줄 테다.

   가고 오는 시간을 어찌 인력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면서 죽을 때까지 섹시하게 사는 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할 테다. 휘리릭 아름다운 문장과 낱말이 스칠 때, 즉시 감정이, 감성이, 감각이 흩어지기 전에 메모를 한다. 그리고는 자판을 두드린다. 그 시각이 언제인지는 큰 문제가 안 된다. 그때가 내가 제일 섹시 할 때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니까. 

   지금도 천지에 맴도는 문장을 잡기위해 7080노래를, 책을, 그리고 드라마를 본다. 정성으로 요리를 할 때, 그리고 문장수집가임을  자처해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문장을 잡는 내 모습. 그때가 가장 섹시한 모습이고, 지금도 흐르고 있는 시간 속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나다운 모습일 테니까.


   천지간에 봄이 온다고 소문이 파다하다. 양지마을을 휘젓는 바람 끝은 아직 차갑다. 그럼에도 농부들은 일치감치 토마토 묘목을 심고 밭을 갈아엎으며 각종 씨앗을 뿌린다. 나와 같이 그들도 그들만의 봄을 맞을 채비에 분주하다. 이 또한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들이 섹시하게 사는 모습일 테다.                                                                     


   *양지마을: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 있는 서울의 마지막 전원마을

             귀향 후 글쓴이가 몸담고 있는 고향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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