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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 라헬 Aug 30. 2024

팔월단상

(윳십팔세 팔월의 라헬)

팔월단상 

강 라헬               

   우두두, 우두두두 비가 말하는 것처럼 소리를 낸다. 본격적인 장마가 무엇인지 증명이나 하려는 듯 매일 비가 쏟아진다. 굵은 빗줄기는 사납게 일직선으로 땅을 헤집는다. 그 기세가 대단하다. 젊었을 때 나의 무모했던 패기처럼. 오십여 일을 넘기고 있는 긴 장마는 폭염과 함께 매일매일 계속되어 벌써 팔월 중순이다. 한동안 세차게 내리던 비가 잠시 멈추었다. 말간 하늘이 얼굴을 내밀고 그 사이로 새소리가 날아든다. 순간, 비 오는 날에도 새들은 노래하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내게 노래로 들렸던 소리는 그들에겐 생존을 위함 이였음에 고개가 숙여진다. 거실 창에 기대어 바깥을 내다본다. 창밖, 감나무와 소나무의 어울림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눈앞에  펼쳐져있다. 그리고 그곳엔 아직 오케스트라의 협연 같은 빗소리가 스며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 들의 몸짓을 듣는다. 소란하면서도 고요한.


   문득 주변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스스로 놀란다. 장마와 무릎 통증으로 이어진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만약’이라는 설정을 해놓고 생각해 보니 잠시 잠깐 서러움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언제일지 모를 그날을 위해 움직일 수 있을 때 정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등을 토닥인다. 시술로 조금 나아진 듯도, 견딜만한 듯했던 통증이었다. 그러나 밤낮으로 퍼 붓는 장맛비와 무릎의 통증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나의 기를 죽인다. 어느 한밤 새벽 통증이 악을 쓸 땐 벽에 머리를 대고 “살이 떨리게 아파”라고 힘없는 소리로 아픔을 알린다. 몇 날 며칠 하늘도 나도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던 어느 날 새벽, 옷 정리를 시작했다. 간단히 챙겨왔다고 생각했던 옷들이 옷장 속에 그득하다. 걸려있고 쌓여있는 옷들을 보니 나의 욕심과 근심을 보는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옷을 하나씩 꺼내서 입어 보았다. 입고 벗느라 땀도 나고 통증도 심했지만 그것은 꼭 필요한 순서였다. 입을 만하다고 느꼈던 옷들은 입자마자 못 입을 옷이 되어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니까. 그 옷들은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옷들도 있었고 특별히 아끼던 옷들도 여러 벌이  있었다. 그리고 그냥 이유 없이 옷장 속에 기약 없이 걸려 있는 것도 있었다. 옷걸이에서 옷을 벗겨 방바닥에 쌓았다. 훨씬 넉넉해진 옷장을 보니 허전했지만 홀가분했다. 마치 내가 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했으니까. 그런데 왜 서운할까. 나는 그대로인데 옷들이 나를 배반한 것 같은 느낌은 뭘까? 쌓아 놓은 옷 위에 주저앉아 생각에 잠긴다. 그렇게 나는 옷더미 위에서 밤을 보내며 쉼 없는 빗소리와 무릎통증과 함께 아침을 맞는다

                                                      (정리를 했음에도 요 모양)


 아침 9시가 지났는데 아직 빗줄기는 세차게 소리를 낸다. 가라앉은 내 마음에게 행복한 음악을 선물하면서 늦은 아침을 준비한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예쁜 접시에 적당히 자른 과일 위에 들깨를 뿌린다. 구운 달걀도 곁들여. 오늘따라 코끝에 와 닿는 커피 향이 무척 달콤하다. 문득 며칠 전 엄마 생일이라고 꽃과 케익을 보내온 아들들을 생각 하니 행복하다. 이런 소소함이 지금의 나에겐 더 없는 행복이며 삶의 이유라고 한다면 혹자는 비웃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의치 않으련다. 나는 나니까. 매일 똑같은 문자를 보낸다. ‘수고 했어 오늘도, 감사함으로 잘 자거라. 사랑해, 내 보물들’ 나의 아침은 그네들에겐 밤이니까.



                                              (아침 치고는 양이 너무 많다~ㅎ)


   남편과의 갈등 때문에 아들들에게 늘 죄지은 것 같고 빗진 것 같은 마음으로 살아왔다. 지금도 그 느낌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가 속상하다. 내 꿈은 신데렐라지 원더우먼은 아니었다. 그러나 원더우먼이길 자초한 나는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아들들을 최고로 만들려고 무던 애를 썼다. 그것만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을 테니까. 오르막길만 올라가는 힘든 삶을 사는 중, 가끔은 내리막길도 가고 싶었었다. 그러나 힘든 오르막길에서도 손 흔들어 주는 그들이 있어서 한 발짝씩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명석하면서 착하기까지 한 그들에게서 신앙심과 결혼생활의 환멸을 준 나. 나는 영원히 그들에게 죄인인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럼에도 작은 일에 섭섭해하고 징징대는 나를, 나는 못 견뎌 했고 화가 났다. 이런저런 귀향의 몇 가지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은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져 있고자 내린 일종의 처방임을 고백한다. 혼자 설 수 있는 훈련이 필요했으니까.


   내 삶 중 처음으로 순전히 나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지금, 그러나 후회는 어떤 형태로든 내 곁에 스며있다. 여든이 넘어서도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삶을 살 자격이 있다는 말이 있다. 난 아직 일흔도 안됐으니 새로운 꿈을 꾸어 보련다. 노동으로 늙어 버린 몸이지만 운동으로 세포를 깨울 것이다. 더하여 매일 아침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 후리지아를 한 아름 받는 꿈도, 글을 쓸 때 살아서 꿈 툴 대는 나를 발견하는 즐거움까지 만끽하리라. 

   육십팔 세의 팔월, 오늘 나는 제일 행복하다. 내 삶에 당당하지도 떳떳하지도 못했던 나. 때문에 늘 웅크린 모습으로 아들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던 나였으니. 해서, 일 년 후 팔월엔 어떤 단상을 쓸는지 궁금하다. 가슴에 항상 무거움으로 자리하고 있는 아들들에 대한 죄책감의 색깔이 일 년 후엔 많이 옅어져서 오늘보다 밝고 행복한 단상을 쓰길 기대해 보는 것은 어떨는지. 


   지금 내가 머물며 행복해하는 고향에서 시간의 속도는, 딱 내가 감당할 수 있을 속도로만 흐르고 있음에 감사한다. 나의 남은 세상 중, 가장 젊은 육십팔 세 팔월 중심에 나는 있고 더불어 나는 행복하고 감사하다. 비록 어제도 오늘도 실패했더라도 아직 실패하지 않은 내일이 있음이 이 얼마나 다행인가. 또한 모든 것이 풍성한 팔월에 내가 태어났음도 행복일 테다. 


     

                                              (3년전 맨하탄, 아들 레스토랑에서 받은 생일케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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