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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강

(라헬의 애물단지와 오월)

by 강 라헬


오월 둘째 주 일요일은 내가 좋아하는 Mother's Day다. 미국에서 생활한 삽십 여 년 동안 그날은 같은 식당, 같은 좌석에서 나의 보물들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유명한 식당임에도 불구하고, 아들들의 배려로 우리의 지정석인 창가에 앉아 행복한 저녁시간을 보냈다. 때문에 5월 이오면 스며드는 추억으로 먹먹함을 감추지 못하는 마음이 어린 엄마다. 그런데 한국에 온지 5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날이 가까워오면 내 속의 그것은 외롭다며 투정이 만만치 않다. 이젠 지칠 때도 됐으련만.


지금도 널뛰듯이 요동치는 그것. 철이 덜 들어서 일까, 아니면 가엽게 여겨달라는 몸부림 일까. 같은 몸 안에 있는 것 임에도 나와 다른 또 하나의 나. 애써 모른 척 하지만 여전히 뾰족한 그것은 까칠하다. 시시때때로 나를 못살게 구는 정체모를 그것을 무어라 표현해야할지.

이런저런 이유로 올해는 상황이 더욱 좋지 않다. 덧없는 시간이 흐른다는 자책감과 지루함이 지금의 나를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유난스런 그것의 맹활약은 이름 지어진 날들마다 더 나를 힘들게 한다. “ 제발 쫌 그만하자.”고 야단도 친다. 이제 그만 잦아 질 때도 됐으련만, 여전히 날을 세우며 기회만 엿보는 내 안에 있는 그것. 감추고 싶고, 얄밉기도 하지만 가끔 애틋한 마음을 출렁거리게 하는 그것. 나는 그것을 ’애물단지‘라 명명하기로 했다.


내 마음 같지 않은 그 까칠함을 향해 원망과 애원을 한다. 그러지 말라고, 제발 나를 내버려두라고. 두 마음이 몇 날 며칠을 부등 켜 안고 씨름을 한다. 그러니 잠을 제대로 잣겠는가. 어느 날 아침 거울을 보니 얼굴이 가관이다. 눈 밑의 다크서클과 눈 안쪽으로 몰린 양쪽 눈동자는 볼 성 사나웠으니. 눈동자가 제자리로 돌아오려면 눈 운동과 냉찜질이 필수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예전 같지 않다. 괴이한 내 모양이 고소한지 애물단지가 슬쩍 말을 걸어온다. “괜찮니?” 괜찮다고 쏴 부치지만 어쩐지 소리에 기운이 없다.


뜬금없이 흰죽생각이 났다. 사팔뜨기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 옛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사시가 된 나는 동네아이들한테 놀림을 받는 일은 예사였다. 헝클어진 머리와 눈물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집에 들어오는 일이 빈번했으니까. 몸이 유난히 약했던 나는 그런 날은 몸 져 누었다. 그때마다 배탈이 난 것도 아닌데 엄마는 꼭 흰죽을 끓여 먹이셨다. 흰죽을 먹이신 엄마의 심중을 알게 된 것은 결혼한 후다. 분하고 억울한 심정으로 밥을 먹으면 그나마도 몸 약한 자식이 체할까봐 염려스러웠다는 것이다. 엄마의 마음도 모르고 흰쌀을 참기름에 달달 볶아 끓인 흰죽에 간장과 깨소금이 고명으로 올려 진 죽을 이불 속에서 몇 그릇씩 먹었다. 어쩌면 엄마의 관심과 죽을 먹고 싶어서 매일매일 울고 들어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쪽으로 몰린 눈동자를 풀기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해본다. 그렇지만 몰려있는 야속한 눈동자는 여전하다. 외출을 해야 하기에[ 마음이 바쁘다. 유난히 눈동자가 몰린 날 엄마는 꼭 흰죽을 먹였다는 생각이 불현 듯 났다. 흰죽을 끓여야겠다는 생각은 곧 실천으로 옮겨진다. 비상식품인 햇반으로.


비가 소리 없이 내린다, 며칠 전의 날씨가 무색하게. 잊혀졌던 산들바람과 함께 어제부터 하염없이 내린다. 비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비는 더워지기 전의 호사를 베푸는 오월의 넓은 배려일지도 모를 일이다. 올 초부터 시작된 심하게 앓는 간절기의 병 치례는 꼭 가을에만 앓는 병이 아님을 확실히 알려줬다. 오월 첫 주부터 간간히 내리기 시작한 비 때문일까. 넓고 깊은 생각을 하게 되는 오월의 비는 반갑고도 다정하다. 이 또한 내가 모르는 나를 생각하는 시간 일 테니 얼마나 감사한지.


‘애물단지’ 얄밉지만 버릴 수 없는 애처로운 내 마음속 미운 오리 새끼. 내 속에 존재하는 두 마음 중 하나. 팔삭둥이로 태어났는지 그는 언제 어디서나 삐죽 댄다. 낄 데 안 낄 데도 모르고 언제나 뾰족이 낯을 내밀고 나를 당황하게 하기 예사니까. 뻔뻔하다는 표현이 하나도 무색하지 않은 ‘애물단지’를 나는 어찌해야 할는지. 오늘처럼 비가 내려서 세상이 모두 낮아지는 날, 그는 더 보채며 울부짖는다. 이게 뭐냐고 어쩌다 이 모양이 됐냐고 ‘용용 죽겠지’하며 약을 올린다. 그리고는 무안한지 또 묻는다. “괜찮니?” 괜찮다고 소리를 지르고는 우산을 쓰고 나간다.

그를 버려두고 도망가는 거다. 집 근처 오월의 강을 만나기 위해. 속이 다 시원하고 날아갈 것만 같다. 그러나 그는 비아냥대며 “십리도 못가서 발병날걸” 라며 빈정댄다. 어쩌겠는가, 힘들지만 짊어져야할 내 업보라면 함께 가보는 수밖에. 덤덤하고 선 하기만한 삶이 무슨 재미일까. 가끔 내게 송곳으로 찌르는 아픔도 주고 낭떠러지에 서서 뛰어내리고 싶을 때 살고 싶어지는 뼈아픈 한마디도 해주는 그를 그대로 내 가슴에 두기로 했다.


‘속박 속에서 일이 잘되는 것보다 자유로움 속에서 일이 잘 안되는 게 훨씬 더 낫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해하기에 참 어려운 문장이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의 애물단지는 나에게 속박과 자유로움이라는 양면성을 부여해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 내가 오월 안에 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런 모습이라면 내 안에 머물러 있는 다 해도 별 일이야 있겠는가.


비가 여전히 내린다. 강가의 나뭇잎에서 일렁이는 바람을 본다. 나도 나뭇잎처럼 일렁이고 싶어 속도를 내어 걷는다. 내리는 비는 스무 살의 오월을 데려온다. 갑자기 오는 비에 우산 없이 오롯이 비를 맞고 왔던 그 날을. 그때의 비는 달콤했고 다정했다. 그때는 그때만의 ‘애물단지’가 내 안에 있었겠지만 지금은 기억되지 않듯이 언젠가는 지금의 ‘애물단지’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달콤하고 다정했던 것만 기억 될 테다.


계절의 여왕인 오월. 나는 ‘애물단지’와 함께 오월의 강가에 서있다. 아름다움의 시간도, 아픔의 날들도 모두 지나 가니 너무 애달아하지 말자며. 나를 보듬고 ‘애물단지’도 토닥이며 살아 볼만한 세상에 있음을 감사하면서. 우산 안으로 스며드는 오월의 달달한 바람 냄새, 그리고 오월의 강을 만지는 부드럽고 나지막한 빗소리가 그저 그냥 좋은 오늘. 내 안의 ‘애물단지’를 품으며 오월의 강에 안기는 내가, 나는 참 예쁘다. (2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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