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라헬의 셋째 언니)

by 강 라헬


요양병원에 계신 언니를 뵈었다. 벌써 두 해째 그곳에 계신다. 매달 한 번씩 가는데 오늘은 유난히 짜증과 화가 대단하다. 말을 못 붙일 정도로. 늘 어렵고 무서운 언니지만 오늘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해 예전의 그녀를 보는듯했다. 돌아오는 길에 언니와의 관계를 반추해 본다.


언니가 대학생이었을 때 나는 유치원생이었다. 이미 딸만 넷인 집에 막내로 태어난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가족의 축복을 거의 받지 못했고 언니는 누구보다 더 못마땅해했다. 까닭인즉, 못생기고 몸이 약한 것도 모자라 사팔뜨기인 내가 창피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일까, 내 외모 치장에 지나치리만큼 관심이 많았다. 당신의 장난감 인형인냥 매일 옷을 바꿔입히면서 흐믓해했다.

내 모든 기억은 유치원 다닐 때부터다. 무슨 일인지 그 전의 기억은 전혀 없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교통사고 난 이후의 기억뿐이니까. 언니의 극성맞은 관심은 내 머릿속의 생각까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행동거지, 말투 그리고 옷매무새까지 언니의 고상함을 빼닮길 원했다. 그래야지만 못마땅한 내 얼굴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어렸지만 내 심간心肝이 편하다는 것을 일찍 터득했는지, 그녀가 원하는 대로 했다. 하지만 나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것은 학대였으니까. 마치 꽃 회초리를 휘두르며 나의 모든 것을 참견했기 때문이기에. 초등학교 4학년 때, 언니는 결혼과 함께 내 곁을 떠나갔다. 그날 나는 만만세를 불렀고 자유인이 됐다. 그때 언니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아들만 다섯인 언니의 시댁은 을지로에서 소문난 나뭇장(연탄과 숯등을 파는 곳)을 경영했다. 둘째 언니의 시댁과 동업했는데 마침 의대 졸업반인 장남과 언니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군의관 제대 후 언니와 형부는 미국으로 유학 가기로 했다. 모교 강단에 서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으니까. 졸업 후 군의관이 된 형부와 최전선인 강원도 원통에서 신접살이를 시작했다. 첫 임신을 한 언니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바리바리 마련해서 엄마와 함께 원통에 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마지막 근무지인 조치원에서 제대를 두 달 남긴 어느 날 형부에게 큰 사고가 났다. 김신조간첩 사건으로 전국이 시끄러울 때다. 부상병 치료를 위해 지프차를 타고 가다 운전병의 실수로 차가 벼랑으로 전복하는 사고가 났다. 헬리콥터로 서울대학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백일 지난 둘째 딸을 거꾸로 업고 있다는 것을 병원에 도착해서야 알게 된 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때 언니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이런저런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3년 후 형부는 돌아가셨고 지금 국립묘지에 계신다. 서른한 살에 완전히 혼자가 된 언니는 아들과 딸에게, 나에게 했던 것보다 더 심하게 엄격했다. 아무리 더워도 집에서도 옷과 양말을 신고 있어야만 했다. 언니가 만든 규율은 조카들을 힘들게 했다. 어찌어찌 교사가 된 언니는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했다.


그렇게 짧은 결혼생활을 한 언니는 자식과 내게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언니는 내가 교수되길 바랐다. 이른 결혼과 형부의 부재로 당신의 꿈을 접은 것을 내가 이루어주길 바랐으니까. 재수했건만 지방 대학으로 가야만 했던 나를 기어코 서울 **대학에 청강생으로 입학시켰다. 결원이 나는 대로 본과로 옮기기로 총장과 약속되었다며, 열심히 공부만 하라고 우격다짐 섞인 호소呼訴를 했다.

그런데 아이들 아빠를 만난 나는 공부는 뒷전이고 짜릿한 사랑놀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집안의 대단한 반대를 물리치고 그와 결혼한 이후 언니는 내게 더욱 매몰찼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마 나를 볼 때마다 교수의 꿈을 이뤄주지 못한 내가 미웠으리라.


언니를 뵙고 돌아오는 길에 이제껏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내게 그렇게 야박했던 것도, 그녀 만의 사랑 표시였을지 모른다는 의문이 생겼으니까. 한때 천호동의 뭇 청년들을 애타게 했던 미모와 지성을 갖추었던 그녀. 친구들의 선망이 되었던 조건을 골고루 갖춘 결혼 상대, 그리고 재벌 부럽지 않은 재력가인 그녀. 그런 그녀가 지금 요양병원에 누워있다.

자존심이 강한 언니는 요양병원에 입원한 첫날부터 ‘내가 왜 이런 곳에’에 초점을 맞추고 눈을 꼭 감고 음식도 치료도 거부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는 생각이었을 테다. 근 이 년 동안 호스로 식사는 공급받고 있지만 그 어떤 치료도 거부하고 있다. 나날이 건조해져 가는 언니를 볼 때마다 나는 미안하고 안쓰러운 생각이 가득하다.


늘 내게 매정했던 것도, 억지로 서울에있는 대학교에 입학시켰을 때, 내 결혼을 몹시 반대했을 때, 그리고 나의 결혼생활이 녹녹지 않음을 간과한 언니에게 내쳐져 미국 둘째 언니에게 던져진 것도 언니의 사랑이었음을, 집에 오는 길에 알게 되었다. 나를 볼 때마다 냉정했던 언니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면 교만일 테다.

‘가시밭에 한 송이~’ 언니의 최애 가곡 <한송이 흰 백합화>가 떠오를 때마다 가사가 언니를 비유한 것 같은 착각을 한다. 돌아오는 길, 언니와의 관계를 반추함의 결론은 사랑이고 죄송함이다. 다음 언니를 뵈러 가면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여야겠다. “언니 죄송했어요, 사랑합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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