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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Man Oct 02. 2023

재미있었다

히맨の이탈리아 기행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저학년 여름방학  밀린 일기 몰아쓰던 것이 아마도 나의  글쓰기가 아니었나 싶다. 지난 날씨를 가족들에게 물어 보다 결국 포기하고 죄다 맑음이라고 적으며 행여 선생님께 몰아 쓴것이 들통날까봐 마음 졸이던 장면이 기억난다.(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절대로 날씨 따위를 신경쓸리가 없었는데..) 그날 그날마다 내용도 다르게 지어내야 했기 때문에 꽤나 고된 작업이었는데 그렇게 제출한  일기장에 담임 선생님은 빨간 색연필로 "희만이 일기는  재미있었다 끝나는구나? 항상 재밌는 일이 생기나 보네?" 라고 다정하게 써주셨다. 살다보면 이상하게 별것 아닌것 같은데 오래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다. 아직까지도 그때 선생님의  빨간 글씨는  기억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아마도 내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쓴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면 선생님의 메모를 보고서야 다른 친구들은 그렇게 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뭐했고 뭐했고 그래서 재미있었다.  그런식이었는데  나는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글을 마무리했을까? 남의 일기를 본적도 없었을테고 누가 그렇게 쓰라고 알려준것도 아닐텐데 그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어쩌면 선생님은 "밀린 일기를 쓰느라 고생했다."대신 그저 불안한  마음을 어루만져 주신  일지도 모른다.


 최근 십년 전에 쓴 일기를 다시 읽어 보고는 충격을 받았다. 일기장에 적힌 나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누구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었기 때문에 너무나 솔직했고 그래서 너무나 부끄러운 과거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내 보잘것 없는 기억력에 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불과 몇달전에 쓴 글도 지금 보면 처음 보는 것 처럼 낯설다. 그래서 다시금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요즘 나는 일기를 쓰는 대신 바로  여행기를 쓰고 있다. 요가원에서 만난 도서 편집자 출신의 물루님이 본인께서 직접 운영하는 글쓰기 모임에 초대해줬고, 나도 마침 얼마전에 다녀온 이탈리아 여행을 잊어버리기 전에 돌아보며 기록하고 싶던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모임에 나갔고 내가  글을 사람들과 공유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글을 읽어주고 긍정적인 피드백들을 받으니 글을 쓰는 것에 조금씩 재미를 붙이게 되었는데 쓰다보니 잘하고 싶은 마음에선지 자꾸 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었다. 물루 님는 마치 나의 옛날 담임 선생님 처럼 꼼꼼히  글을 읽어주셨다. 그리고 내가 나를 미화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적보다는 항상 격려와 칭찬으로 내가 계속 글을 쓸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시켜 주셨다. 요가도 마찬가지지만 글짓기도 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느껴진다.


 익숙한 것들로 부터 벗어나 낯선 곳에 홀로 떨어저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아보는 .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 한다. 글쓰기도 요가도 나에게는 새로운 여행이었다.  도착한 새로운 도시의 지도를 살펴 보는  처럼, 오래된 유적을 바라보며 과거를 상상하는 것처럼, 들판에 누워 파란 하늘과 구름을 감상하는 것처럼,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책을 읽는 것처럼 나는 나의 몸와 마음을 들여다 보며 아주 조금씩 조금씩 두뇌와 육체를 조여 나갔다. 여행이란 원래 고단하고 불안하고 위험하며 불편하고 예측하기 어려운일이다. 때로는  역시도 그렇다. 요즘엔 타국에서 이주정도만 지나도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탈리아에서 삼주만에 돌아와 집에서 자고 일어난 첫날 아침"체크아웃 시간이 몇시지?"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떳다가   벽지를 보고는 크게 안심하며 다시 잠이 들었었다. 나처럼 방랑벽이 있는 떠돌이에게도 집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여행을 꿈꾼다. 가보지 않은 새로운 나라나 장소에 갈때마다 항상 두렵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짐을 꾸린다. 나이가 들어선지 이제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별로 설레지도 않다. 심지어 요즘에는 어딘가로 떠나기 전날 " 귀찮은데 그냥 가지 말까?"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여행지에 도착하고 타국의 공항에서 처음 맡아보는 냄새와 공기의 질감이 피부에 와닿을  평소에는 죽은듯 가만히 숨죽여 있던 온몸의 세포들이 서서히 살아나고 하게 움직여지는 것을 느낀다. 마치 우리에서 탈출한 집돼지의 뽀얀 살위에 거친 털이 다시 자라나고 송곳니가 일어나듯 나의 눈은 빛나고 온몸의 근육들도 서서히 꿈틀댄다. 두려움은 점차 설레임으로 바뀐다.


 로마 파우미치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산도 없이 가랑비를 맞으며 어렵게 찾아간 싸구려 호스텔의 베게에는 빈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여행을 오자마자 거의 모든 옷을 버려야 했다. 더군다나 손등과 목뒤 심지어 얼굴 근처까지도 베드버그에 물린 자국때문에 사나흘동안은 사람들에게 다가갈수가 없었다. 나는 온몸에 밴드를 바르고 스카프와 모자등으로 중무장을 한채  낮선 도시를 혼자 해매고 다녔다. 로마에 있던 나흘동안 나는 매일 아침 마치 출근을 하듯 때르미니역에서 오따비아노 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교황청에 갔다. 시스티나 성당과 바티칸 박물관을 둘러 보고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을 보고  봤다. 로마에는 볼거리가 무척 많았지만 나는 이것 저것 보아 봤자 어차피  기억하지도 못할것이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들을 많은 시간을 들여 반복해서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둘쨋날 산탄젤로 성에 올랐을때, 그리고 로마의 마지막  아침 베드로 성당의 551계단을 올라 쿠폴라 돔에 올랐을때(2유로만  내면 엘레베이터를 타고 200개단쯤 줄일  있지만 그렇다면  감동도 줄어들것만 같아서 그냥 묵묵히 걸어 올라갔다.) 눈앞에 펼쳐진 로마 시내 전경을 바라보는데 울음이 터졌다. 이유는 알수 없었지만 그냥 속절없이 눈물이 나왔다. 느닷없이 터진 울음은 멈출줄을 몰랐다. 그것은 자기 연민이었던것 같기도 하고 나를 대견해 하는 마음같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스스로 나를 보듬고 앉아 울고 나니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테베레 강을 따라 걸으며 강변에서 노점상들을 구경하고 횡단보도 앞에서 모여 춤추는 학생들을 바라보고 근사한 레스토랑들을 힐끔힐끔 거리다 결국 오래되고 번잡한 로컬식당에 들어가 현지 사람들이 먹는 음식들을 사먹고,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또 당장 필요한 속옷과 양말 그리고 셔츠들을 사러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짧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새 나는 로마를 사랑하게 되었다. 여태까지 내가 가 보았던 그 어떤 도시 보다는 로마는 인상적이었다. 괴테는 로마는 그 자체로 공부이며 자신은 로마에 와서야 비로소 새로 태어났다고 말했다. 나도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가 소매치기가 들끓고 위험하고 더럽다고도 말했지만 괴테의 말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 이 도시와 관계 있었다. 로마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보여주고 있었다. 앞으로 백년이 지나면 내가 사는 곳 주변에 어떤 것들이 남아 있게 될까? 코스모스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류의 역사와 한 인간의 삶이란 너무나도 보잘것 없고 초라한 이야기지만 이천년의 세월과 역사를 간직한 그 도시를 경험하면서 나는 우리들 한 사람 한사람의 삶과 역사도 오히려 결코 무의미 하지 않다고, 그리고 우리는 어리석지만 그래도 위대하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아는 지식들은 이 도시를 제대로 느끼기에는 터무니 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가 본것은 빙산의 일각중에서도 작은 조각들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동 받을 수 있었다.


로마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낼 장소로 나는 만신전 판테온을 선택했다. 저녁식사는 사람들이 줄을  가게에서 10유로를 주고  거대한 샌드위치를 포장해 로톤다 광장에 앉아 판테온을 바라보며 먹었다. 밤이라 신전안에 들어 갈수는 없었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풍경만으로 충분히 압도적이었다. 내가 식사를 마칠때  갑자기 광장 중앙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풍채 좋은 누님께서 나타나 반주도 없이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이크도 앰프도 없었지만 엄청나게 쩌렁쩌렁한 그녀의 음성은 광장 전체를 휘감았다. 그녀의 거대한 몸이 다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였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오페라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클래식 공연을 본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실제로 들어본게 처음이었다. 여자는  한곡만 강렬하게 부르고 나서 구경꾼들이 기꺼이 기부한 현금을 검은 모자 안에 담더니 홀연히 떠나 버렸다. 모두가 한곡만  듣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치 눈밭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노승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옷차림도 자세도 표정도 위엄이 있었다.  시간  공간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그녀는 잊지못할 추억을 남겨준 것이다. 그녀에게 감사를 전해야했는데 머뭇거리다가 하지 못했다. 다음에 판테온에 다시 간다면 그녀를 다시 만날수 있을까? 나는 아마 앞으로 판테온을 떠올릴때마다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그녀에게 축복이 있기를.


 광장 한가운데에는 작은 분수대가 있었는데 그 곳에는 검은 양복과 검은 모자를 쓴 모자쓴 아저씨가 클래식 기타로 호텔 캘리포니아를 연주하고 있었다. 하늘에는 하루 덜 찬 보름달이 떠있었다. 나는 다음날 떠오를 보름달 아래 비친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이 보고 싶어서 그 전날 로마를 떠나기로 한 것이었다. 로마에 도착했을때는 비가 왔었고 일주일 넘게 비예보가 있었지만 마지막날에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낮에는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들 아래 장대하게 늘어선 콜로세움과 포로로마노, 로톤의 언덕등을 둘러 볼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질리도록 유적들에 파묻혀 있었지만 달빛아래 비친 그 유적들이 다시 보고 싶어져 나는 천천히 걸어 콜로세움 쪽으로 이동했다. 괴테처럼 폐허가 되어 버린 유적들을 오로지 달빛만으로만 가늠하며 더듬어 보고 싶었지만 21세기에 사는 나는 여러가지 인공조명들때문에 온전히 달빛만을 받은 콜로세움의 야경을 볼수는 없었다. 아마도 이 세상이 멸망하기 전까지 로마의 인공조명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인공조명이 최대한 비추지 않는 고대 로마의 흔적들을 따라 거닐다 보니 어느 언덕위에 교회에 다다랐다. 교회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가 고통받고 있는 조각이나 그림들이 있었다. 나는 무신론자 였지만 로마에 와서는 신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럴  밖에 없었다. 로마는 카톨릭 교황청이 있는 그야 말로 신의 나라였다.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을 얻으면 망설임 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사람들에게 신은 선택이 아닌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이자 진리였다. 신을 믿지 않거나 의심하는 자들을 그들은 그저 측은하게 바라 봤다. 마치 뭔가는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처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떤 거대한 존재가 나를 위에서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미켈란 젤로가 하늘에 있는 신이 보는 각도에서 피에타를 조각했던 것처럼 나는 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이 있다면 그는 우리 마음속에, 혹은 다른 차원에 있지 않을까? 만약 우리들 80억명의 마음속에 다들 각자의 수호신이 있다면 아마도 그 신은 단 하나의 존재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하나가 아닐까? 내가 생각하기에 동양인들은 겸손하고 내향적이지만 신앞에는 당당하다. 서양인들은 우리 동양인에 비해 자신감 있고 외향적이지만 신앞에서는 겸손하다. 우리는 우리안에 있다고, 저들은 우리 밖에 있다고 느끼는 듯 하다. 신이 어떤 존재이든 그들의 신과 우리의 신이 다를리 없다. 그리고 밖과 안도 결국 통하는 것일 것이다. 로마의 찬란한 유산도 신이 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지만 나는 신이 있다고 점점 믿고 싶어진다. 그렇지 않다면 이 무의미하고 때로는 잔혹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 버겁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이름 모를 신에게 감사 기도를 한다. 이렇게 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이렇게만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뭔가 이뤄내고 싶은 마음도 있고 더 잘되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지만 이루지 못하더라도 신의 뜻으로 여기고 만족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삶이라는 여행을 마치고 그의 품으로 돌아갈 때 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그를 만난다면 딱 한마디만 하고 싶다.


재미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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