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eMan Oct 04. 2023

사고나서 후회되는 것들 2

히맨の이탈리아 기행

C키 하모니카는 이미 하나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필요 없는 물건이었지만 나는 그 하모니카를 결국 사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구하기가 힘든 제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모니카라는 악기는 사실 소모품이기 때문에 영원히 쓸 수는 없다. 오래 쓸수록 소리가 좋아지지도 않는다. 그래서 두 개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낭비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 하모니카 이외에도 짤랑 저리는 방울소리가 나는 또 다른 악기와 나의 작은 여행용 기타에 필요한 카포를 하나 더 구입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한쪽 벽에 늘어선 통기타들을 둘러봤는데 검은색 기타 한대가 눈에 띄었다. 까마귀같이 새카맣고 시크한 그 기타를 보니 나와 함께 일하는 직원이 생각났다. 그 친구는 원래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연예기획사에서 아이돌 연습생 생활도 하던 친구였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일찍 포기하고 요리사가 된 젊은 청년이었다. 날렵한 외모만큼 손이 빠르고 재주가 많아 아주 매력적인 친구였다. 가끔 가게에 있는 오래된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도 종종 부르곤 했었는데 한때는 뮤지컬 배우가 꿈이었던 만큼 잘생겼으며 노래도 잘했다. 피아노도 잘 쳤지만 기타 실력은 더욱 수준급이었다. 나는 그 검은색 기타를 보자마자 그에게 선물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직접 기타를 연주해 보며 고민했지만 결국 그 기타를 사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언젠가 그에게 ‘깁슨’ 기타를 사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깁슨 기타는 그 검은 기타의 열 배는 넘을 가격을 가진 비싼 악기였다. 내가 이번에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서 쓴 총경비와 맞먹는 금액인 것이다. 나는 그 검은 기타를 다시 제자리에 걸어 두었다. 깁슨기타를 사주겠다고 약속하고서 이 기타를 갖다 주면 그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냥 거기서 나왔어야 했다. 근데 나는 그 검은 기타 바로 옆에 매달려있던 아이보리색 클래식 기타를 꺼내서 연주해 보고 뭐에 홀린 것처럼 그 기타를 사서 들고 나왔다. 가격은 172유로. 나는 그 기타가 마음에 쏙 들어서가 아니라 베니스 산 기타가 20만 원대라면 싸다고 생각해서 샀던 것이다. 하지만 숙소에 돌아와서야 그 기타가 베니스에서 만들어진 기타가 아니라 중국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군다나 나는 올 때는 크록스를 신고 허리에 힙색 하나만 덜렁 매고 왔었지만 이탈리아에 와서 새 신발과 4벌의 셔츠, 바지 하나와 반팔 티셔츠 두 장, 긴팔티셔츠도 두장, 와인색 스웨터 한 벌 속옷 몇 장, 친구들에게 선물해 줄 이태리 통가죽 가방 두 개, 체스보드와 조명 하나, 나무 코스터들과 접시 들, 이미 그것들만 해도 들고 가기가 만만치 않았는데 그 섬세하고 거대한 나무 악기를 무사히 들고 갈 자신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무리하면 들고 갈 수는 있었겠지만 그만큼의 노력을 해서라도 가져갈 만한 가치나 애정이(그 물건에게는 미안하지만) 애석하게도 없었다.


 

 결국 그다음 날 나는 그 악기점에 다시 방문했다. 주인은 당연히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기타를 환불해 줄 수 있는지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나 여주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신용카드로 계산을 했기 때문에 환불절차가 까다로워 환불해 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해외에서 결제하고 환불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나 싶어서 따지고 들기가 어려웠다. 여주인은 아마도 남편인 듯싶은 사람에게 전화해서 뭔가를 물어봤지만 결국 미안하다고 말하며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덧붙여 카드사에 한번 물어보라고 말했지만 나는 심카드도 없는 전화기를 쓰고 있었고 해외에서 이런 일은 귀찮고 복잡하게 느껴져 결국 포기하고 상점밖으로 나왔다. 물건을 살 때 그렇게 꼼꼼하게 따져가며 구입하는 내가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도대체 뭐에 홀린 것일까? 나는 기타를 들고 힘없이 걸어 나와 근처에 있던 작은 광장 한쪽에 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그 악기점에서 산 하모니카를 꺼내어 불어 보았는데 기타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하모니카에서 만큼은 정말 소리가 났다. 아주 부드럽고 유려한 음색이었다. 길모퉁이에 앉아 하모니카를 불고 있으니까 지나가던 아주머니들이 걸음을 멈추고 잠시 내 연주를 감상했다. 우울한 마음에 별생각 없이 시작한 연주였는데 갑자기 관객이 생겨서 나는 약간 당황했다. 내가 연주를 멈추자 아주머니들 중에 한 분이 내 옆에 세워진 기타를 가리키며 연주해 달라고 말했다. 나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린 그 기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기타를 꺼내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문득 생각나는 노래가 있었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허냐, 성화를 받치면 무엇 허냐’로 시작되는 우리나라 민요 한 자락을 그 애물단지로 연주하며 조심스럽게 불러 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리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 정도의 재주도 아니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중앙 광장에서 앉아 노래를 하던 그 순간에 내려쬐던 햇살과 사람들의 따스한 눈길들은 나의 실력이나 관객의 숫자에 상관없이 빛나고 있었다. 서너 곡의 노래를 마치고 나니 내 앞에 펼쳐 저 있던 기타 케이스에는 5유로짜리 지폐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떠나고 딱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나는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그 사람에게 5유로를 보여 줬다. 내가 돈을 벌었어. 이 기타로 말이야 라고 말하니 그 여자는 싱긋 웃었다. 나는 5유로짜리 지폐를 바라보며 그래도 내게 이 기타와 하모니카만 있다면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네치아에서의 마지막 날 나는 다시 그 악기점에 들렀다. 환불받는 것은 포기했지만 혹시 다른 작은 악기들과 교환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악기점은 문이 닫혀있었다. 아마도 점심을 먹으러 간 모양이었다. 잠긴 문 앞에는 오후 3시에 돌아온다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당시 시간은 오후 1시 반이었고 나는 그날 오후 4시에 베니스 마르코폴로 공항에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공항에 늦어도 3시까지는 가야 했으니 나는 3시까지 주인을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상점주인이 볼 수 있도록 짧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챠우

며칠 전에 여기서 산 기타를 여기 두고 갈게요.

지금은 짐이 많아서 도저히 들고 갈 수 없어요.

언젠가 베니스에 다시 돌아오면 찾으러 올게요.

혹시라도 팔린다면 다른 것으로 교환해 주세요.

영수증은 잘 챙겨둘게요."


 

나는 그렇게 메모와 기타를 그 자리에 남기고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빨간색 티켓을 끊고 수상 버스에 올라 물길로 이동하며 언젠가 베네치아에 다시 돌아와 그 악기점에 다시 가는 상상을 해봤다. 여주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반겨주는 상상을 한다. 주인이 혹시 나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어쩌면 내가 두고 온 것은 기타가 아니라 그곳에 돌아가야만 이유 그 자체일 것이다. 나의 첫 번째 이탈리아 기행은 끝이 났지만 나는 오늘도 베네치아로부터 시작해 지난번에는 못 가본 밀라노에 가서 나의 새 가죽 가방에 어울리는 멋진 슈트를 한벌 구입해 차려입고 베로나 아레나에서 열리는 오페라구경을 하는 것을 상상한다. 볼로냐에 다시 돌아가면 이번에는 제대로 숙소를 잡고 고기어묵을 먹고 멋진 수제화도 한 켤레 구입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피렌체 두오모에 오를 것이다. 그리고 나폴리와 시칠리아로 이어지는 지중해의 푸른 바닷가에 누워 행복한 휴가를 보낼 것이다. 두 번째 이탈리아 기행은 언제쯤 다시 갈 수 있을까? 본조르노, 보나쎄라, 챠우! 나는 오늘도 제주도 바다 마을에 앉아 지난 여행지에서 많았던 그 수많은 얼굴들을 떠올린다. 베네치아의 곤돌리에, 까르피 버스 종점에서 내 우스꽝스러운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허름한 카페의 여직원, 피렌체의 호텔 메니져, 로마의 셔츠가게의 점원들, 베로나 술집의 메이터와 그 술집 단골손님들. 벽난로에서 나오는 연기를 빠르게 수습하고 친절하게 웃어 주시던 산 안토니오 시골마을 펜션의 주인 부부분들. 그 사람들은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이전 12화 사고나서 후회되는 것들 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