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에 휩쓸릴 것인가, 서핑을 배울 것인가
지난달 홍대의 한 카페에서 디자이너들과 나눈 대화가 여전히 머릿속을 맴돈다. 'AI 시대 디자인이 잃어가는 것들'이라는 주제였다. 그런데 이 불안감이 디자인계만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이 우리 업계에 실존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느냐고요? 네, 그렇습니다." 맥킨지 AI 부문을 이끄는 케이트 스마제 시니어 파트너의 발언이다. 100년 가까이 업계를 지배해온 컨설팅의 거인조차 AI 앞에서 '실존적 위기'를 인정했다.
이런 두려움은 더 이상 추상적 상상이 아니다. 구체적인 수치로 증명되고 있다.
Ravio 연구: 기술 직무 신입 채용률 73.4% 감소
맥킨지: 직원 수를 4만5천 명에서 4만 명으로 축소하는 동시에 1만2천 개의 AI 에이전트 배포
Figma 조사(2024): 전 세계 1,800명의 디자이너와 개발자 중 59%가 AI 활용 중
99designs 조사: 프리랜서 디자이너 절반 이상이 AI 사용, 61%가 실제 수입 영향을 체감
이는 단순한 감축이 아니다. 업계 구조 자체가 흔들리는 조짐이다. 그 뒤에 숨은 진실은 간단하다. 주니어 디자이너들이 밟아온 성장의 사다리가 한 칸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맥킨지의 변화는 디자인 업계의 내일을 예고한다.
과거: 대형 프로젝트 = 매니저 1명 + 컨설턴트 14명
현재: 리더 1명 + 소수 컨설턴트 + AI 에이전트
디자인 프로젝트도 마찬가지다. 한때 아트 디렉터, 시니어, 주니어 디자이너까지 여러 명이 투입되었지만, 지금은 시니어 디자이너 1명과 AI 툴이면 2주 만에 결과물이 나온다.
업계는 점점 소수 정예 + AI 중심 구조로 재편되고 있다.
AI는 이미 '평균적인 수준'을 손쉽게 대체한다. 포토샵 실력이나 깔끔한 레이아웃만으로는 더 이상 경쟁력이 되지 않는다. Midjourney와 Firefly는 몇 분 안에 여러 개의 이미지를 뽑아낸다.
건축 분야의 전환이 이를 잘 보여준다. 손제도 시절 건축가는 반복 작업 속에서 자연스럽게 구조적 이해를 체득했다. 하지만 3D 모델링 시대 이후 그 과정은 사라졌다. 효율성은 높아졌지만, 깊은 학습의 기회는 증발한 것이다.
디자인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과거 주니어들은 자연스러운 훈련 환경에서 성장했다.
체스 모델: 시니어의 작업을 관찰하며 배우기
음악 모델: 프로젝트를 작은 단위로 쪼개 연습하기
스포츠 모델: 반복 작업으로 기초 체력 쌓기
그렇게 무의식적 유능의 단계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이 성장 경로가 붕괴되고 있다. AI를 쓰는 디자이너 중 실제 제품 출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절반도 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베테랑 디자이너들은 이미 무의식적 유능 상태다. 직관으로 선택하지만, 왜 그 색을 골랐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질문을 무한히 받아주는 AI가 "완벽한 멘토"처럼 보인다. 하지만 AI는 '왜'를 설명하지 못한다. 단지 패턴을 흉내낼 뿐이다.
AI가 만든 결과물은 기술적으로 완벽하지만 공허하다. 지역적 뉘앙스, 세대별 감성, 한국적 정서 같은 섬세한 맥락을 놓친다.
글로벌 AI 모델이 만드는 것은 어디서나 통용되는 평균적 디자인일 뿐, '살아 있는 브랜드 경험'을 만들기는 어렵다.
생성형 AI는 일자리의 양뿐 아니라 '성격' 자체를 바꾸고 있다.
디자이너의 미래는 소프트웨어 숙련도가 아니라 다음에 달려 있다:
빠른 학습력과 협업 능력
문화적 통찰력
전략적 사고
과거 자연스럽게 배웠던 것들을 이제는 의도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원리 이해: AI 결과를 올바르게 평가하려면
비판적 사고: AI를 맹신하지 않으려면
새로운 도구: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등 AI 활용법
전략적 관점: 조기부터 큰 그림을 보는 훈련
맥킨지는 "AI와 함께 계속 인재를 채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단, 그 인재는 전혀 다른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빠른 학습자, 협력자, 문화적 맥락을 읽는 사람.
디자이너에게도 같은 변화가 요구된다. 단순히 시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파트너로 자리 잡아야 한다.
진정한 창의성은 의미를 만드는 능력이다.
빨간색 하나도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맥락을 읽고, 설명할 수 있는 힘. 이것이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을 디자이너의 본질이다.
결국 질문은 단순하다. 파도에 휩쓸릴 것인가, 서핑을 배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