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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ul Aug 26. 2023

마흔 즈음에

일상의 단상

내 나이 서른아홉. 올해도 벌써 두 계절이 흐르고 어느덧 선선한 가을을 앞두고 있다. 돌이켜보면 세월은 화살처럼 흘러 아들이 벌써 여섯 살이 되었다. 다음 달에 아이의 생일이 있다. 생일이 지나면 아이는 만 5세가 된다. 나라에서 전 국민의 나이를 만 나이로 지칭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 서른여덟인가. 따지고 보면 아기가 세상의 빛도 보지 않은 채 엄마의 탯줄로 양분을 빨아먹는 시기를 포함하여 날 때부터 한 살로 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친정 부모님께서는 두 살이나 어려졌다고 좋아하시기도 했지만 말이다. 나라에서 내 나이를 서른여덟이라 한들 내겐 그리 와닿지 않으며, 마흔의 기운을 여실히 체감하는 중이다.


지난달 남편이 종합 건강검진을 했다. 남편은 나보다 한 살 위다. 가족력으로는 당뇨가 있으며, 운동을 매우 싫어하고, 밥만 먹으면 식곤증이 쏟아지는지 바로 누워 버리는, 만성피로가 아닐까 의심되는 남자다. 현 체형은 딱 E.T.에 가깝다. 마르고 배만 나온 인간. 그는 원래 멸치같이 마른 체형이었다. 웃통을 벗었을 때 적당히 작은 유륜들, 탄탄한 가슴, 배가 쏙 들어간 남자다움에 반했던 시절도 있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그는 대학 졸업 후 제비뽑기에 덜컥 당첨되어 카투사 군 복무를 했었다. 카투사는 군대 중에서도 매우 휴가가 잦다. 더군다나 최고의 인프라를 갖춘 ‘용투사’-카투사 용산 부대-에 가게 된 남편은 군 시절 몸에 좋지 않은 패스트 푸드와 서양 음식들로 끼니를 때웠고, 자기 관리와 점점 멀어진 결과 지금의 기괴한 E.T. 체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E.T.란 모두가 알다시피 영화 속 외계인 주인공이다. 나는 일전에 E.T.의 포스터를 본 적이 있다. 두 팔은 가느다랗고, 젖가슴은 축 늘어지고, 배는 임신한 듯 남산만한 E.T.의 모습을. 이대로 있다간 남편은 E.T.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걱정이 되어서 남편에게 수없이 운동하기를 권해왔다. 그러나 그는 퇴근 후 내가 차려준 밥을 먹은 뒤 여지없이 침대에 눕거나,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잠들기 일쑤였다. 식사 후 걸어보려고 밖에 나가본 적도 있으나 그 횟수는 8년이라는 결혼생활 동안 손에 꼽을 정도다. 한마디로 자기 관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었다.


건강검진 결과지를 펴고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다 보니 심각성을 깨달았다. 원래도 지방간이 있었지만 경미한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중등도의 지방간이라고 나왔다. 골밀도 수치가 낮아서 골 감소증이 진단되었고, 빌리루빈 수치가 높았다. 심장 판막에 미세한 틈이 발견되었다.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고, CPK(심근 질환, 근육 질환) 수치도 높았다. 갑상선 낭종, 위염에다 공복시 혈당도 높게 나타났다. 요단백도 높았다. 유전적 위험도가 높으니 간암을 주의하라고 쓰여 있었다. 이제 더는 건강하다고 자만할 수 없다. 나는 남편에게 술을 끊으라고 외쳤다.


운동 기피증 남편이 헬스를 시작한 지 한 달 되었다. 회사 동료들과 함께 헬스 모임을 만들었는데, 게을리하면 벌금까지 매기는 등 나름대로 철저하게 하는 중이다. 매일같이 하지 못해도 일주일에 3~4번 정도 사내 헬스장에 가서 유산소와 근력운동을 하고 온다. 사내 헬스장을 코앞에 두고도 운동을 하지 않은 당신이여, 부디 결심이 변치 않아서 꾸준히 실천하기를 간곡히 바란다.


나는 남편을 위해 약국에서 영양제를 사 왔다. 3개월 뒤 재검진을 앞두고 있으므로 수치들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다. 마그네슘과 칼슘, 비타민D, 고혈압에 좋은 코엔자임Q10까지 모두 샀다. 약통 하나에 오만 원이라니. 사다 놨으면 알아서 먹어야 하는데, 가져다 바쳐야 겨우 먹는다. 더 아파야 정신을 차리려나 싶다가도 아직은 오지 않은 그 상황이 두려워, 일일 약 케이스에 고이 담아 대령했다. 남편은 이런 내 마음도 모른 채, 마그네슘과 칼슘 영양제가 두꺼워서 목에 걸릴지도 모른다며 툴툴거렸다.




몇 달 전만 해도 아들이 분명 엄마랑 결혼하겠다고 했었는데, 그 말이 어느샌가 쏙 들어갔다. 본인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엄마인 나는 할머니가 되고 만다는 세월의 이치를 깨닫게 된 것이다. 엄마가 할머니가 된다는 생각에 이르자, 이내 하늘나라에 가면 안 된다고 하며 훌쩍훌쩍 울었다. 요즘은 밤마다 자기 전에 “엄마, 하늘나라 가면 안 돼” 하는 다짐을 받는다. 아직 젊다고 생각하지만, 하도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위태로운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나와 남편이 병사 혹은 사고사한 뒤, 아이만 홀로 남은 세상을 말이다. 챙겨주는 부모 없이 혈혈단신으로 자라야 할 금쪽같은 자식을 생각하니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엄마, 아빠는 건강하게 네 곁에 오래도록 있을 거야. 네가 다 커서 성인이 되고, 장가갈 때까지 우리가 두 눈 똑똑히 뜨고 지켜볼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

그제야 아이는 안심했다는 듯 울음을 그치고 내 품에 얼굴을 깊이 묻은 채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남편의 몸이 좋지 않으니 혹시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 어쩌지, 싶기도 하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친정 부모님밖에 없는데, 부모님도 연로하셔서 머지않아 내가 보살펴야 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면 결국 내 몸이 강건해야 이 모든 일을 책임감 있게 해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마흔 즈음에,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낀다. 예전에는 감기도 3일이면 나았고, 여행을 다녀와도 피로가 오래가지 않았었다. 내가 영양제를 처음 먹게 된 계기는 시험관 시술을 위해서였다. 시험관 시술 및 코로나, 조기폐경 진행을 겪으며 몸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남편과 함께 영양제를 챙겨 먹고 있다.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우리 뇌가 푹 쉬는 시간에 자려고 노력하고, 끼니를 대충 때우지 않으며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하려고 한다.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좋지 않다 싶으면, 잠을 자는 대신 일단 병원부터 가서 진단을 받는다.


마음의 건강을 위해 하는 일은 독서와 글쓰기다. 독서는 머리를 맑게 해 주고, 어떤 책이든 반드시 배울 점이 있기에 내면 성장을 독려한다. 글쓰기는 정신 건강에 도움을 준다. 하루 중 속상하거나 복잡한 심경일 때, 그것을 풀어서 글로 쓰면 그 당시 내 감정이 무엇이었는지와 주변에 대한 이해가 되기 때문에 가슴이 후련해지곤 했다. 이 두 가지를 했을 때 육아의 질도 높아짐을 체험했다.


4개월 후면 마흔이 된다. 마흔의 문턱에서 드는 생각들은 분명 울적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아이는 유치원을 거쳐 초등학생이 될 것이고, 남편은 점점 더 힘없는 아저씨가 되어갈 것이며, 부모님은 더욱 쇠약해지실 것이다. 비록 상황이 점점 더 나를 옥죄어갈지라도,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는 책임감과 의지로 단단한 마흔을 맞이하고 싶다. 더욱 성숙해질 그 날의 나를 기대하며 박수를 보낸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축하 인사다.

흔들리지 않는 책임감과 의지로 단단한 마흔을 맞이하고 싶다. / 내가 나에게 보내는 축하 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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