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이 지내다가도 떠올리면 몸서리쳐지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기억이 있다. 겪고 있는 모든 문제가 한낱 실오라기같이 느껴지고 뒤이어 사무치는 그리움이 밀려온다. 결혼 1년 남짓한 새댁에게 그 일은 너무 갑작스러웠고 가혹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그것은, 아버님이 돌아가시던 5일간의 기억이다.
어느 깊은 밤 갑자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님께서 호흡곤란으로 입원하셨으니, 지체 말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아버님의 지병은 당뇨였고, 결혼할 당시에도 거동이 불편하셨다.
의사는 원래 당뇨로 신장이 좋지 않으셨는데 검사결과 심장마저 제 기능을 하지 못해서 호흡곤란이 일어난 것이라고 했다. 아버님은 평소 말이 많으신 편이 아니었으나 단둘이 있을 때면 먼저 말을 걸어 주시곤 하셨었다. 학식도 높고 사회적 지위도 가진 아버님을 나는 늘 어렵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머님께 하듯 조잘거리지 못했었다. 그런 며늘아기의 어려움을 헤아려 주셨던 아버님의 배려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한번은 가족 모두 모인 식사자리에서 대표기도를 시키셨는데,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신 아버님이 내 정체성을 인정해 주신 것만 같아서 기뻤었다.
그 날은 아프셔서 유독 말씀이 더 없으셨는데, 내가 손을 잡아 드리자 딱 한 마디 하셨다.
“……. 아기는 선물이란다.”
앞에서 하셨던 말씀이 대략 자연스레 아기가 생기는 대로, 섭리대로 받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 결혼하자마자 아이가 들어서지 않으니 당신 생각에는 걱정하신 모양이었다. 마침 임신에 전념하려고 퇴사를 했던 시점이어서 굉장히 긍정적으로 답을 했었고, 아버님은 안심하셨다는 듯 빙그레 웃으셨었다.
아버님은 입원치료를 하면서 투석을 시작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많이 늦은 시점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나는 희망을 잃지 않고 매일 기도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가족들이 서로 교대를 하며 아버님 병실을 지켰다. 나와 친정 부모님은 문병을 가고 싶었으나 아버님께서 거절하셨다. 병간호도 각오했던 나는 해 드릴 수 있는 게 오직 기도뿐이었다.
입원 나흘째, 아버님의 혈색이 조금 좋아졌었다. 나는 몰래 아버님의 발꿈치 부근에 손을 대고 속으로 기도했다. 말씀을 외고 부정적 에너지를 쫓는 내용이었다. 부정적인 마음이 들어올 때마다 고개를 도리질하고 간사하게 희망을 붙잡는 것이 인간이지만, 유독 병원에서는 참 어렵다. 아버님은 집안의 든든한 정신적 기둥이셨기에 꼭 일어나셔야 했다.
다섯째 날, 안심하고 있던 우리 앞에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찾아왔다. 아버님이 패혈증에 걸렸다는 것이었다. 아버님이 퇴원하실 날만 기다리고 있던 남편과 나에게, 현실은 너무 차갑고 잔인했다. 실낱같던 희망의 끈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오염된 피가 혈관을 돌게 되는 패혈증은, 심장이 약하신 아버님에게는 최악의 병이었다.
입원 후에도 남편은 회사 일 처리에 대해 아버님과 의논을 해 왔었는데, 그야말로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처음에는 힘내라고 부르짖던 가족들은 점차 의식이 멀어지는 아버님을 보며 오열했다. 내 눈에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닷새 전의 대화가 마지막이었다니,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임종 순간 직전까지 사람의 귀가 열려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의사는 담담하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말했다. 마지막 인사는 귓가에 대고 한다. 평생 품어온 애정을 말하기엔 그 순간은 너무나 찰나다. 나는 차마 어머님과 가족들의 인사를 떠올리기 힘들다. 단지 어머님께서 강인하셨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하염없이 울고 오열하는 가족들 속 막내며느리인 내 차례는 가장 마지막이었다. 나는 아버님께 신랑 걱정은 하지 마시라고, 손주 못 보여드려서 죄송하고, 사랑한다고, 천국 가셔서 편히 쉬시라고 했다. 이것이 끝이라니…. 아버님의 마지막 얼굴은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버님의 시신을 관 같은 곳에 넣고 그 앞에서 우리는 모두 절을 했다. 율법에 따르면 나는 절을 해서는 안 되지만 그 순간 아버님이 꼭 살아계신 것만 같아서 그리 했다. 지금 생각해도 생과 사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다시 그 순간이 돌아온다 해도 나는 절을 할 것 같다…. 잘 해 드렸던 것보다, 못 해 드린 것이 어찌나 사무치던지. 하필 아버님과의 마지막 대화가 그것이어서 죄스럽고 한스럽기만 했다.
그 뒤로도 장례식과 화장, 운구를 거쳐 마무리하는 일을 곁에서 보며 느낀 건 인생의 허무함이었다. 아버님의 회사가 폐업한 뒤 사망 후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남편은 아직도 아버님의 연구 기록을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다.
남은 이들은 다시금 열심히 살았다. 가끔 그리움이 밀려오면 기억의 한 조각을 떠올려 추억하면서. 그래도 너무나 그리우면 흔적을 찾아가 만약 살아계셨다면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서. 우리도 아들을 데리고 아버님 산소에 몇 번이나 다녀왔다. 지금 팔불출 아빠가 된 남편은 아버님 앞에서 자랑을 늘어놓곤 한다. 나도 그리울 때면 남편의 넋두리에 몇 마디 얹어서 말을 건넨다.
죽음을 직시하면 삶이 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슈바이처 박사는 “인생길에서 주변 환경이 희미하게 사라져버리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눈을 감지 말고 잠시 멈추었다가 멀리 떨어진 경치를 본 다음, 다시 계속해서 진행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죽음을 생각하다 보면 틀림없이 삶을 사랑하게 된다. 죽음과 친숙해질수록 하루하루를 아주 귀중한 선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죽음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죽음을 빨리 직시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삶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더는 자신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없어지므로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타인을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다(『끝나지 않은 여행』,스캇 펙 저, 일부 인용).
조기폐경이라는 성 기능의 죽음을 직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조금씩 그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해 주었다. 물론 돌발사를 마주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나날이 눈물지으며 얻은 결론은 직시해야 그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죽음을 직시할 때, 내가 가진 것 전부는 아니더라도 이미 얻은 것에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알게 된다. 비로소 나의 문제에서 벗어나 타인을 바라볼 수 있다. 과거의 나처럼 자신의 문제에 매몰되어 있어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직접이든 간접적으로든 죽음을 겪으며 깨달은 것은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장 소중한 가족들, 친구들, 주변을 돌아보며 보듬고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생(生)의 의미다. 사(死)는 이것을 깨닫게 해 주는 데 의미가 있다. 생과 사는 그러므로 종이 한 장 차이다. 죽은 사람처럼 살지 말고, 죽었다고 너무 아파하지 말고, 살아가는 데 의미를 두자. 죽음 앞에서 찬란한 빛을 바라보자.
죽음을 직시하면 삶이 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생과 사는 그러므로 종이 한 장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