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지하상가의 혼탁한 공기 속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발소리가 엉겨 들었다. 이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지만, 익숙한 소음 속에서 나는 기어코 그녀를 발견했다. 인파에 휩쓸려 반대편으로 걸어가던 그녀. 흐릿한 세월의 막을 걷어내자 교복을 입은 소녀의 얼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쿵. 멈췄던 심장이 발밑부터 머리끝까지 세차게 울렸다.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아니, 봤더라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기억 속 앳된 소년은 온데간데없고, 삶의 먼지를 뒤집어쓴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으니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지금이라도 달려가 어깨를 붙잡고, ‘나 기억나?’라고 물어볼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시간은 가장 찬란했던 페이지에서 멈춰 있는 것이 옳았다. 굳이 빛바랜 다음 장을 넘겨 서로의 기억에 흠집을 낼 필요는 없었다.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가 인파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러자 낡은 필름처럼, 기억의 조각들이 소리를 내며 되감기기 시작했다.
교회는 처음이었다. 주말마다 텅 비어버리는 마을이 지겨워 친구를 따라나섰지만, 막상 향한 곳은 수요일 저녁의 텅 빈 예배당이었다. 무거운 문을 열자 오래된 나무와 희미한 향내 섞인 눅눅하고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시간을 잘못 알았나 싶어 돌아서려던 순간, 어둠 속에서 영롱한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찬송가였다. 아는 곡은 아니었지만, 그 선율은 소년의 메마른 마음에 조용히 스며드는 샘물 같았다. 소리에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강대상 아래, 희미한 조명을 받고 있는 그랜드 피아노 앞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단정한 단발머리, 하얀 손가락이 흑백의 건반 위를 부드럽게 노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다른 세상의 풍경 같았다.
나중에야 그녀가 한 학년 선배이며, 내 또래 남학생이라면 모두 한 번쯤 고배를 마셨다는 '전설' 속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 유행에 나도 동참했다.
“저… 선배. 좋아해요.”
내 서툰 고백에 그녀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 마음만 받을게.”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심장이 철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창피함보다는 아련함이 더 크게 남았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의 그림자가 되었다. 더 이상 말 한번 걸지 못했지만, 복도 끝에서 친구들과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 음악실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피아노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것이 내 유일한 낙이었다. 그 아련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다른 선배들에게 나는 어느새 눈엣가시가 되어 있었다. 며칠 뒤, 나는 학교 뒤편 으슥한 골목으로 끌려갔다. 영문도 모른 채 쏟아지는 발길질에 속수무책으로 맞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뺨을 톡톡 치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차가운 빗물이 얼굴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흠뻑 젖은 교복과 온몸을 쑤시는 통증. 비참함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며칠 뒤, 절뚝거리며 산고갯길을 내려오던 중이었다. 맞은편에서 작은 우산을 쓴 그녀가 친구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피할 곳이 없었다. 그녀의 친구가 먼저 인사를 하고 지나쳐갔고, 좁은 길에 우리 둘만 남았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에 어지럽게 흩뿌려진 상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
“괜찮아…?”
걱정이 묻어나는 그 한마디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는 빗소리에 묻힐 만큼 작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마음을 전했다.
“선배를 좋아해서 맞은 거라면… 괜찮아요.”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빗소리만이 우리 사이를 채웠다. 침묵이 흐르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역시 안되는구나. 돌아서려던 순간, 그녀가 우산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비 맞잖아.”
그날부터 우리는 1일이 되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독서실에서 나온 늦은 밤, 우리는 포장마차에 나란히 서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볶이를 나눠 먹곤 했다. “너 또 어묵 국물부터 마시지!” 그녀가 웃으며 타박을 주면, 나는 모르는 척 후후 불며 뜨거운 국물을 마셨다. 별것 아닌 대화와 웃음 속에서 우리의 작은 세계는 누구보다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해 첫눈이 내리던 새벽, 우리의 세계는 더없이 완전했다. 독서실에서 나온 우리는 순간 말을 잃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푸르스름한 새벽녘, 세상은 온통 하얀 침묵에 잠겨 있었다. 함박눈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며 솜털처럼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 모습이 마치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무리 같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미지의 길 위로 오직 우리 둘만의 길이 처음으로 열리고 있었다. 그때 맞잡았던, 차갑지만 부드러웠던 그녀의 손의 감촉. 시간이 이대로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시간은 그러나, 멈춰주길 바랐던 내 마음과 달리 너무도 성실하게 흘러갔다. 그녀는 원하던 대학의 어엿한 신입생이 되었고, 나는 고3 수험생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주말마다 그녀가 독서실로 나를 찾아오는 짧은 만남이 우리 데이트의 전부가 되었다. 단발머리는 어깨를 넘는 부드러운 웨이브가 되었고, 옅은 화장을 한 얼굴에서는 더 이상 앳된 소녀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언젠가부터 우리의 통화는 그녀의 독백으로 채워졌다. MT에서 있었던 시시콜콜한 이야기, 새로 사귄 동기들의 낯선 이름들, 그리고 어려운 교양 과목에 대한 투정까지. “그랬구나.” 하고 맞장구치는 내 목소리는 문제집 위를 맴도는 먼지처럼 공허했다. 수화기 너머의 반짝이는 세상과 책상 위 깜빡이는 스탠드 불빛 사이의 거리는 까마득했다. 어느 날, 그녀는 독서실 자판기 캔커피 대신, 그녀의 대학가 예쁜 카페에서 사 온 캐러멜 마키아토를 내밀었다. 처음 맛보는 달콤함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끝맛이 썼다. 반짝이는 카페 로고가 박힌 컵을 든 내 손이 어색했다. 손톱 밑에 낀 희미한 연필 자국이 유독 부끄러웠다. 자랑스러운 그녀 옆에서, 나는 그렇게 아주 조금씩 작아지고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나는 결국 대입에 실패했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던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대입 발표가 끝나고, 친구들은 모두 각자의 캠퍼스로 흩어졌다. 텅 빈 동네에 홀로 남아 다시 독서실로 향하는 길은 유독 길고 외로웠다. 세상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홀로 멈춰 서 버린 기분이었다. 며칠을 앓아누운 끝에 나는 재수를 결심했다.
재수생이 된 나와 대학교 2학년이 된 그녀. 우리의 세상은 더 이상 미세한 균열이 아니었다.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 같았다. 전화기 너머 그녀의 세상은 ‘학회’나 ‘전공 심화’ 같은 더욱 알 수 없는 단어들로 채워졌다. 그녀의 이야기는 점점 더 높고 넓어졌지만, 나의 이야기는 1년 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새로 산 원피스를 입고 내 앞에 나타났다. 반짝이는 그녀 옆에 선, 헌 티셔츠에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 차림의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빛과 그림자처럼,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깊어진 간극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절망했다.
결국 나는 내 손으로 모든 것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마른 입술을 한번 축였다. 약속 장소에서 그녀를 보자마자, 준비했던 말을 칼처럼 꺼냈다.
“헤어지자.”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갑자기…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 그냥… 더 좋은 사람 만나.”
사랑하기에 놓아준다는,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변명을 내뱉었다. 그녀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거짓말. 그건 네 진짜 마음 아니잖아. 이유를 말해줘, 응?”
그녀는 울면서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차마 그녀의 흔들리는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반짝이는 그녀의 새 구두와 내 낡은 운동화가 시선에 들어왔다. 차마 너와 나의 세상이 너무 달라져 버렸다는, 그래서 네 곁에 설 자신이 없다는 찌질한 진심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차갑게 돌아섰다. 등 뒤로 그녀의 흐느낌이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 눈물을 보는 순간, 나는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알았다. 돌아서서 걷는 내내, 내 눈에서도 뜨거운 것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지하상가의 소음이 다시 현실로 나를 끌어당겼다.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그때를 떠올려도 가슴이 아릿하지 않다. 오히려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평생 아물지 않을 것 같던 그 아픈 흉터마저도, 이젠 내 추억의 밤하늘을 수놓는 희미하지만 반짝이는 별자리가 되었음을 안다. 그걸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