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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고... 시루는 그냥 '신남'

by 조정미



봄인 듯 여름인 듯, 하지만 반팔을 입기엔 아직은 서늘한 변덕스러운 날씨.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계절의 주말을 맞아 남편과 나는 시루와 함께 오랜만에 집 근처에 있는 학교 운동장을 찾았다.


넓은 학교 운동장에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시루는 리드줄을 풀어주자마자 운동장을 마치 통째로 접수했다는 듯이 꼬리를 마구 흔들며 신나게 뛰어다기기 시작했다. 모래 밭이 있는 곳에선 얼굴을 쓱쓱 문질러가며 뒹굴고, 구석구석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갑자기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시루는 이제 10살, 노령견이지만 오늘 시루의 모습은 아직 어린 강아지 같았다. 온몸으로 뛰고 구르고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시루의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 고맙고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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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신나게 뛰어놀다가도 시루는 종종 나무 뒤에서 고개를 쏙 내밀며 우리를 확인한다. 마치 '엄마, 아빠 잘 따라오고 있어?'라는 눈빛으로. 우리는 숨바꼭질을 놀이를 하듯이 일부러 살짝 숨었다가 얼굴을 내민다. 그렇게 시루와 장난을 치다 보면 우리가 아이인지, 시루가 아이인지 헷갈릴 정도로 서로가 닮아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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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정 앞 정원에는 잘 가꾸어진 봄꽃들이 활짝 피어있었다. 그냥 지나가면 '예쁜 꽃이네'하고 스쳐지나갔을지도 모르지만, 꽃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어 단순히 예쁘기만 한 꽃이 아니라 이름을 알고 바라보니 더욱 특별한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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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거닐다 우연히 마주한 분홍색 꽃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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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철쭉이라고 했지만, 붉은 철쭉만 떠올리던 나는 '이건 철쭉이 아니야. 다른 꽃일 거야!' 라고 우기며 남편과 내기를 걸기까지 했다. 그런데 꽃이름이 적힌 팻말을 확인해보니 그 꽃 역시 철쭉이었다. 분홍색 철쭉은 뜻밖의 발견이었고, 철쭉이 이렇게 다양한 색을 지닌 꽃이라는 걸 새삼 알게 된 순간이었다.

" 너도 철쭉이구나.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

꽃에게 말을 걸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철쭉 앞에서 나는 한참을 멈춰 서 있었다. 소리 없이 피어 있는 꽃들이지만, 저마다 색과 향기, 그리고 이름으로 조용히 나에게 인사를 건네오는 것만 같았다.


학교 운동장에서 보낸 이 평화로운 하루가 시루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놀이 시간이었고, 우리에게는 마치 작은 식물원에서 꽃을 탐구하는 듯한 기분으로 감상하며 여유를 즐긴 소중한 시간이었다. 오늘이 봄인지 여름인지, 조금 서늘한지 따뜻한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시루와 함께 보낸 이 행복한 시간이 그런 모든 애매함을 잊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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