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산책기
걷는 걸 좋아하지만 집 근처 산책은 잘하지 않게 된다. 평일엔 피곤함을 이유로, 주말엔 약속을 핑계 삼아 집을 벗어나다 보니 생활반경 외는 익숙하지 않다. 1년을 넘게 살았어도 말이다. 8월 15일 광복절에도 어김없이 탈출하려 했으나, 그날은 나갈 수 없었다. 소중한 휴일에 체하다니.. 나는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원통한 마음에 밖으로 나갔다. 시간은 벌써 오후 아홉 시. 내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산책뿐이니까.
한 골목길을 한참을 바라보다 들어간다. 늦은 저녁 술을 마시는 사람들, 함께 자전거 타는 가족 등 낯선 거리에서 익숙한 풍경을 보다 한 학생과 눈이 마주친다. 교복 차림으로 담배를 문 그 아이. 몇 번의 마주침 이후 나를 피해 학원 건물 구석으로 숨어들고는 조용히 불을 붙인다. 방금 수업이 끝난 것일까, 그가 쥔 담배는 탈선이나 과시의 영역이 아니라 고단함을 잊기 위함인 듯했다. 그의 표정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느껴 나는, 애써 모른 척 자리를 황급히 피했다.
10분 정도 걸었나. 명품 매장이 즐비한 곳에 도착. 이곳 압구정은 영업시간이 지났어도 화려하게 반짝인다. 어둑한 도시는 명품을 휘감은 마네킹들이 지키고 있다. 이럴 때면 강남에 살고 있는 게 실감이 난다. 압구정 명품 거리를 산책 삼아 나올 수 있다니.. 놀라우면서도 서울의 화려함과 내 삶의 괴리를 새삼 느낀다. 어느덧 압구정 로데오역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멀리 와버렸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서두른다. 익숙한 길들이 보이자 내일에 대한 부담이 다시 고개를 든다. 이 순간이 한 여름밤의 꿈인 듯 깨고 싶지 않아서 괜히 시간을 끌다 처음 들어섰던 골목길에서 다짐한다.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