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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죠작가 May 28. 2022

그가 내게 한 거짓말

#20220525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라 그리 특별할 건 없지만, 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3월 30일 삼성동에서 5평 남짓한 원룸을 계약하면서 본격적인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5월이 이렇게 덥지 않았는데, 5월 중순만 되어도 후끈한 터라 에어컨을 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들여다본 에어컨 내부는 충격적일 정도로 곰팡이와 먼지로 가득했다. "이 집에 살았던 사람은 단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심각했고, 이것이 뻔하디 뻔한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사실 고민을 많이 했다. 집주인분은 흔히 꼰대라 불리는 목소리가 엄청 큰, 대쪽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직접 상대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지만, 그의 호탕함을 보고 계약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성격은 꽤나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이 사람이라면, 정당한 요구는 바로 수렴될 수 있겠구나" 싶었기 때문.(물론 나의 생각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쳐달라는 말에 되레 혼날까 하는 마음을 숨긴 채


"사장님, 저 XX호인 데요. 에어컨 내부가 많이 더러워서 청소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어. 그럼요. 내가 내일 깨~끗하게 청소해놓겠습니다."라는 그의 대답에 굉장히 만족했다.


그래. 역시 내가 사람은 잘 보지. 바로 고쳐주신다고 하니까 기다려보자.

모두가 예상했겠지만, 에어컨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변한 거라고는 겉뚜껑이 조금 깨끗해졌다는 것뿐.

별 힘이 들지도 않는 필터조차 퀴퀴한 먼지를 가득 머금은 채 방치되고 있었다.

나는 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분명 또 전화하면 좋은 소리 못 들을 걸 아는데, 그냥 내 돈으로 할까?
어차피 안 해줘도 내 돈으로 하려고 했던 건 사실이니까.


두 번째 전화에 당연히 좋은 이야기가 나올 리 없었다. 그는 되려 나에게 화를 내며, 
"당신이 내가 한 청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니, 전문가 불러야지 뭐 어떡해."라며.. 이상한 생색을 냈고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감사하다는 말 뿐이었다. 그의 심기를 건드려선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래... 그래도 해준다는 게 어디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주한 다음날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미안합니다. 전문기술자 불러 잘해드릴게요."

"에어컨 청소 완료했습니다."

에어컨 청소 기사를 이렇게 빨리 부를 수가 있나 싶다가도 그의 말을 믿었다.

그래. 자존심에 사는 양반이 했다고 하는데,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의심해서 뭐하나 싶었으니까.


그러나 또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다. 에어컨 내부는 소름 돋을 정도로 똑같았으며, 

결국 내 돈으로 에어컨을 청소했다는 익숙한 결말.

누군가는 왜 더 따지지 않았냐고, 그걸 왜 네가 내냐고 혀를 차겠지만, 나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전화하는 것만으로 기가 빨리는, 소모전이 될 수밖에 없는 전투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만 그가 괘씸했고, 궁금했다.

나이도 꽤나 드신 분께서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내가 속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무슨 자신감으로 당당하게 청소를 완료했다고 했을까? 왜 책임지지 못할 거짓말을 한 걸까?

도대체 어떤 마인드를 가졌길래 저런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까? 

감히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마인드겠지...


그리고 '어른스러움'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릴 적엔 모든 어른이 다 성숙하고, 가치관이 올바를 거라고 막연한 짐작을 했던 것같다.

겪어보니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알지만, 여전히 마음 한 켠에는 기대감이 남아있었나보다.

 

그의 유치한 거짓말을 들은 이후, 더욱 그런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뻔뻔한 거짓말로 상대를 유린하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말자고

적어도 내가 한 말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내가 겪은 부당함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이미지 출처 : @stayandro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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