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책갈피

2025년 회고 질문 ‘올해의 책갈피’의 답변에서

by 빈칸센

그날은 정-말 오랜만의 주말 휴무였습니다. 오전 11시 느지막이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합니다. 평소라면 컨텍트 렌즈를 꼈을 건데요. 가벼운 눈을 장착하고 싶어 안경을 낍니다. 높은 도수에 눈이 콩알만 해지지만 뭐 어떠냐 싶어요. 운명의 상대에게 나를 알아보라고 - 꽤나 괜찮은 얼굴?이라고 보여주고 싶어 렌즈를 끼기 시작했는데요. 아직까지 깜깜무소식이네요. 나를 알아봐 줄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긴 한 걸까 싶다가도 오늘만큼은 생각을 지우기로 합니다. 거의 한 달 만에 맞는 주말이니까요.


9월 21일입니다. 10년 전에는 9월부터 가을이라 말했는데- 지금은 9월도 여름이라 말합니다. 다행히 오늘의 바람에는 가을이 묻어 있습니다. 딱 걷기 좋은 날씨 - 뜨거운 날들이 이미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듯 말이죠. 주말의 발걸음은 을지로로 향합니다. 가을의 정취와 잘 어울리는, 근현대가 공존해 시간이 멈춘 듯한 곳.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날 보러 오라 하시는 할머니 같은 - 묘한 그리움을 느낍니다. 허름한 돌담과 플라스틱 지붕. 다닥다닥 가족처럼 붙은 건물들. 화려한 오피스텔, 빌딩과 함께 서있는 모습을 봅니다. 작은 빈틈에 안도감을 느낍니다. 왠지 위로가 되네요. 인구 1천 만이 산다는 이 도시에, 기라성 같은 사람들과 회사 건물 사이에 있는 나. 꽤나 귀엽게 느껴집니다. 어떻게든 향기 조금 풍겨 보겠다고 응차 응차. 한 마리 쇠똥구리 같기도 하고요. 걷다 보니


곧 직장 동료의 생일임을 깨닫습니다. 을지로라면 흔하지 않은 선물을 살 수 있을 거예요. 카카오맵을 켜 검색해 봅니다. 그녀에게 빈티지스러운 것을 주고 싶습니다. 근처에 독립 사진집 파는 곳이 있다네요. 걸어서 20분 거리, 저에겐 쉬운 거리입니다. 한 걸음씩 향기를 풍기며 걸으면 - 근처 풍경이 더 눈에 들어옵니다. 음악은 듣지 않아요. 눈과 귀에 들어오는 자극을 느끼기 위해서요. 허름한 지붕 위엔 낮잠을 청하는 강아지가. 일요일에도 일하는 페인트공들들이 눈에 보입니다. 4시 정도 되었는데도, 그림자가 길어집니다. 가을이 오고 있음을 다시 실감합니다. 울퉁 불퉁한 길 위에선 - 제 발소리도 뚱땅뚱땅 어색한 소리를 냅니다. 아기가 치는 피아노처럼요.


사진집 가게에는 정말 사진집만 있었어요. 당연한 말이지만, 도서나 액세서리 정도는 팔거라 기대했거든요.. 그리고 꽤나 가격이 높더라고요. 누군가 열심을 다해 만든 작품일 텐데 - 선뜻 손이 가진 않네요. 가게를 둘러보니 작은 공예품들도 보입니다. 마침 작은 생일 케이크가 저를 기다리고 있네요. 자석도 달려 있겠다 찰흙으로 만들었으니 살아 있는 한 꺼지지 않는 촛불일 거예요. 이 친구로 축하의 마음을 담아 봅니다. 케이크를 포장하고 - 근처 카페로 향해봅니다. 늘 올 때마다 붐비던 곳인데 - 정말 한적합니다. 평소라면 창 밖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대화가 오갔는데요. 이 가게에도 가을이 오는구나. 텁텁했던 습기 속에 빈 공간이 하나씩 생겨나고 있었네요. 창가에 걸린 하늘이 유독 높고 맑았습니다. 있는 힘껏 마음에 담고 싶을 만큼이요.


언젠가 2025년을 떠올릴 때, 오늘의 하늘을 책갈피로 만들고 싶습니다.

잠깐의 여유를 느끼며 - 하늘을 가슴에 담고 싶던 오늘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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