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산업혁명 시대, 우리에게는 미래 0.1에게는 현재
흔히 정보화시대를 20:80의 사회라고 합니다. 즉, 상위 20%의 부자들이 국가의 부의 80%를 차지하고 나머지 20%의 부를 국민의 80%가 나누어 가지게 된 것을 말합니다. 4차산업혁명의 시대에는 0.1:99.9를 각오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4차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융합은 필연적으로 분야의 통합도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동안 우리가 개발하고 누리고 직업으로 삼아왔던 수백만, 수천만의 기술과 그를 기반으로 한 수십만, 수백만의 제품과 서비스는 개수에서 뿐만 아니라 분야에서마저 AI와 로봇 그리고 3D 프린터 등으로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서 대다수의 부는 극소수에게로 집중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논리가 섭니다. 더군다나 일자리도 줄어들 것이니 부를 나눌 기회도 적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치열한 융합기술 경쟁에서 뒤처져서는 안 되며, 사회적 적응 시스템 경쟁에서도 앞서 나가야 한다는 것과 함께 앞으로는 정치가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앞서야 하는 이유는 국가적 파이를 키우기 위함이고 정치가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과거와 달리 대다수가 스스로 버는 것보다 기본소득 같은 주어지는 소득에 의존할 경우 정치는 그 나누는 방법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어떤가요?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많은 전문가들이 위기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우리 사회는 4차산업혁명시대를 먼 미래로 여기고 있습니다. 반면에 0.1에 속하는 나라와 사람들은 4차산업혁명시대를 활짝 열어가고 있고 이미 그 변화는 나타나고 있고 격차는 커지고 있습니다.
자율주행차의 시대를 누가 준비하고 있는가
자율주행차는 AI와 로봇기술의 총체적 실용화를 가장 앞에서 이끌고 있는 것 중 대표급에 해당합니다. 자율주행차는 자동차가 우리 생활을 바꾼 이래 또 한 번 우리 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카네기멜론대의 스탠 콜드웰은 ‘교통의 붕괴’라는 표현을 씁니다.
자율주행차 레벨 4는 완전자율주행이 가능한 단계로 스스로 모든 상황을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는 수준을 말합니다. 이미 실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레벨 5는 운전대, 브레이크 등 조작기기까지 없어지는, 말 그대로 자동차로봇을 말합니다.
실용화까지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자율주행차가 변화시킬 우리 사회의 변화를 대비해야 합니다. 기술개발에서 뒤졌지만 사회적 적응 시스템에서는 기회가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하기에 따라서는 기술개발에서 뒤처진 것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자율주행차는 면도기와는 달리 기계와 사회 시스템이 결합되어 그 효용을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로, 우버에 대한 가치가 엄청나고 도입논란이 뜨겁지만 그것은 자율주행차 운행까지의 방편일 뿐으로 보면 자율주행차 운영시스템에 눈을 돌리는 것은 새로운 사업기회이고 그것은 기계와 도시와 서비스의 시스템 조합을 어떻게 마련하는가로 귀결됩니다. 자율주행차는 자율주행하는 기술만이 전부가 아닌 것이지요.
도시의 변화를 보면 주차장이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넓은 도로가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도시의 모양이 바뀌고 사람들의 통행패턴과 물류패턴이 변화하게 됩니다. 거기에다 3D 프린터의 영역이 확대되는 데에 따라 제조업 분야뿐만 아니라 물류분야도 근본적인 변화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뿐일까요? 더 많은 변화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도시가 자율주행차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미래지향적이고 면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망설여지는 부분은 현실과, 멀지 않은 미래 사이의 간극입니다. 당장은 주차 문제가 심각하고 자율주행차와 수동주행차의 동행기간도 있어야 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시장에 대고 준비를 하라거나 정신을 차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대비하는 것은 정부나 공공기관의 몫입니다. 정부는 국가경영 차원에서 미래에 대비하는 정책과 투자를 마련해야 하고 지방정부는 도시경영과 도시계획 차원에서 구체적인 안을 고안하고 전환과 변화에 따른 조처에 착수해야 합니다.
피츠버그의 모바일 및 인프라부서 관계자는 “운송 자체가 변하고 있다. 더 이상 교량을 건설하고 길을 만드는 것이 운송정책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율주행차가 변화시킬 우리 사회의 변화를 대비해야 합니다. 기술개발에서는 뒤처졌지만 사회적 적응 시스템에서는 기회가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하기에 따라서는 기술개발에서 뒤처진 것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자율주행차는 기계와 사회 시스템이 결합되어 그 효용을 발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계와 도시와 서비스의 시스템 조합을 언제 어떻게 마련하는가로 귀결됩니다.”
이 글을 쓴 이후 카카오 카풀 서비스 시행과 관련한 항의로 택시를 운전하는 50대 가장이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목숨과 바꿀 만큼의 무게가 생존권과 관련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계기로 기업적 카풀 서비스는 택시업계의 생존권 차원으로 각성되고 우리 사회의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카풀 서비스업 사태 해결로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기술혁명에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생존권적 갈등의 시작으로 봐야 합니다. 단순한 기술진보와 기술혁명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인류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은 기술혁명인 자동차의 출현 시에도 비슷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적기조례(Red Flag Act)'는 자동차의 운행 시 속도를 제한하고 마차를 탄 기수가 그 앞에서 붉은 깃발을 흔들도록 한 법입니다. 이 법은 자동차와 마차 업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일 수도 있고 기득권의 횡포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세계 최초로 자동차를 상용화 한 영국이 자동차 산업의 선두자리를 독일, 프랑스 등의 이웃나라에게 넘겨주고 만 결과를 초래합니다.
자율주행차는 AI와 로봇기술의 총체적 실용화를 가장 앞에서 이끌고 있는 것 중 대표급에 해당합니다. 이는 구체적인 일자리 경쟁자, 즉 생존권적 갈등이 존재하는 대표적인 분야이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가장 치열한 대치가 예상된다고 봐야 합니다. 자율주행차는 자가용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가용과 영업용의 혼용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영업용이 주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지혜롭고 받아들일만하게 대처할 수 있느냐는 이 분야에서 기술의 개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될 것임을 영국의 사례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산업 자체를 제약하지 않고 생존권의 대안을 모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회적 적응시스템의 첫 번째 과제가 될 것입니다. 기본소득이 그 대안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최초의 제대로 된 기본소득은 이것을 위하여 도입될 것으로 보입니다. 기본소득 제도의 존재이유중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관건은 이 방안을 심도 있게 준비하고 사회적 컨센서스의 기반을 어떻게 만들어서 충분히 예견되는 사회적 갈등 해결에 대비하는 역량을 갖출 수 있는가가 기술에 뒤진 우리나라 4차산업혁명 성공의 기회를 만회하는 길입니다.
사회적 적응시스템의 두 번째 과제는 도시의 수용성입니다.
이 기술혁명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선제적인 도시인프라의 변화와 함께 시민의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도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수용성이 왕성할수록 더 큰 비즈니스 기회와 연결되고 이 비즈니스 기회는 또한 도시인프라와 라이프스타일의 앞선 변화를 이끄는 동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로니컬 하게도 ‘차 없는 도시’는 자율주행 기술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합니다.
필자는 2000년대 초 송도신도시 추진 2기, 즉 본격적인 도시조성의 시기를 맞아 송도신도시를 세계 최초의 차 없는 도시로 만들기 위해 4 무 교통수단을 고안했던 적이 있습니다. 4 무 교통수단이란 무공해, 무지체, 무혼잡, 무운전자의 자율주행 PRT(Personal Rapid Transit)를 의미합니다. 첨단캡슐 형태의 4인승 차로서 건물내외, 도로의 측면분리대를 활용하여 설치된 궤도를 따라 카드 한 장으로 목적지까지 한 번도 서지 않고 주행하는 자율차입니다. 당시 하드웨어는 리니어모터 전문가인 포항공대 교수와 의논하고 무정차 컴퓨터 네트워크 시스템은 영국의 브리스톨 대학에 시뮬레이션을 의뢰하여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쉽게도 필자가 인천을 떠나면서 추진이 중지되고 급기야 구상 자체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차 없는 도시는 스페인의 폰테베드라의 사례처럼 차 운행을 제한하는 캠페인이나 이벤트성이 아니고 도시 내 교통수단에서 버스, 자가용, 택시 자체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게 하는 도시 내 교통수단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첫째로 도시의 모습이 달라지고, 둘째로 좋은 일자리가 생깁니다. 도로는 녹지, 자전거, 보행을 위한 쾌적한 즐거움의 공간으로 바뀝니다. 교통혼잡도, 주차공간과 주차전쟁의 부담도, 운전부담도 없어져서 사람들은 몸과 마음의 여유를 회복하게 됩니다. 교통사고의 위협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됩니다. 물론 소음 매연 같은 교통공해와 미세먼지 발생도 획기적으로 낮아집니다. 도시기능은 왜곡됨이 없이 물 흐르듯 가동되고 이에 힘입어 시민의 활동은 지역과 분야에 관계없이 거침이 없어지고 그 결과로 도시는 활력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따라 다양한 사람이 모이고 융합의 시너지를 향유하면 신선한 도시문화가 싹트고 새로운 산업이 꽃을 피울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 ‘차 없는 도시’ 구상의 도시전략적 목표입니다.
이 그림에 투자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기술에 앞선 영국이 사회적 적응시스템을 해결하지 못하여 자동차혁명의 주도권을 유럽과 미국에 내주고 말았던 사례에서 보듯이 기술발전을 넘어서는 기술혁명, 세대교체를 넘어서는 시대교체의 시대에는 기술 자체를 넘어서는 사회적응이라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다른 차원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사회적응시스템의 관건은 어떤 그림을 갖고 있느냐에 달려 있고 어떤 그림이냐가 성패를 좌우하게 될 것입니다. 기술은 어떤 그림이든 뒷받침할 수 있는 시대가 4차산업혁명 시대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