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그 시절 정부의 중요한 정책적 목표 중에 산아제한이 있었고 사회적 운동으로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나아 잘 기르자’라는 계몽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대학생 봉사단도 산아제한 계몽을 위한 주민교육을 하러 다녔습니다. 그중에 콘돔 보급과 사용법 교육이 있었는데 주로 어머니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간호학과 여학생들이 맡아서 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짓궂은 어머니들이 있어서 “선상님은 써보셨는가라우?”라고 물어서 웃음이 터지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고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2000년대
‘인구가 줄고 있다.’
‘저출산이 문제다.’
‘이대로 가면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없어질 것이다.’
‘근로 가능 인구가 줄어 세금 낼 사람도, 부양할 사람도 없게 될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세금을 물려야 한다.’
‘저출산 대책에 수십조 원을 썼는데 나아진 것이 없다.’
사실인가???
사실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지나치게 선정적이어서 이로 인해 조성된 국민적 불안에 비해 미래를 위한 해결에 도움이 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이것은 인구통계를 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일까요?
UN 추계에 따르면, 1970년 남한인구는 3천2백만에서 2017년 5천1백만 명으로 불과 40년 남짓한 사이에 3천만 명 대에서 5천만 명 대가 되었습니다. 산아제한이 절실했습니다.
지금은 인구증가세의 둔화를 넘어서 인구수의 감소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연평균 출생아수가 1970년대 전반 1,004천 명으로 역사적인 정점을 찍은 후에 2010년대 전반부 455천 명으로 반토막이 났고 2017년에는 357천 명이 되더니 2022년에는 24만 9천 명으로 신생아수가 줄어드는 추세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급기야 2018년에는 합계 출산율이 0.977로 떨어지더니 2022년에는 0.780명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연평균 사망자수는 1970년대 이후 25만 명 안팎이던 것이 2017년에는 28만 명이더니 2022년에는 37만 명 수준을 보이고 있습니다. 출생아수가 많았던 만큼 일정기간 사망자수는 증가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의 인구는 절대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판단의 문제는 남아있습니다. 인구 감소가 위기를 불러올지 여부는 인구감소가 어느 수준까지 갈 것인가 그리고 어떤 속도로 진행될 것인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론적, 인구통계론적 접근방식으로서 인구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인구감소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득실에 대한 평가가 있어야 하고 이 평가는 양적인 면을 위주로 보던 과거의 판단기준이 아니고 가치관, 기술변화 등 미래의 판단기준에 의해야 합니다. 이제 인구문제는 전적으로 단순한 인구통계적 판단의 문제를 넘어서야 합니다. 변화되는 라이프스타일과 그에 따른 사람들의 생각 그리고 하루하루 혁명적으로 변하고 있는 기술과 세상의 변화가 결정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출산 대책은 남이 하던 방식대로 그리고 전과 같은 방식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미래와 인구
지금 출생한 아기가 당면할 20년 후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지만 아이는 금세 20세가 될 것이고 세상의 변화의 속도는 더 빨라질 것입니다. 4차산업혁명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4차산업혁명의 시대에 인구는 자원일까요 부담일까요.
4차산업혁명의 실체 중에는 인공지능(AI)이 있고, 로봇이 있고, 자율주행차가 있고, 스마트시티가 있고, 3D 프린터가 있고... 이들은 모두 인간을 위해서 있지만 일자리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경쟁관계에도 있습니다. 이 변화는 거스를 수 없어 보입니다.
끔찍한 상상을 해볼까요? 불행하게도 생산성과 노동력 측면에서의 인구는 자원이 아닌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오히려 부담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 시대는 기계로부터 세금을 걷어서 운영될 공산이 큽니다. 기계가 사람을 부양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의 기계가 더 많은 사람을 부양하게 되면 경쟁력은 떨어질 것입니다. 아니면 적게 나눠 줘야 하겠지요.
저출산 대책이 전과 같은 방식으로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
전제가 달라졌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인구가 자원이던 시대에 생각이 멈추어져 있으면 많이 낳아야 하는 것이 목표가 됩니다. 그래서 쉽사리 옛적 기준의 당근과 채찍을 생각합니다. 장려금을 주고 세금을 매기고.. 그런데 그런다고 과연 출산율이 높아질까요?
노령화의 문제를 과거 기준의 생산성과 비용으로 판단하면, 그리고 부양의 대상으로만 보면 출산율은 계속해서 늘어나야 합니다. 늘어가는 인구에 더해 수명은 길어지고 그들을 부양할 젊은 세대는 더 필요해지고.. 이 과거의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야 답이 보입니다. 근본적이고 획기적인 변화가 현실화되고 있음을 봐야 합니다. 지금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는 저생산성, 부양비용, 건강비용, 이동권 등 노령화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될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저생산성과 부양비용의 문제는 젊은이와 노인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로봇 간의 문제이고, 건강비용과 이동권 등은 의료 AI, 자율주행차 등 기술발전으로 많은 부분 해소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출산 대책, 어떻게 가야 하나
인구감소는 어떤 측면에서는 분명히 문제이지만 통계적 자료에 기대어 공포감을 조성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기화로 대책비용만을 늘려서도, 헛되이 써서도 안 됩니다.
건강한 젊은이가 있는 한, 지구의 종말이 오지 않는 한, 신생아 제로의 상황은 오지 않습니다.
큰 틀로 보면 우리 사회의 건강과 희망의 크기가 출산율의 크기를 결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디테일로 들어가 보면 건강한 젊은이가 출산을 포기하는 원인을 그대로 두고는 상황이 개선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를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을 위해서 구체적이고 현명한 대책은 긴요합니다.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첫째, 정책의 목표를 그저 출산율을 높이는데 두어서는 헛일입니다. 전혀 가능하지 않는 데에 왜 혈세를 낭비합니까? 출산율에 목표를 두기보다 젊은 부모들의 공포스러운 육아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서 낳고 싶어 하는 사람만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낳아 기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산율은 높지 않아도 됩니다.
둘째, 그 대신 낳아 놓은 아기, 새 세대를 잘 키우는데 구체적으로 재원과 제도를 집중해야 합니다. 많아야 한해 30여만 명의 신생아, 10년 누적해야 300여만 명의 신세대입니다. 현재 우리 경제의 부담능력이면 최고의 지원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무엇이 최고의 지원인가를 아기들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고 그들이 결정하게 해야 합니다.
셋째, 이 아기들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재원만이 아닙니다.
과거 인구과잉시대에 맞추어져 있는 비효율적이고 불만족스럽고 인간성을 황폐화시키는 ‘경쟁시대의 굴레’를 과감히 깨는 제도 개선이 필요합니다. 저출산 시대에 태어난 아기들, 그 새세대에 맞추어진 교육환경, 성장환경을 필두로 한 새로운 환경을 만들면 이 아기들이 자라는 세월을 따라 우리 사회도 바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