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연수 Nov 25. 2023

나의 전원살이 소고


33년의 공직을 마감하고 10여 년 전 퇴촌에 들어왔습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다 맑은 공기와 마을을 둘러싼 자연의 밝고 청량한 기운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당시 지어진 지 12년이 넘었지만 사방이 온통 너른 창문으로 되어 있고 그도 모자라 하늘창까지 있어 낮에는 숲의 풍광이, 밤에는 교교한 달빛이 집안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환하고 열린 집은 우리가 찾던 그런 집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아직은 나가 살기에 이르지 않느냐고 망설이던 그녀가 서울 집을 팔아서라도 잡자고 한 것이 살아볼수록 새록새록 고맙게 느껴집니다. 

마당에 두텁게 우거진 나무는 잘 정리하고 빈터를 최대한 확보하여 온갖 꽃들을 닥치는 대로 심어서 정성껏 가꾸었습니다. 국내외 불문, 전통, 개량, 야생 가리지 않고 심었는데 놀랍게도 2년여 만에 천상의 화원같이 되었습니다. 꽃을 얻느라 수모도 당하고 잡초와의 전쟁으로 손발이 트고 팔다리허리가 쑤셔도 꽃을 보면 즐거움이 샘솟듯 합니다. 

우리 집의 꽃밭 가꾸기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공생”이 그것입니다. 아무리 예쁘고 귀해도 그것만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다른 것과 어우러지고 함께 살도록 때로는 자리를 옮기고 때로는 개체 수를 줄이기도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온통 그것만으로 채워지거나 다른 꽃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어서 결국은 단조롭게 되면 화단도 활력을 잃고 우리의 관심도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계절 간의 공생은 좀 멀리 본 것입니다. 보통 꽃밭은 봄에 가장 화려하고 사람의 마음을 크게 즐겁게 합니다. 그러나 여름도 가을도 심지어는 겨울도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계절입니다. 그래서 봄에 피는 꽃뿐만이 아니라 여름에 그리고 가을에 피어나는 꽃들에게도 자리를 줍니다. 비록 봄의 화려함을 다소 양보받아야 할지라도 그것을 여유로 느끼고 다가 올여름과 가을을 상상하면서 그렇게 결정을 합니다. 

우리 집에는 겨울에도 꽃이 핍니다. 눈꽃입니다. 눈꽃은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겨울나무에 피어나는 그 아름다운 순백의 꽃은 자연이 주는 또 하나의 조화입니다. 또한 나목의 아름다움은 겨울 숲의 묘미입니다. 나무가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견뎌내기 위하여 오히려 벌거벗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 결기를 봅니다. 이런 것들을 놓치는 것은 산중턱 삶의 긴 겨울을 고려할 때 1년의 거의 3분지 1을 잃는 것입니다. 

자연의 한가운데에서 꽃밭을 가꾸면서 깨닫는 것은 세상에 무한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원하는 대로 좋기만 하기는 어려운 것이 자연의 섭리인 듯합니다. 기나긴 겨울에는 따스하고 온갖 꽃들이 만발하는 봄은 멀게만 느껴지고, 여름 장마철과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는 한동안 황폐화된 듯한 꽃밭을 보면 마음이 성가십니다. 그러나 그 모두가 당연한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그렇지 않으면 꽃의 아름다움은 반감되거나 느낌은 강렬하지 못할 것입니다. 꽃의 아름다움은 반쯤은 기다림의 강도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을 간절하게 하고 기다림의 끝에 올 것을 상상하며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은 꽃이 아름다움과 기쁨을 선사하는 것만큼이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녀는 입버릇처럼 “잡초는 대단해, 엊그제 다 매었는데 또 이렇게 많아졌네!”라고 투덜댑니다. 나는 “만약에 잡초의 그 끈질긴 생명력이 없었다면 지구의 자연은 없었을지도 몰라. 고마워해야 해요!”라고 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잡초라고 해서 구박하지만 원주인은 그들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가 꽃밭을 가꾸면서 지금 뽑아내느라고 골치를 앓는 것 중에 하나가 제비꽃입니다. 우리가 서울에 살 때는 들에 나가면 너무나 아름답고 소중해서 몇 번을 망설이다 아무도 몰래 한 포기 캐와서는 작은 화단에 심어 놓고 즐거워하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입니다. 이렇듯 서있는 자리에 따라 생각이 바뀌는 것인가 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제비꽃은 그대로인데 나만 변한 것입니다. 다시 보면 제비꽃의 아름다움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제비꽃이 한번 자리 잡으면 주변이 온통 제비꽃밭 일색이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다른 꽃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 또한 꽃을 심을 자리가 많아진 데서 연유한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제비꽃의 그 생명력이 자신이 설 자리를 없애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면서 이 사소한 간섭의 손길마저도 또한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하니 참 오묘합니다. “공생”은 자연의 섭리로구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오랜 세월 공직에 있으면서 주로 관심을 가지고 많은 일을 했던 분야가 『도시』와 『재난관리』입니다. 도시는 그 자체로 산업이고, 이렇게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우리를 보듬어 주는 둥지이자 행복과 즐거움의 산실이고, 이 기후변화의 위기에 탄소배출을 실질적으로 저감 하는데 큰 몫을 담당할 수 있는 대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기에 따라서는 그 반대의 부작용만 일으킬 수도 있는 양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는 어쩌면 인류가 뿌린 씨앗의 결과이며 그로 인한 재난은 당연한 자연의 순환의 결과이지만 인류에게는 자연이 주는 시련이며 생존이 달린 큰 도전입니다. 그 힘겨운 도전과 무서운 시련의 뿌리에는 인간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탐욕이 커질수록 도전은 더 힘겨워질 것이고 시련은 더욱 혹독해질 것입니다. 당면한 재난의 위협에서 살아남는 것이 큰일입니다.

그동안 대학에서 기후변화와 도시와 재난에 대하여 정리하고 가르치고 공부하던 중에 우리가 당면한 문제의 해답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다 함께 가는 착한 선진화’ 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 소박한 전원의 삶 가운데서 나는 기후변화의 시대, 그린 어바니즘(Green Urbanism)의 실체와 재난의 정체 및 극복과 적응의 지혜, 그리고 자연의 섭리에 바탕을 둔 착한 선진화의 길에 대하여 생각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저출산의 메시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