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그 화요일
“잘 쉬셨어요?”
출근하여 건넨 성의 어린 인사말 한 마디.
“네.”
끝이었다. 단답형 대답에 반사적으로 그녀의 얼굴을 잠시 응시했다. 찬바람이 쌩쌩 도는 표정.
오늘따라 더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다. 더 이상 입을 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로 가운을 갈아입고 나왔다. 왜 그럴까, 도대체…… 묻고 싶어도 물을 수가 없다. 묻기 싫다.
아니, 물어볼 용기가 없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집에 무슨 일이 있나? 몸이 불편한가? 혹시라도 내가 뭘 잘못했나?’
별의별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달려들어 머릿속을 어지럽혀도, 용기는 튀어나와 주지를 않는다. 일로
인한 질문마저도 시큰둥하게 답하는 그녀. 대답하기 싫어 못 견디겠다는 마음을 단박에 읽어낼 수 있는
표정이다. 입 꾹 닫고 일만 할 밖에, 더는 뭐든 시도할 힘도 의욕도 나지 않는다.
확실히 오늘 그녀는 달라 보인다. 온몸에 결계를 치고 동료의 존재를 거부하고 있었다. 자신의 문제에 골몰해 타인을 신경 쓸 여유가 없거나, 상대의 잘못을 응징하는 무언의 침묵이거나, 이도 저도 아닌 몸이 아프거나, 온갖 경우의 수를 따져본들 이 세 가지 정도로 좁혀질 것 같은데, 도대체 뭘까, 이유가...... 열쇠는 주어졌으나, 궁금해도 절대 열어보면 안 되는, 동화 속의 마지막 방처럼, 다른 모든 가능성을 따져 보아도 의문의 성역으로 다가가고픈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일하는 동작으로 보아 몸이 불편한 것 같지는 않고, 평소 내가 실수를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얘기하는
그녀이기에, 제일 유력한 이유는 자연 집안일로 기울어갔다. 자녀들도 다 출가하여 부럽기 그지없던 그녀,
자녀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알 수도 없고, 적으나마 위로도 건넬 수 없다.
하지만 살얼음을 딛고 있는 듯한 이런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이곳에서 버티기가 힘들 것만은 분명하다.
내일도 그녀가 이런 상태라면 어떡해야 할까, 원장님에게 상담이라도?
터줏대감 격인 그녀와 친하고 싶었다. 단 둘이 일하는 공간과 시간이 친근함으로 채워질 때 하루하루가
즐겁고 신속하게 지나갈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라도 우리 사이에 드리워지면, 침묵을 깨고자 이런저런 얘기들을 먼저 끄집어내곤 했다. 예전에는 과묵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았다.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수줍음이 많은 탓이 더 컸다. 그랬던 사람이 애 둘 낳고 세파에
부대끼며 살다 보니 조금 변했던가...... 집안얘기, 친구얘기, 전 직장얘기 등등, 돌이켜보면 안 했으면 좋았을 얘기까지도 도마 위에 올라 ‘거룩한 수다’로 승화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좀 과했다 싶은 것이, 나의 면면을
타인에게 - 동료에게 모두 이해시킬 필요는 없는데, 적나라하게 나를 들여다보게 만들어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더더구나, 좋은 말만 나왔을까, 쓸데없는 말이 더 많았다.
나는 가납사니였다. 가납사니가 되어 스스로의 격을 무너뜨리고 서로의 관계를 망가뜨리고 말았다. 적당한
거리 두기는 굳이 방역뿐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유익한 지침일진대, 여럿이 일하는 공간에서는 한 번도 겪지 않았던 딜레마였다. 서로를 향한 부담스러운 관심과 시선을 분산시킬 냉각장치는 뭐가 있을까, 숱하게 고민을 해 보기도 했었다. 눈 아프게 핸드폰만 들여다볼 수도 없고, 의자에 앉아 세탁기나 건조기의 계기판만 살필
수도 없고, 멍하니 공간만 째려볼 수도 없고. 그래도 가납사니가 되기보다는 침묵을 택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가납사니는 말문을 닫기로 했다. 그렇다 하여 한 마디도 안 한 것은 아니고, 사적인
대화를 일절 하지 않기로 입술을 깨물며 다짐한 것이다. 침묵도 견딜 만했다. 억지로 깰 필요가 없는 것을,
그동안 나는 참...... 갑작스레, 예전 직장동료의 고별사 - 나랑 했던 얘기는 모두 잊어 줘 - 가 생각나는 건
무슨 이유? 말이란 것이 엎지르고 나면 주워 담을 수도 없으니, 떠나는 마당에 쓸데없이 말이 많았던 것을
후회하는 맘이 컸으리라.
다행히도 그녀한테서는 냉풍 대신 훈풍이 돌았다. 주로 먼저 침묵의 벽을 먼저 두드리는 그녀! 대화를
주도해 가며 미소 짓는 동료가 무안하지 않게 맞장구를 치는 정도만 유지하려 애썼다. 잊자. 잊을 수 없으면
그러려니 이해하자. 살다 보면 어찌 맑은 날만 있을까. 화창한 날, 흐린 날, 갠 날, 궂은날, 찌뿌듯한 날 다
있겠지 싶다가도, ‘그때, 그 화요일에, 왜 그러셨어요?’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꼼실거리던 무언의 질문이,
걸쇠에 가로막혀 다급히 숨을 곳을 찾는다.
‘열지 마, 그것은 판도라의 상자야!’
*가납사니 :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기 좋아하는 수다스러운 사람이란 뜻의 순우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