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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섬결 생각

알뜰한 당신

그 알뜰함에 마음을 다쳤네

by 나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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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한 당신이여, 내 말 좀 들어 보소!

당신은 불 켜 놓는 것을 무척이나 못 마땅히 여깁니다. 집 안에 불을 켜는 족족 끄고 다니느라

분주한 당신은, 그러나 티브이에는 맹목적이라 리모컨을 무척 사랑합니다. 퇴근하면 리모컨 먼저

찾으니, 온갖 시사로 떠들썩한 거실에는 아무도 얼씬을 하지 않지요. 가끔씩 당신은 TV 앞에서 졸다가

그 사랑스러운 리모컨을 떨어뜨리는 ‘대참사’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티브이에는 너그러운 당신, 가끔씩

TV를 켜 놓은 채 안방행을 할 때가 많았지요. 왜, why, 어찌하여, 티브이는 전등처럼 왜 재깍재깍 끄지

않느냐 물으면, 당신은 어정쩡한 미소를 흘리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혹시 누구든 볼 것 같아서

라고요.


알뜰한 당신! 저녁 식사 후, 에어컨 내부 청소를 의뢰하여 기사님이 내일 오기로 했다고, 당신에게 조심조심 보고했어요. 당신은 단박에, 내부 청소 별거 아니라며 직접 해도 된다 급제동을 걸었습니다. 나사 몇 개만

풀면 몸체 청소는 간단하여 금세 할 수 있다고. 가정용은 별로 청소할 거리도 없다고.

“두 시간 정도 걸린다는데?”

“다 인건비야. 요새는 뭐든지 인건비라고!”

‘그렇다면 에어컨 청소를, 이십여 만 원이나 들여서 하는 사람은 바보란 말인가?’

“에어컨 산 지도 좀 됐고, 그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가족의 건강을 위해 한번 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심스레 설득 작전에 나섰어요.

“에어컨에서 불쾌한 냄새가 나던 일 생각 안 나요?”

“환기시키면 되지.”

삶은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갈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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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말이 더 먹혀들지 않을 성싶었던지, 네 맘대로 하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뿐인가요? 그렇게

돈이 많으면 집안 청소도 다 사람 사서 하라고 비아냥 조로 덧붙이고는 말문을 닫아버렸어요. 허락이 아닌

엄포였어요. 그것은 논리로 이길 수 없는 어떤 상황을 타개하는 당신만의 비책이었죠.

너무해요. 원망, 그리고 실망...... 몇 년 전 견딜 수 없는 무더위에, 아이들이 제발 에어컨 좀 사자고 조르고

졸라 샀던 에어컨. 오랫동안 사용을 하지 않아 베란다의 물구멍은 막힌 상태여서, 임시방편으로 대야에 받아내어 비우곤 하다가, 그것도 번거로워 호스를 이어 붙여 사용하고 있지요. 미관상 별로지만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어요. 하지만 이 경우는 다르잖아요. 가족 모두의 건강이 달린 일이 아니냐고요.


밤이면 좁디좁은 방에서 더위 때문에 숙면을 못 취하고 몇 번을 깨어나곤 한다는 딸내미의 호소가 아버지인

당신의 귀에는 어찌 들리던가요? 동생과 방을 바꾸고부터 여름 나기는 아이에게 고역이었을 거예요. 더위를 몹시 타는 아이의 방에 따로 창문형 에어컨이라도 달아 주면 어떨까 물으면, 더운 바람이 다용도실로 나가면

보일러나 세탁기가 남아나겠냐고 절대 안 된다 못을 박아버립니다.

“그러면 어떡해요? 여름만 되면 애가 잠도 깊이 못 이루고 힘들어하는데.”

“거실 거 틀면 되지."

"거실 거 틀면 우리가 너무 춥고, 튼다 한들 딸내미 방은 별로 안 시원하던데."

"더우면 얼마나 덥다고 그 난리야? 그저 여름에는 조금 더운가 보다 하며 지내는 거지.”

"......"

‘나 지금 누구하고 얘기하고 있는 걸까? 벽하고 얘기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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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지는 않아요. 당신과 얘기할 때마다 늘 드는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뭐든지 지나치면 해가 되지

않겠어요? 알뜰한 것은 좋아요. 지금까지 당신과 보조를 맞추어 알뜰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해요. 살아생전

어머님께서도 인정하셨잖아요, 우리 부부의 알뜰함을. 또 꺼내 볼까요? 너희는 돈 다 벌어서 어디다 쓰냐시던

어머님의 말씀을요. 어그러지고 손잡이가 도망간 서랍장을 보시며 혀를 차시던 어머님의 모습. 아직껏

안방에는 닳고 닳은 누우런 한지 장판이 깔려 있습니다. 장마철만 되면 들떠서 발바닥에 달라붙곤 하는

그 장판을 예찬해 마지않는 당신. 습도 조절에는 한지장판이 최고라고요?


시각적인 것이 얼마나 사람의 기분을 좌우하는지요? 첫인상의 중요함이야 더 말할 것도 없잖아요. 안방 문을 열 때부터 시야를 압도하는 누르끼리한 한지 장판에, 저녁 시간을 멋지게 보내고픈 마음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립니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공간을 확 바꿀 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앤이 부럽기만 해요. 내가 앤이라면,

요즘 트렌드에 맞춘 화이트 인테리어로 꾸민 안방에서 소박한 꿈을 펼칠 수 있을 텐데, 빈약한 상상력은

그마저 어렵게 하네요. 인테리어를 사치로 알던 우리 세대와 아이들은 다릅니다. 커피 한잔을 마셔도

분위기와 감성을 찾아 머나먼 곳까지 카페 순례를 떠나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이에요. 그러기에 아이들

방만이라도 도배장판을 새로 하고 방 꾸미기도 도와주었을 당시, 엄마로서 얼마나 흡족하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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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그러더군요. 안방도 한번 꾸며 보자고요.

"도배장판이 먼저 바뀌어야 꾸밈도 빛이 날 걸?"

"그럼 도배와 장판을 먼저 하면 되잖아."

"아서라, 네 아버지가 또 도배지와 장판 사다가 직접 하라고 하실라. 뭐든지 돈 들어가는 일은 직접 해야

된다고 굳게 믿는 아빠니까. 거실 도배도 괜히 얘기 꺼냈다가, 직접 하라 부추기기에, 직접 했더니 보기가

썩 안 좋잖아."

당신은 내가 며칠 걸려 도배를 마쳤을 때, 아마추어의 어설픈 솜씨를 추켜세웠지만, 누가 봐도 비주얼은

별로였어요. 일반 벽지도 힘든데 실크 벽지였으니 오죽했을까요.

"마지막 날, 풀 바른 벽지에 미끄러져 몇 날 며칠을 고생했던 기억, 생각할수록 끔찍도 하구나."

"그럼 어째?"

"할 수 없지. 이대로 그냥 사는 수밖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 안 돼! 어디선가 들리는 듯한 소리, 당신의 생각과 합치되는 것 같아

오싹하네요. 고장 난 것 좀 고쳐 가며 살자 해도 그냥 살지 뭐 하러 고치냐는 당신이기에, 결코 변모할

수 없는 안방. 당신에게 안방 리모델링은 정녕 사치이자 허영인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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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알뜰한 당신, 알뜰이 지나쳐 궁상이 되지 않았음 해요. 내 사전에 낭비는 절대 없다는 신념으로

당신이 허리띠를 옥죄는 탓에, 집안 경제는 늘 긴축경제를 유지했고, 당신처럼 살기를 강요하는 무언의

행동들로 극도의 갑갑함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아이들이 절약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행복의

날개가 꺾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성실만을 무기로 가장의 의무를 다해 온 당신의

노고는 치하하고 또 치하하지만, 마음에는 자그마한 생채기가 나고 말았네요. 하여, 늦은 밤, 에어컨 세척

서비스를 취소한 끝에 담담하게 적어 봅니다.

알뜰한 당신, 에어컨 내부청소는 언제 '손수' 해 주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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