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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섬결 생각

샌드위치 백작의 휴가

샌드위치는 나의 힘!

by 나탈리


꿈의 잔해를 뒤적거리며 일어날까 말까 고민하는데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식재료를 꺼내는 듯한 부스럭거림, 물소리, 싱크대 서랍이나 하부장을 여닫는 소리, 도마를 두드리는 칼의 난타가 한참 동안

어우러지더니, 이윽고 식탁 위에 살포시 무언가가 놓이는 듯한 소리! 일어날 때임을 직감하고 몸을 일으켜

본다. 휴일이면 느지막이 일어나 청소기 코드부터 연결하는 엄마를 위해, 브런치를 만들어 놓은 딸아이.

감동의 휴먼 다큐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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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의 의도대로 무조건 시식(!)부터 하려다 보니 과일이 없다. ‘과일이 빠지면 섭섭하지. 아무렴!’ 냉장고 야채 칸을 힘 있게 열고, 사과와 복숭아를 꺼내 씻는다. 초록 사과를 반으로 잘랐을 때의 날렵한 곡선이라니! 방추형에 가까운 대칭 타원이 마음에 와 안기고 빼꼼한 한 쌍의 씨앗은 심장을 톡톡 두드리는 것만 같다.

토끼를 깎는 순간, 껍질 조각이 아까워 무심코 삼켰다가 병원으로 달려갔던 웃지 못할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다.


식초로 헹군 사과를 조각내어 토끼 모양을 만들던 참이었다. 그런데, 아 그런데, 토끼의 귀를 만들고 도려낸 부분이 문제가 될 줄이야. 찌개의 간을 보듯 살짝 사과의 당도를 체크하려고 껍질을 입에 넣었는데 고것이

그만 목구멍으로 직행, 딱 걸려 버린 것이다. 넘어가지도 않고 뱉어지지도 않는 애매한 상태로 버티고 있는

마름모꼴의 사과껍질! 꿀꺽, 있는 힘껏 침을 삼켜 보았다. 몇 차례의 시도로 그것은 겨우 내려간 듯싶었으나, 안심하긴 일렀다. 곧장 식도와 가슴 부분에 엄청난 통증이 느껴지는데,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종류의 아픔에

눈물이 싸하니 나오려고까지 했다. 물을 마셔 보아도, 뭔가를 우물거려 삼켜 보아도 소용없었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통증은 계속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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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싸안고 주저앉아 있다가 급히 달려간 병원에서 의사는, 몹시 어이없어하며 내시경을 해 보자 했다.

금식울 해야 하잖아요, 했더니 아침에 무엇을 드셨냐 묻는다. 약이랑 바나나 얘기를 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과 껍질이 식도에 상처를 냈을 경우를 대비하여 처방전을 써 주겠다고 했다. 복용 후에도 통증이

사라지지 않으면 내일 내시경을 해 보자며, 생선 가시가 걸려 병원에 온 환자는 많이 봤어도 사과 껍질이

걸려 내원한 환자는 처음이라고 웃음기를 좀체 감추지 못하는 의사 선생님.

“그러게요, 저도 사과를 무척이나 좋아하지마는 이런 일은 난생처음입니다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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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경을 하는 지경까지 가지 않아 참말 다행이었다...... 추억을 품은 토끼를 담고 방울토마토, 복숭아까지

깎아 세팅 완성. 과일까지 갖추어진 완벽한 브런치를 영접하며, 감상을 곁들인다.

“음, 괜찮군. 바질은 넣지 않았네. 좋아.”

바질은 딸아이가 좋아하는 샌드위치 소스인데 맛과 향이 독특해 나랑은 안 친하다. 까탈스러운 엄마(스스로는 전혀 안 까탈스럽다 자부함)를 위해 오늘은 특별히 바질을 생략했나. 사실, 딸아이는 샌드위치에 여러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듣도 보도 못한 재료들을 공수해 와서 퓨전 샌드위치를 만들어 시식을 하라 권하곤 한다. 깜빠뉴나 크롸상, 바케트, 식빵 사이에 루꼴라나 상추, 사과, 새우살, 계란, 선 드라이 토마토,

잠봉, 브리치즈 등의 충전물을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소스를 선택하여 만들어 내는 아이. 군말 없이

시식하면 좋으련만, 아이의 작품을 영접하다 말고 오리지널 샌드위치 타령인 엄마.

“샌드위치는 옛날 샌드위치가 제일 나은 거 같더라. 계란과 감자 삶아서 체에 내려설랑......”

“요즘 샌드위치는 그런 방식 잘 안 써.”

야속한 구닥다리 엄마, 역시나 까탈스러운 엄마로 낙인이 찍혔음을 직감하지만, 그래도 어쩌랴, 익숙한 것이

좋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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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티메프 사태로 아이는 직장을 잃었다. 대금을 받지 못한 성난 납품업자들은 직장을 점거하고 사무실의 집기들을 마구 집어갔다. 아무도 그들의, 채권자라는 이유로 행해지는 약탈을 문제 삼지 않았다. 채권자들의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경영자이자 채무자의 회사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처럼 엎드려

사태의 추이를 관망해야만 하는 다수의 직원들도 그들 못지않게 딱하지 않은가? 밥줄이 위태롭기는 양쪽

다 마찬가지였다. 딸아이의 개인 물품인 펜태블릿과 세상 하나뿐인 엄마 표 핸드 메이드 티코스터까지 집어 가신, 그때 그 성난 채권자 분! 그거 가져가서 잘 사용하고 계시는지, 아니면 홧김에 가져가서는 구석에 냅다 던져 놓진 않으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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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딸내미, 인생 공부 참 거창하게 했구나. 하지만 네 잘못이 아니야.”


이런 말 밖에 해 줄 위로가 없었다. 때때로 생은 예기치 않은 파도로 우리의 항해를 힘들게도 하고, 등을 밀어주기도 한다지만, 아이에게 이번 파도는 너무 거대했다.

그때부터였던가, 아이의 열혈 샌드위치 사랑은. 아이는 새 직장에 직접 만든 샌드위치 도시락을 가져가곤

했다. 가뜩이나 기상을 힘들어함에도 그 바쁜 아침 시간, 부산을 떨며 만든 샌드위치로 헛헛한 마음을 달래며 덜 아문 상처를 싸매고 싶지나 않았는지. 어미는 비통함과 안쓰러움을 숨기며 짐작에 짐작만 거듭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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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한 칸을 무료 임대하여 자신만의 샌드위치 재료 칸으로 만들고, 본격적으로 샌드위치에의 열의를

키워가던 아이. 샌드위치 백작의 제자인가? 엄마는 아이를 샌드위치 백작이라 부르기로 했다. 존 몬태규

샌드위치 백작은 카드놀이를 좋아하여 샌드위치를 만들어 냈다지만, 우리 집 샌드위치 백작은 샌드위치

도시락만 생각하면 출근할 힘이 난다고 했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빌딩 숲을 헤매기보다 동료와 샌드위치를 나누며 품평회를 하는 시간이 한결 좋았다는데, 유감스럽게도 샌드위치 백작의 그 즐거움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새로운 시작은 애정하는 것들을 잊게 만들 만큼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 마련이다. 고민으로 중첩된 산

한가운데에서 샌드위치 백작은 방학을 맞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해 노력에 노력을 곱빼기로 해야 하는 아이의

마음에 샌드위치가 자리할 틈은 없었던지, 한동안 우리는 샌드위치를 맛볼 수 없었다.


“요즘은 샌드위치 안 만드나?”

“이제 샌드위치 사랑은 끝났나?”

“돌아와 줘, 샌드위치 백작!”

샌드위치 백작은 끄떡도 안 했다. 그러다가 일과 학업의 병행으로 가닥이 잡히자, 샌드위치에의 열정이

조금씩 살아나는 기미가 보였다. 오늘의 샌드위치는 다시 살아난 열정으로 버무려진 특제 샌드위치인 것,

그래서인지 둘이 먹다가 하나가 기절(청소해야 하는데 기절하면 곤란한데......) 해도 모를 맛이다. 안 그러니, 작은 따님?


9월부터 두 배는 힘들게 행군해야 하는 인생길, 샌드위치 백작이여, 힘내라, 힘! 터널 끝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것처럼 빛을 향해 달려라, 달려. 오로지 너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라! 엄마도 이 샌드위치 먹고 힘내서

청소를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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