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섬결 생각

인사동 문인화 관람기

온 누리에 수묵 빛!

by 나탈리


8월 초순, 생각지도 않던 초대장을 받았다. 우정 정웅균 선생님의 개인전 초대장으로, 황송하옵게도 대나무도 채 마치지 못한 제자를 제자랍시고 오픈식에 초대해 주신 것이다. 하필 근무가 잡힌 날이라 오픈식은 참석을 못하고 다음날이나 참석이 가능한데, 따로 연락을 드리기도 뭐해서 그저 감상 차 조용히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두근두근 기다림, 설렘 속에 열흘이 금세 흘러가고, 그날은 아침부터 장난이 아닐 만치 더웠다.

더위는 먹잇감 앞에서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는 맹수처럼 기세가 몹시 사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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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큼은 더위야 좀 물렀거라, 울 스승님 개인전에 가 봐야 한단 말이다.’

‘바나나가 열리고도 남을 만한 날씨네, 어서 지하철로 피하자!’

양산 그늘에 숨어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잠깐 사이에도 금세 등줄기가 눅눅해진다. 대단한 날씨였다. 토렴

하듯 달궈질 대로 달궈진 지면은 복사열을 있는 대로 뿜어댄다.

평일 오전인데도 지하철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럼에도 피서처(避暑處)로 손색이 없을 만치 시원하다.

환승 한 번에 삼십 개 역을 거의 서서 갔다. 안국역에서 내려 다시 불꽃이 이글거리는 지상, 5분 정도 태양빛의 집중포화를 받으며 아트 갤러리를 찾았다. 외국인들도 많고 볼거리도 많고 가 보고 싶은 가게들이 즐비한 인사동. 역시 인사동은 문화 예술의 핫 플레이스! 동행해 준 젊은이가 있어 쉽사리 목적지를 찾았고, 더워서 입구에서의 인증샷도 연기한 채 곧장 실내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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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의 입구를 지키고 섰는 큼지막한 화환들, 새초롬한 난 화분들의 환영을 받으며 안으로 입장. 절대

정숙을 염두에 두고 입구에서부터 작품을 감상해 나갔다. 와, 와, 너무 대단하시다! 뭐 이런 말(속삭임) 밖에 더 할 말을 찾지 못할 지경이다. 발을 적시고 무릎 근처에서 찰랑대던 수묵 빛이 정강이까지 차오르고 또 차올라 마침내 심장께까지 넘실대는 것만 같다. 먹빛에 오롯이 담긴 우리의 사계, 온 누리는 온통 수묵 빛이었다. 매화 만발한 나뭇가지에 앉아, 짝을 그리는 새, 정겨운 고향집, 천둥을 숨긴 먹구름, 태양을 애타게 사랑한

해바라기, 전신주를 타고 올라가는 나팔꽃 넝쿨, 단풍 고운 가을 풍경, 삭풍에 날리는 대나무, 탐스러운 달과 대나무, 철학자를 닮은 듯한 고양이가 관람객을 옴쭉 못하게 붙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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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인 듯한 ‘늙어버린 소년’에서 선생님의 맑은 영혼과 장난스러움과 익살을 읽고, 하늘거리는 필체(그림과 글씨의 경계가 모호한)와 시구에 도취하고 압도된다. 오목눈이의 눈망울만치 작아져 움직임을 잊은 듯한 심장이여, 호흡을! 작품과 현실을 넘나들며 예술혼을 느끼기에 여념이 없는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 창조에의 고통, 승화, 비상, 자유로운 영혼, 그리고 선생님 만의 경지 - 결코 다가설 수 없는...... 좀더 고고하고 멋스럽고 우아하게 감상평을 하지 못함이 한탄스럽고, 깜냥만 되면 몇 점 소장하고픈 마음만 우럭우럭 피어오른다.


“어머, 이게 누구야?”

반가움과 놀라움 섞인 외침이 현실로 나를 이끌어냈다. 낯익은 얼굴들. 동기들이다. 손을 맞잡고, 그동안의

안부도 묻고 우정 선생님과도 인사를 나누는 영광을 얻었다. 선생님과 동기들에게 딸내미도 소개하고,

본의 아니게 주위를 떠들썩하게 만들어 버린다.

“예술을 하셔서 그런지 젊으신 거 같아.”

귓가에 소곤대는 딸아이.

“그게 대가의 아우라 아닐까? 꼭 홍안의 소년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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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도 하시면서 언제 이렇게 깊은 작품을 하셨는지, 실제 대나무를 붙일 때 반으로 잘라서 하셨는지,

대나무는 담양에서 공수를 하셨는지, 초보다운 질문에도 선생님은 자상하게 설명해 주신다. 실제 대나무를

사용하여 제작하신 작품은 사실 충격으로 다가왔다. 보느니 처음이라 무조건 먹으로 그려지는 줄로만 알았던 대나무가 이렇게도 탄생이 되는구나 싶어 문외한은 상당히 놀랐다. 양재동 화훼 시장에서 구입한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어 화선지에 붙이고 거기에 또 한지를 붙여 대작을 창조하신 그 열정! 그래서인지 대작 앞에는

유독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딸아이가 대작 '숲' 앞에서 자세를 잡는데, 갑자기 뛰어들어가셔서 포즈를

취하시는 선생님.

“내가 이렇게 장난기가 좀 많아.”

환하게 웃으시는 것이 존경스러운 장난꾸러기 꼭 맞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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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직장 때문에 수업을 중단하게 되었지만, 혼자서라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었다. 하지만 일 년 여가 흐르는 동안, 단 한 차례의 시도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못했다. 과녁이

없으니 활시위를 당길 의욕도 생기지 않고, 의욕이 생기지 않으니 소망도 차츰 묻혀 갔다. 화구를 챙겨 들고 구민회관으로 종종걸음을 하던 화요일의 행복은, 내게 사치이자 더는 잡을 수 없는 신기루 같게만 느껴졌다. 강의실에 도착한 순서대로 칠판에 이름을 적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곤 했는데 1등 다툼이 사뭇 치열했다.


먼저 과제물 검사를 받은 후 새로운 과제물을 선생님으로부터 받는 식으로 수업은 진행되었다. 제자들에게

과제물을 그려 주시는 선생님의 일필휘지 붓 끝을 따라가던 순간은 다들 얼음에 걸린 것처럼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였고, 선생님께서 붓을 놓으시면 그제야 숨을 편히 쉴 수 있었다. 누군가 큰 소리로 ‘땡’을 외쳐준

것처럼. 조금씩 발전해 가는 제자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던 선생님. 겨우 걸음마 수준의 제자에게,

고명하신 선생님의 칭찬만큼 의욕과 열심을 불러일으키는 에너지원이 또 있을까? 그 에너지원이 고갈되지

않도록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고, 과연 실력은 노력하는 자를 배반하지 않는 듯했다. 배우는 순간, 몰두하는

순간- 두 시간은 찰나처럼 짧았으나, 깊으나 깊은 만족감이 내내 충일하였고, 수업 후 선생님과 동기들과

식사하며 나누던 삶의 잔잔한 얘기들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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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붙들려 계속 서성거리는 내게 다가와, 중단하기는 아깝지 않냐며 다시 수업에 나오라 간절히 권유를 하는 동기들. 그들의 실력은 그동안도 많은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잖아도 마음 한편에 자리한 미련을

떨구지 못한 상태라, 언제고 다시 시작해야지 하는 중압감은 더해만 간다. 동기 중 한 분이 식당을 예약하는 듯하기에, 순간적으로 저희도 가도 되나요, 물었다. 답변은 당연히, 되지요,였다. 우연찮게 만난 인연들과

그냥 헤어지기도 서운하여 같이하기로 했다. 관람 후 일정으로 딸아이가 만둣집을 검색해 놓은 터라, 변수가 생겨 당황스럽지 않은가 살짝 물었더니, 괜찮다 한다. 모르는 어른들이랑 식사하는 것이 좀 부담스러울 만도 한데, 엄마의 친교를 위해 안 괜찮아도 괜찮다 했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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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지길 골목골목을 지나 도착한 정선 곤드레 쌈밥집에서 동기들 사이에 끼어 앉았는데, 오늘의 주인공인

선생님께서 우리의 맞은편 자리로 오셨다. 오픈식에는 손님이 몇 분이나 오셨는지 여쭈었더니, 120명

넘게 몰려, 같이 식사할 곳을 찾느라 무진 애를 쓰셨다고. 세상에나! 감탄사가 또 터져 나온다. 음식도

맛깔스러운 데다 좋은 사람들과 모처럼 함께 하니 다들 만족하는 눈치다. 선생님은 식사를 빠른 속도로

마치고 갤러리로 가시고, 동기 분들께 아쉬운 석별 의식을 마친 우리는 인사동 탐방을 위해 무더위 속으로

용감하게 발걸음을 떼어 놓는다. 찜통더위 속에서도 외국인들은 눈을 반짝이며 기념품 가게들을 들락거린다. 거추장스러운 한복까지 걸친 외국인이라니, 이 더위에! 인사동은 대단한 존재들을 흡수하는 블랙홀인가 보다. 폭염과 폭염을 넘어서는 열정으로 들끓는 인사동. 그러니 여름날 인사동에 가려거든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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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 가게에서 구입한 부채, 무더위에는 부채바람이 최고!


‘퇴근 시간대 피하여 귀가하기’를 목표로 우리는 찻집과 베이커리를 찾아 여유로움에 한껏 젖어 보았다.

시원한 음료와 달콤한 주전부리는 더위로 지쳐 하느작거리는 마음에 스프링클러가 되어 준다.

화염 같은 더위를 헤치며 수묵 향에 함빡 젖어도 보고, 스티커 사진에 행복한 순간도 담아 오고,

하루를 알짜배기로 사용한 듯한 뿌듯함! 피곤은 덤이라도, 괜찮았다.

선생님의 수작 ‘그대의 눈썹’이 아직까지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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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사진은 모두 우정 정웅균 화백님의 개인전 전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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