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감상기
사냥꾼 둥가는 마을의 골칫거리인 회색 곰을 잡기로 결심하고 회색 곰의 자취를 찾아다닌다. 몇 날 며칠,
숲 속을 헤매던 중, 예사롭지 않은 맹수의 포효를 듣는데, 때마침 달이 휘영청 밝은 보름날이었다. 조심조심
나무 위로 올라가 보니, 커다란 곰이 은신처인 듯한 동굴 앞에서 한 무리의 늑대 무리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가 찾던 회색 곰이다. 수적으로 우세한 늑대 무리들이 적극적으로 공세를 벌였으나, 곰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도 굴 입구를 떠나지 않고, 천지가 떠나갈 듯 포효를 내뿜으며 늑대 무리들과 대적한다.
둥가는 늑대가 이기기를 바랐지만 결과는 그 반대였다.
늑대들이 죄다 꽁무니를 빼자마자 둥가는 이때다 싶어 활시위를 당겼고 화살은 곰의 심장을 꿰뚫었다. 쿵!
하고 커다란 곰의 몸체가 바닥에 쓰러진 뒤 한참 만에, 동굴 안에서 무언가가 기어 나와 곰의 품을 파고든다. 새끼곰이거니, 바라보던 둥가는 깜짝 놀란다. 놀랍게도 곰이 아닌 사람의 아가였다. 둥가는 곰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이 든 아가를 빼내고 곰을 묻어준 다음 아가를 오두막으로 데리고 온다. 그가 지어준 아가의
이름은 루나였다.
지난밤, 단밤 님의 오디오 북을 재생해 놓고 잠을 청했는데 한 오 분 들었을까? 말 그대로 자장가가 따로
없었다. 나머지는 무의식에나 저장되었을 터. 눈 뜨자마자 다음 내용이 몹시 궁금해진다. 아침 일과를 마치고 얼른 되감기와 재생을 클릭한다. 정글북 류의 동화인가 보다고 멋대로 추측했는데 들을수록 점입가경이다.
둥가는 온갖 정성으로 루나를 양육한다. 그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루나를 데리고 다녔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다. 엄마 젖을 대신할 염소젖을 구하러 뛰어다녀야 했으며, 한밤중 말도 못 하는 루나가 울어댈 때면
어디가 아픈지, 무엇 때문에 그리 우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해 미칠 지경으로, 괜히 루나를 데려왔구나 후회가 일기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루나가 아빠라는 말을 처음 할 무렵에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딸 바보가 되어버렸다. 루나는 사냥도구를 장난감 삼고 곰 가죽을 둘러쓰기도 하며 무럭무럭 자란다. 둥가는 루나에게 곰인형을 만들어 주는 대신, 나무칼을 만들어 주고는 숲에서 자신을 지키는 법을 가르치기로 한다. 태양의 그림자로 시간을 헤아리는 법, 먹을 수 있는 것과 위험한 것, 짐승의 발자국을 구별하는 법 등등.
둥가의 사랑 어린 보살핌과 교육에 힘입어, 루나는 숲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어느 날 가죽을 팔러 내려간 마을에서 루나가 잘 차려입은 한 소녀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둥가는 옷 가게로 달려가 가죽 판 돈을 전부 내놓으며 가장 좋은 옷을 루나에게 사 준다. 하얀 드레스 차림의 루나는 한 마리
백조처럼 우아한 자태로 숲을 누비며, 마침내 토끼 사냥에도 성공하지만, 둥가는 루나를 위해 숲 생활을 청산하기로 맘먹는다. 그는 마을로 내려가 집을 구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각오로 생활전선에 뛰어든다.
잔심부름이나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고, 힘쓰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자신 있었으므로, 생활은 물론 곧 루나를 위한 가정교사까지 구해줄 정도의 형편이 되었다.
‘어째 얘기가 너무 행복하게만 흘러간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그날은 대낮처럼 밝은 보름날이었다. 하루하루가 더없이 만족스러운 루나, 그러한 루나를 보는 것만으로
뻐근한 행복감에 젖는 둥가 앞에 불행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온다. 백옥 같은 루나의 뺨에 검은 털이 하나
둘씩 솟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둥가는 소스라쳐 놀라 울음을 멈추지 않는 딸에게 자장가를 불러 주며 겨우
진정시키는데, 이튿날 아침, 루나는 완전히 회색 곰이 되어 있었다. 다시 루나를 숲 속의 오두막으로 데려간
둥가는 밤마다 가엾은 딸을 위해 자장가를 불러 재워주었고 딸은 차차 인간의 언어도 잊어버리고 곰처럼
울부짖을 뿐이었다.
둥가는 딸이 잠든 틈을 타, 숲 후미진 곳에 사는 무당을 찾아간다. 무당은 회색 곰의 저주 탓이라고, 회색 곰의 저주에서 풀려나는 방법은 둘의 운명을 맞바꾸는 방법밖에 없다 했다. 둥가는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루나를 위해 식량 창고를 점검하고, 하얀 원피스와 모자와 나무칼을 루나의 머리맡에 챙겨 놓는다. 생명과도 같은
루나의 곁을 떠나야 하는, 둥가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하지만 그는 회색 곰의 무덤으로 가, 달이 이울기 전에 딸의 저주를 자신이 대신 짊어지기 위한 비책을 행해야 했다. 그는 무당이 알려준 대로 회색 곰의 무덤이 흠뻑 젖도록 자신의 피를 흘려 넣고, 자신이 루나 대신 곰이 되게 해 달라고 달과 별을 감동시킬 만큼 혼신의 기도를 올린다. 그의 정성에 달과 별과 바람도 운행을 멈췄고 그의 소원대로 그는 회색 곰이 되어 깊은 숲 속으로 떠난다. 다시 사람이 된 루나는 자신의 이름이 루나라는 것 외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사냥을 왜 그리 잘하는지도 모른 채 오두막에서 홀로 살아간다.
가끔씩 문 밖에 놓여 있는 싱싱한 과일이나 약초들을 보고 숲에게 누가 주었나요? 묻곤 하던 루나.
그러던 어느 날, 회색 곰을 잡으려 왕자가 숲 속으로 사냥을 나왔다. 왕자는 신하들과 떨어져 혼자서 회색 곰을 잡으려다 말에서 떨어지는데, 루나의 화살이 회색 곰으로부터 그를 구해 준다. 루나는 왕자를 오두막으로
데려와 정성껏 상처를 치료해 준다. 아름다운 데다가 지혜롭기까지 한 생명의 은인을, 왕자는 정중히 궁으로 초대한다. 왕자의 인품과 매너, 핸섬한 외모에 루나도 기꺼이 수락하고, 왕자 일행이 떠나는 모습을 멀찍이, 높은 곳에서 지켜보는 회색 곰이 있었다. 루나 대신 곰이 된 아빠 둥가. 마지막으로 루나의 행복을 빌어준 그는 이제, 인간의 언어도, 인간이었던 기억마저도 깡그리 잊어버린다.
‘훌쩍훌쩍! 고독한 아빠 곰 둥가를 위해 눈물은 필수, 애곡은 선택! 둥가의 무조건적인 사랑. 부모이기에 가능한 게지. 맴찢이로군. 이렇게 해피엔딩과 새디엔딩이 뒤섞인 채로 결말이 나는 걸까? 아니, 아직 끝이 아니네? 다행이야.’
궁으로 간 루나는 현명한 처신과 지혜로 왕자와 대소 신려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곧 루나가 왕자비가 될 거란
소문이 궁 안에 파다하게 퍼지는데, 단 한 사람 제사장 말고는 대부분 수긍하는 분위기다. 임금과 왕자가 가장 신뢰하던 이는 제사장이었기에, 그는 온 국민들의 마음을 차지해 버린 루나가 눈엣가시 같기만 하다. 얼마 후, 궁에는, 루나가 회색 곰의 딸이라는 소문이, 왕자비가 될 거라는 소문보다 떠 빨리 더 넓게 확산되어 갔다.
제사장은 임금과 왕자에게, 루나를 회색곰과 맞닥뜨리게 해서 회색 곰이 루나를 공격하는지 여부에 따라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자 제안한다.
‘술수와 모략의 대가로군. 하긴, 이런 악랄한 조연이 있어야 주연이 빛나는 법이지.’
왕자가 대노하여 반대하지만 루나는 자원하여 그러겠노라고, 자기가 위험에 처하면 왕자님과 신하들이
매복해 있다 도와 달라 한다.
내일이면 루나와 회색 곰이 대면하는 날. 제사장은 아무도 몰래 무당을 찾아가 돈자루를 건네고 무당은
제사장이 바라는 바인, 내일이 루나의 마지막 날이 될 거라 호언을 들려준다. 다음날, 루나는 하얀 원피스에 나무칼을 허리에 차고 숲 속 벌판에서 회색 곰을 기다린다. 그러나 곰보다 먼저 백여 마리나 되는 늑대 무리
들이 루나를 에워쌌다.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갔지만 늑대들의 기세는 좀체 꺾이지 않고, 그나마 화살마저
금세 동이 나버렸다. 신하들이 칼을 들고 뛰쳐나가려는 왕자를 꼼짝 못 하게 붙잡고 있는 탓에, 왕자의 마음은 타들어가는 듯 안타깝다. 그때 어디선가 괴성을 지르며 회색 곰이 나타나 늑대무리들을 제압한다. 두려움을 잊으려 눈을 꼭 감은 채 자장가를 읊조리는 루나, 무심히 루나를 바라보고 돌아서는 둥가.
“역시 루나는 회색 곰의 딸인가 봐. 공격을 안 하네?”
외침을 들은 건지, 회색 곰이 돌아서서 루나에게 다가온다. 눈을 뜬 루나가 나무칼을 빼어 들고, 사나운
기세로 달려든 곰은 루나의 나무칼로 자신의 심장을, 온 힘을 다하여 찌른다. (한없는 사랑, 희생, 십자가가
연상되는...) 누가 봐도 루나가 곰을 찌른 듯 보이는 상황이다. 회색 곰과 루나의 두 눈이 마주쳤다.
짧지만 긴 응시, 그리고 무언가 뇌리에 감겨드는 기억, 한 올!
"아빠?"
루나는 울부짖으며, 쓰러져 미동도 않는 회색곰의 몸체에 엎드려 나무칼을 빼려 낑낑댄다. 눈물이 나무칼을 따라 곰의 상처에 스며들더니, 상처는 말끔해지고, 회색곰은 털북숭이 가죽 대신 말짱한 피부의 둥가로 변한다. 마침내 지독한 저주에서 풀려난 둥가! 눈을 뜨고, 웃고 있는 루나의 아름다운 얼굴을, 그는 보았다. 운명도 맞바꿀 만큼 사랑스럽고 소중한 딸 루나를!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어 본다. 기승전결, 듣는 내내, 어느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여느 동화
처럼 왕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았대, 로 끝나지 않아 흥미롭다. 판타지와 리얼리티를 적절히 버무려 허무맹랑한 느낌도 적고...... 작가가 누군지, 대단한 이야기꾼이라 엄지 척(!)하고 싶다. 차지도 넘치지도 않은 단밤
님의 담백한 음성도 동화의 감칠맛을 더해 주는 긴요한 요소 같다.
투박한 사냥꾼 둥가의 삶에 루나가 다가오고 그로 인해 큰 사랑에 눈을 떠 가는 과정이 잔잔한 울림을 준다. 곰이 되어서도 루나의 행복을 위한 연결고리가 되려는 아비의 마음, 눈물겹다. 큰 사랑, 희생, 행복, 완전한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동화인 듯.
한 번으로는 성에 차지 않으니 여러 번 반복 재생하게 만드는 동화 오디오 북이다. 두 시간이 넘는 분량이므로 잠자리에서는 절대 완전 감상하기는 어려울 듯.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데, 이런 신비로운 이야기는 참을 수가 없다. 세 번이나 들었음을 고백합니다!
*단밤 님의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