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꼭 숨었거라, 새치야

by 나탈리

몸살기가 있는 동료로 인해 하루 늦춰진 휴일이었다. 숙취로 고통스러워하는 딸아이를 위해 꿀물을

타 주고, 누룽지를 끓이고, 요깃거리로 반숙란과 고구마를 삶아 주었으나, 넘기지를 못했다. 밥은 더더욱

못 먹을 것 같다며 끝내 반차를 내고 드러눕는 아이!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속이 메스꺼워 못 견디겠다는

하소연에, 몸이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고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소리를 해댄다. 참 나, 누가 억지로

마시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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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지가 속은 있어서 제 어미 새치는 보기 싫었던지, 염색하라고 거금(?)을 엊그제 쏴 주었다. 마침 명절도 얼마 안 남았고 커트할 때도 다가와, 그 예산을 집행하러 가기로 마음먹었는데, 강추위로 외출을 자제하라는 문자가 아침 일찍부터 날아왔다. ‘이불 밖은 위험한 날’이니 롱패딩과 머플러까지 단단히 챙겨 입고, 싸매고, 장갑과 귀마개까지 착용하고 나섰다. 가까운 동네 미용실이라 내의는 호기롭게 통과! 아 그런데 말입니다,

찬공기와 마주하는 순간 후회가 물밀 듯 일더라 이 말입니다. 찬바람이 종아리 사이를 파고들며 나 아직 건재하다네,를 외치더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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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지났다고 단박에 겨울이 호락호락 떠나지 않으리란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너무 앞섰던 탓일까. 하여튼 2월 들어 내의는 입기가 싫었다. 추위는 이미 정점을 찍은 것으로 간주하고

롱패딩마저 던져버릴 날만 간절히 기다리던 차에 강추위라니. 그래도 용감히 나선 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눈밭에 뒹굴어도 되겠다 싶은 옷차림들로

어디를 그리 바삐 오가는지.....


미용의자에 앉자마자 원장님은, 며칠 전 눈을 쓸다가 미끄러져 허리가 안 좋다고,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어느 정도 자잘한 얘기가 오가는 게 자연스러운 상황인지라, 반은 건성으로 들으며

추임새도 살짝 곁들이는 사이, 커트가 끝났다.

“좀 차가울 거예요.”

배합한 염색약을 바르기 전 그가 주의를 준다. 차가우니 놀라지 마시라는 세심한 배려였다.

팔순이 넘은 노모를 모시고 아들과 셋이 산다고 들었던 터라, 어머님 건강은 좀 괜찮으시냐 가볍게 물었다.

부모님을 여의고 나서부터 지인들만 보면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습관이 생겨났다. 정정하시다 하면 부럽네요 하고, 편찮으시다 하면 쾌차하셔야 할 텐데,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요양 보호사도 용납 못하던 어른이 세 시간 방문 요양을 받고, 나날이 쇠약해 가는 몸을 견디고 계신다니, 야속한 세월은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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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 가는 건강과 꼿꼿한 자존심 사이에서 균형을 찾지 못한 어르신. 미용실과 가사까지 병행하며 노모를 봉양해야 하는 원장님. 서로 간에 날마다 웃는 낯만 보일 수는 없을 터였다. 허리가 온전히 못한 상태에서

편찮으신 노모의 푸념(그다지 아름답지 못하고 비생산적인 말들)을 듣다 보니, 부딪치고 말다툼까지 심하게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며 원장님은 속상해했다. 수도권에 사는 누나에게 며칠만이라도 노모를 돌봐 달라

부탁했더니 단칼에 거절했단다. 아르바이트 가야 한다는 이유로.


이쯤 되니 청취자의 입장에서 자연스레 엄마 얘기가 튀어나와 버렸다.

자녀가 둘이나 아홉이나 다를 게 없네요. 요양원 가시기 전, 엄마가 방에서만 생활하실 때였어요. 엄마가

그만, 방에서 미끄러져 발을 다치셨더랬죠. 막내 여동생이 자기 집에서 석 달을 모시는 동안의 일이었어요.

설이 다가왔죠. 여동생이 큰며느리라 제사상도 차려야 하고 손님들도 많이 오니, 은퇴한 큰오빠 내외가

삼일만이라도 엄마를 모셔 주기를, 우리 모두는 바랐어요. 큰아들로서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누구 하나 그 얘기를 꺼내지는 못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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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무심한 큰 오빠네는 아무런 언질도 없더라고요. 당신이 하느님처럼 어려워하고

떠받들던 큰아들네 집 대신, 엄마는 둘째 언니의 집으로 잠시 피신을 가셔야 했답니다. 멀리 산다고

저도 열외가 될 수는 없었겠지만,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화딱지가 돋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니까요.

‘세상이 급박하게 변했다고, 오빠 세대에 당연시되던 일을 헌신짝 내버리듯 내팽개쳐 버리다니. 삼일

동안만 여동생의 돌봄을 대신하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웠을까요? 저는 지금도 용서가 안 돼요!’


마지막 구절은 차마 부끄러워 꺼내질 못했다. 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화살이기도 했으니까.

원장님은 고객의 맞장구에 얼마나 위안을 얻었을까, 속이 후련할까...... 아무리 이해심이 깊기로, 직접 모시지

않는 한, 그 고충을 이루 다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 고금의 진리인 거 같다고

자학에 가까운 위로를 건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위로를.


편찮으신 어머니라도 곁에 모실 수 있는 원장님이 부럽기만 한데요, 중얼거리던 나. 허허로웠다. 면회라도

갈 수 있다면. 엄마 손을 잡고, 시선을 맞추고는 엄마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었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

고마워요,라고. 평소엔 부끄러워 차마 하지 못했던 말, 그때 못하면 영영 할 수 없는 말......

뭐라도 만들자. 텅 빈 시간을 채워 보자. 퀼트가게에 들러 가방 패키지 하나를 구입했다. 품이 많이 들긴 해도

애착을 떨쳐버릴 수 없는 손바느질. 완제품 사진이 어느새 틈을 비집고 와, 뇌리를 점령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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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도 들러야 했다. 쌀과 야채를 이것저것 골라 담아 배달을 시켰다. 집에서 좀 떨어진 마트인데 무료로

배달해 준다. 집에서 가까운 마트는 배달료를 이천 원씩이나 받는다. 예전에는 오만 원 이상 구입하면 거저

배달해 주었는데. **시장에서 거의 독점인 마트가 건물까지 새로 올리더니 돈독이 올랐는가 보다고,

여기저기서 비난이 들리지만, 아랑곳 않는 마트. 그 뒤부터는 소소한 것들만 거기서 구입하고 여기저기

분산해서 장을 보기로 했다. 배달업체가 호황을 누린다고 덩달아 배달료를 받다니. 인건비 때문이라고

하지만, 너무 계산적인 거 아닌가 말이다. 그래도 그 마트는,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배달료 도입에

전혀 이의가 없는 고객들도 많은지, 지나다 보면 상품을 바리바리 실은 카트가 열을 지어 서 있다. 배달료라 하면 몸이 먼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고객의 한 사람으로서, 그곳에 배달을 시킬 일은 당분간 없을 것 같다. 적어도 배달료에 대한 면역이 생겨날 때까지는.


이래저래 용무를 보고 왔더니 팔천 보를 훌쩍 넘겼다. 즉시 포인트 확인에 들어갔다. 포인트 백 점 확보!

예전에는 날을 넘겨도 포인트를 주더니, 이제는 자정이 지나면 ‘없었던 일로 해 주세요’가 되어버린다.

야박해졌다, 마트도 서울시도. 그럴망정 열심히 걸어 포인트를 확보하겠노라고 다짐애 다짐을 거듭한다.

거저 주어지는 것은 공기와 햇빛 말고 별로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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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새치에 놀라 기절할 지경인 모습을 상징적으로,,,, 우: 새치에 익숙해지려 애쓰는 모습


저녁 식사 준비 말고는 휴일의 미션을 깔끔하게 완수했다. 미션 올 클리어! 일하는 게 더 편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평일의 거리를 활보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오랜 숙원 사업인 새치 감추기

작전에 성공했으니 두어 달 정도는 안심이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불쑥 비어져 나온 새치를 처음

발견하던 그때, 숭어처럼 펄쩍 뛰어오르며 뽑아내려 애쓰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얼마나 순하고 유해졌는지. 늘어가는 새치를 뽑기보다 짧게 자르라던 원장님의 말은 옳았다. 탈모로 고민하는 사람들도 가뜩이나

많은 요즘, 한 오라기 새치라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맞겠지......

코팅된 머리카락이 함치르르 윤이 난다. 쓰담쓰담, 자꾸만 쓰다듬어 본다.





*그림은 요즘 핫한 제미나이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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