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장을 뒤져 발열내의를 찾는다. 양말도 두꺼운 등산양말로 신는다. 두 눈만 빼꼼 내놓고 모자와 머플러로 얼굴을 감싼다. 옆구리에 칼만 없다 뿐이지 영락없는 검객이다. 밤새 사납게 우짖던 바람은 아침이 밝았는데도 좀처럼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런 날 추위와 맞서려면 단단히 무장을 해야 한다. 폼이고 뭐고 다 소용없다. 따뜻한 게 제일이다. 중무장 탓인지 몸이 좀 둔하다. 가 보자, 시베리아 고기압의 드센 콧김을 뚫고. 안장이 차갑다. 헌 옷가지로 대충 덮고 앉는다. 뻐등뻐등한 체인을 몇 차례 돌려 본다.
'너희도 준비운동이 필요하겠지? 오늘도 잘 부탁해'
'네, 좋아요.'
무언의 신호가 오가는 틈에도 찬바람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각오는 했지만 무척이나 매서운 칼바람이다. 촘촘한 머플러 틈을 잘도 뚫고 들어온다. 걸러진 바람은 입김과 엉겨 머풀러 안쪽을 적셔들고, 차츰 물기가 맺히더니 입과 턱 주위에 선뜩한 냉기가 번진다. 그리 유쾌할 수 없는 순간이다.
무릎도 시려온다. 발도. 손도. 머리는 땀이 좀 난다. 자전거를 그냥 놔두고 올 걸 그랬나 후회가 인다. 시베리아 콧김이 세긴 세다. 그래도 빠르다는 장점이 있어 겨울에도 웬만하면 자전거를 타고 다니게 된다.
자전거로 출퇴근한 지 몇 해가 지났다. 이젠 제법 익숙해졌지만 눈비 오는 날만큼은 그 익숙함도 무용지물이다. 왼 손에 우산, 오른손에 핸들을 잡아야 하니 주의가 분산되고 손목에는 갑절로 힘이 들어간다.
게다가 바닥도 미끄러워 앞바퀴는 오른손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려 드니, 아침부터 통제 불능의 상황과 마주하면 하루의 에너지 중 반 정도를 소진하고 만다. 그 나머지로 하루를 보내기는 좀 무리인 듯싶음에, 그런 날은 차라리 걷는 걸 택한다.
평소 씽씽 달리던 길을 걷다 보면 걸음이 유독 굼뜬 것 같아 조바심이 일고, 그런 와중에도 우산을 든 채로 쌩쌩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이들이 눈에 띈다. 주로 남자들-아저씨나 남학생들이다. 거침없는 그들의 질주가 한없이 부럽긴 해도, 묘기에 가까운 비 오는 날의 경륜경기를 감히 흉내 낼 자신은 아직껏 없다.
학창 시절, 이 좋은 자전거를, 나는 타지 못 했다. 탈 수가 없었다. 배우려 노력은 한두 차례 해 보았다. 좀 상태가 안 좋은 자전거로 포장도로를 몇 번 오가는 데까지는 어찌어찌 성공했다. 버스가 지나가면 가만 서 있다가 가고 나면 다시 가고를 반복했다.
자신감이 조금 생기자 커브를 틀어보고 싶어졌다. 운동장도 아닌 이차선 도로에서 자전거 초보가 커브를 연습하다니, 바보 멍청이! 겨우 핸들을 틀었나 싶던 찰나, 고물 자전거와 나는 한 몸이 되어 논가의 고랑에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진흙탕물 세례를 온몸에 받고 고물 자전거를 끌고 오는 모양을 몇몇 동네 사람들에게 무료로 관람시켜드려야 했다. 창피하여라!
괜찮다. 몇 번만 더 고랑에 처박히면 잘 타게 될 거야.
아버지, 저더러 그 수모를 몇 번 더 겪으란 말씀이세요? 창피해 죽겠는데.....
결국 몇 번의 창피를 겪기 싫어 더 이상 시도를 하지 않았고 어른이 되어서야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그래서 멀고 먼 학교를 주욱 걸어 다녔다. 발에 땀이 나도록 걸어야 지각을 면할 수 있었으므로 지름길을 택해 걸었다. 논두렁을 수도 없이 지나고 꼬불꼬불 산길을 올라 고개를 넘는 코스였는데 문제는 여름철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잎에 이슬이 맺혀 있는, 좁은 길을 헤치고 가노라면, 이슬과 흙먼지로 운동화는 금세 엉망이 되었다. 사정도 모르는 친구 하나가, 운동화를 빨지도 않는가 보다고 흉을 보기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그래도 걷는 동안 자연은 사시사철 멋진 풍광으로, 경이로운 속삭임으로 내게 보답해 주었다. 써레질이 끝난 논은 하늘, 구름, 산봉우리를 고대로 품었다가 무릉도원에서 느낄 법한 충일함으로 나를 이끌었고, 낙엽이 수북이 쌓인 야트막한 산기슭을 지날 때면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내게 말을 건네기도 하였다. 지금도 생각나는 고갯마루의 바람! 그 바람은 땀방울을 0.1초 내로 식혀주기에 충분할 만치 시원 상쾌했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배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도 하고 시장도 간다. 기동성이 생겨 참 좋다. 건강도 챙기고, 지구도 살리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으니 일석삼조다. 언젠가 한강 자전거 도로를 타고 암사에서 여의도까지 갔다 온 적도 있다. 팔당 대교 근처까지도. 예전에는 감히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날개를 얻었다, 나의 날개, 자전거를. 어른이 되어서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