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령 부리기 대마왕

by 나탈리

저는 잔소리 대마왕이라고 합니다. 결혼이라는 불완전한 계약을 성실히 이행하던 중에 태어나 저를 엄마라 부르는 아이가 붙여준 별명이지요. 불만은 없습니다.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라죠, 뭐. 제 별명은 이것 말고도 많아요. 배수빈(엄마한테 배수빈이라니, 배수빈 배우님 화내실라), 루저(키가 작다고. 그래도 160은 넘어요), 비실이(요즘 살이 자꾸 빠지네요.)..... 앞으로도 계속 생겨나겠죠?


별명은 참 요긴해요. 이름은 가물가물해도 별명은 금세 생각나니까요. 물론 장본인으로서는 불쾌한 별명도 있겠지만, 어디 아이들이 그런 거 따지며 별명을 붙이던가요? 어렸을 적 저의 별명은 '우렁'이었어요. 지금의 '집순이'랑 거의 같다고 보시면 될 거예요. 그저 돌아다니기보다 집에 있는 걸 좋아하다 보니 아버지께서 그리 부르셨어요. 제가 어딜 가려고 나서면 '우렁이 밖에 나가면 비가 오는 날'이라 하시며 놀리셨어요. 울 언니는 한 술 더 떠, 등 뒤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어요.

쉬 이, 우렁이 행차시다, 길을 비켜라!


제가 이렇게 별명이야기로 서두를 뗀 데는 이유가 있답니다. 이름보다 별명이 더 어울리는 듯한 사람들이 가끔씩 기억의 그물을 뚫고 나와, 제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 하네요. 전 과감히 그들을 '요령부리기 대마왕'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동료들 중에는 '그저 열심당'이 있고 '합리적 효율당', '요령터득당'이 있어요. 그저 열심당 당원들은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몸을 사리지 않고 일해요. 합리적 효율당은 머리가 좋아요. 일의 흐름을 읽어내어, 힘을 덜 들이고 최대의 효과를 얻어내지요. 요령 터득당은 터득한 요령을 발전시켜 요령 부리기를 시도 때도 없이 해요. 요령터득당의 당주가 되고도 남을 사람, 요령 부리기 대마왕은 어디든 (어느 직장이든) 꼭 한 사람씩은 있더라고요.


애석하게도 저는 합리파도 아니고 요령파도 아닌 그저 열심파로, 만날, 힘들다 아프다 푸념하다 남편에게 미련하다는 핀잔을 자주 들었어요. 남들 하는 것 봐서 쉬엄쉬엄 하라는 거였어요. 천성인 거 같아요, 미련퉁이 같은 것도. 일에 합리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요령 피우는 것도 아무나 못하겠더라고요. 아무나 못하는 그 일을 밥 먹는 것보다 더 쉽게 해내던 그들을 존경합니다.


요령 부리기 대마왕님들, 저를 제자로 삼아 주세요!


그중 으뜸인 '호야 대마왕'은 건장한 젊은이였어요. 힘도 잘 쓰고 기계도 곧잘 손보고 해서 우리로부터는 존경을, 실장님으로부터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요. 실장님은 그를 관리직원으로 키우고 싶어 하셨어요. 처음 그는 일도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힘이 드는지 차츰 요령을 부리기 시작했어요. 틈만 나면 복도에 나가 쪼그려 앉아 쉬는 그를 실장님은 수없이 마주쳤지요. 잘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많이 하셨어요.


그래도 호야 대마왕은 잘리지 않았어요. 호야대마왕은 나름 사람들 비위도 잘 맞출 줄 알았기에, 보통 직원보다 호야대마왕 같은, 일 잘하는 요령파를 잘 구슬리기만 하면, 오히려 회사로선 이익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가끔 전문가가 필요할 듯한 어려운 일을, 일단 시켜놓으면 척척 해내기도 했으니 실장님으로선 갈등 느낄 만도 하지 않겠어요?


어쨌거나, 힘이 달려 못 하는 거랑 안 하는 거랑은 다른 탓에 그는 동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렸어요. 덩치가 아깝다, 나잇값도 못한다 등등. 요령 피우며 시간 가기를 기다리기보다 일에 몰두하는 것이 더 '시간 죽이기'에 효율적이란 것을 그도 모르지는 않았을 거예요.


'당신을 요령 부리기 대마왕으로 인정합니다!'


그는 먹는 데엔 요령을 피우지 않았어요. 온갖 맛집을 다 섭렵하고 다니는 모양으로 회식 때 장소는 거의 그의 추천으로 정해지곤 했지요. 육해공을 아우르는 그의 식성은 놀라움 그 자체였어요. 왕성한 식성에 넉살까지 수준급이었죠. 먹는 데 진심인 그를 아무도 못 말렸어요.


외식을 하기 위해 그는 동료들에게 돈을 자주 빌렸어요. '외식'을 위해서요. 주머니는 비었고 급여일은 좀 남았는데 뭔가가 간절히 댕기니 빌려서라도 먹고 말겠단 거였어요. 어찌 생각하면 좀 창피할 수도 있는 사실을 태연하게 말하던 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동료들은, 여기저기서 빌리고 갚고를 되풀이하던 그와 더 이상 돈거래를 하지 않기로 다짐을 했어요.


그는 아침을 먹고 출근했다면서도 배가 고프다며 편의점에 가 빵을 사 먹고는 했어요. 볼일도 하루 세 번씩 본다고, 묻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말을 해대는 그. (치마만 두르면 영락없는.....) 말은 많아도, 치고 빠지는 순간을 정확히 알아 직장에서의 수명은 길었어요. 사회생활은 그리 해야 된다고 다들 이구동성이었죠.


그의 눈동자가 생각납니다. 온순한 듯하면서도 능청스러이 궁리를 숨기고 있는 눈빛. 마왕님! 지금도 혹 '열심'이신가요? (설마, 아니겠지요.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믿고 싶어요!) 뭐가 '열심'이냐 물으신다면 그저 웃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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