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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Jan 16. 2023

정갈한 하루

하숙 씨의 정갈한  하루


햇살이 마루 가득 놀러 왔다. 토요일의 아침. 집이 동향이다 보니 겨울날 아침나절에는 이런 호사를 다 누린다. 벽도 커튼도, 소파도 금분을 입어 찬란하기만 하다. 마룻바닥에 떨어진 과자부스러기도  먼지 한 톨까지도  헤아릴 큼  밝아 부담스러울 정도..... 햇살이 걸음을 틀기 전에 얼른 할 일을 마쳐야 한다. 휴일의 느긋함을 누려 보겠다고 한껏 게으름을 부리다, 아홉 시가 훨씬 넘어서야 이불을 탈출했다. 부리나케 청소기부터 찾는다. 가능한 한 빨리 태양의 감독 아래 대청소를 할 요량으로.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청소기부터 돌리기 시작했다. 먼지가, 먼지가 왜 이리도 많은지. 겨울이라 창문을 꼭꼭 닫아 놓아서 그런가, 오늘따라 먼지가 무지 많은 것 같다. 먼지가 없으면  아름다운 노을도 없을 거라 했지만,  그래도 청소기에 쓸려가는 이런 먼지는 영 달갑지가 않다.


아이들 방은 일단 제쳐 두고  거실과 안방만  돌렸다. 무료하숙생들(?)이 잠을 방해받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탓이다. 하숙생들은 올빼미족이라 늦게 잠들고 대낮까지  꿈속을 헤맨다. 나중에 제 알아서 하겠지. 그러 결국, '깨끗한 척 혼자 다하는'  하숙집 아짐이 할 때 많다.


서랍장, 책꽂이, 화장대 등등 먼지가 머무르기 좋아하는 장소는 기본이고 바닥까지 힘주어 닦았다.  뽀샤시해진  마루와 방. '그래 이 맛이야!'가 절로 나온다. 세탁실과 현관도 물걸레 세례를 받아 말끔해졌다. 다음은 베란다 차례. 화분에 물부터  주어야지. 흙내음이 싸아하다. 화분 사이를 비집고 걸레질 하고, 고무나무와  군자란의 시들거리는 잎새도  솎아 주었다. 마지막, 욕실이 남았다. 청소용품을 챙겨 들고 막 들어가는 찰나, 방해꾼이 생겼다.


"나 씻어야 되는데......"

딸내미가 약속이 있단다. 두말 않고 비켜 주었다. 약속에 늦으면 절대 안 되지, 청소야 좀 늦으면 어떠리오. 안방 화장실 먼저 하자......  아참, 음악을 준비하고!

다른 곳은 몰라도, 욕실을 청소할 때만큼은 음악이 반드시 필요하다. 방이나 거실 등은 한바탕 청소기를 돌리고 먼지를 닦아내면 끝이지만 욕실은 다르다. 물청소를 해야 한다. 물청소는 시간과 노력 갑절로 들어, 가속을 붙무언가 강력한 연료가 간절해진다.


'키신의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드는 의욕을 소생시키는 최상급 연료 되어 주었다. 주빈 메타 님의  지휘로 오케스트라의 힘찬 연주가 시작되면, 세면대에 비눗물과 락스를 섞고는 단원의 일부라도 된 양, 부드럽게 휘젓는다. 타일벽을 닦으며, 오케스트라 연주 어디쯤에서 그의 피아노 연주가 시작되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청소 중에 만끽할 수 있는  혼자만의 즐거움이었다. 물론 정신없이 청소에 몰두하다 보면 모르고 지나갈 때도 많았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얼거린다.



키신 님, 그리고 쇼팽 선생님! 미안해요. 청소 끝나고 정식으로  감상할게요.


선율에 맞춰, 비누 거품으로  단장면을 샤워기로 씻어낼 때의 그 청량감이란!  머리카락도 수건의 보풀도 먼지도 다 씻겨 내려간다. 터럭 한 오라기도 허용할 수 없다. 샤워기를 한바탕 휘두르고 거울과 변기의 물기를 닦으면 청소 끝이다. 물기가 다 마를 때까지 문을 활짝 열어 두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느 때처럼, 욕실이랑 안방 화장실까지 청소를 마칠 즈음,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3악장이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끝났다. 뭔가 미진한 느낌......  그러고 보니, 아이들 방이 남았다. 방 주인 나갔겠다, 맘이 동하는 김에 해치워야지. 아이들 방에는 잡동사니가 차암 많다. 눈곱만 한 인형부터  화장품, 엽서,  목걸이,  반지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구질구질 것을 뭐가  좋다고 모으는고.....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차례대로  옮기며 먼지를 닦아 주었다.


소지품의 위치가 달라져 있으면  성을 내는 딸아이(내겐 너무 까칠한 상전!). 교육을 잘못 시켰다 해도 할 말 없다. 나중에 해 주고 싶어도 못 해 줄 때가 오면..... 지금 이 순간이 그리워질 수도 있을 테고...... 아이들 방까지 다 마치니 세상 개운한 것이 날개옷이라도 입은  것 같다.  어디 또 치울 데가 없나,  매의 눈으로  훑어본다. 이러다  또 '청소의 신'이 강림하실라. 가끔씩 청소의 신이 강림을 하면 누가 나 좀 말려 줬음 싶을 때까지  쓸고 닦고, 또 쓸고, 닦은 데 또 닦아야 한다. '분홍신을 신은 아이'처럼, 마음대로 멈춰지지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몹시 피로해진다.


'그만하면 충분하답니다, 이리 오세요.'

다행히도 햇살이  불러 세운다. 안광레이저를  거두기로 하자. 따뜻한 차를 한 잔 타 들고  발꿈치만 보이는 햇살 곁에 다가서 본다. 사방을 둘러봐도 영혼까지 깔끔해지는 느낌.....  

날마다 오늘처럼만 정갈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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