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퇴근이다. 후닥닥 뒷마무리 후 쏜살같이 달려 버스에 오른다. 백 미터를 17초 대로 기어가던(?) 사람의 움직임으로는 안 보일 만치 재빠르다. 피곤한 눈을 쉬어 주려 눈을 감는다. 소록소록 피로가 밀려오는가 싶더니 가수면 상태에서 꿈을 꾼다. 복잡하고도 논리 정연한 장면들이 한없이 펼쳐졌다, 사라지고는 한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자동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는 졸음에 겨운 눈꺼풀이 열리고 또다시 세상으로 충실히 걸음을 옮겨 본다. 가로등 불빛 아래 하늘거리는 패튜니어가 새삼 반갑다. 비가 내리면 고개를 있는 대로 수그려 처연미가 넘쳐나는 모습으로, 맑은 날은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삶에 지친 행인의 마음가를 수놓는 패튜니어가 마냥 사랑옵다.
내일은 무슨 반찬을 해야 하나, 궁리에 골몰하며 파장이 가까운 시장의 여기저기를 훑어본다. 출근길, 하늘가에서 주운 초승달이 호주머니를 탈출하려 꼬무락거린다. 가만있으렴, 집에 가면 어련히 알아서 꺼내줄까. 좁은 호주머니에는 이것저것 구겨 넣은 게 많다. 더위가 한풀 꺾인 요즈음도 여전히 민소매 차림으로 출근하는 출근길의 이름 모를 동행, 폐지 줍던 등 굽은 어르신, 멋지게 차려입고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앞서 걷던 여인, 담배 연기로 저만치 돌아가게 만드는 애연가 아저씨들, 바람결에 떨어져 발길에 짓뭉개진 산딸나무 붉은 열매들, 눈빛을 반짝이며 꼬마애들을 부르건만 예전처럼 인기가 없어 안타까운, 하얗고 붉은 봉숭아꽃들......
묵직한 야채와 과일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호주머니의 손님들을 다독이며, 얼른 가서 씻고 요기를 한 다음 초승달을 꺼내줘야지, 마음은 바쁜데 발길은 더디기만 하다. 오늘만큼은 절대 바로 쓰러지지는 말자, 다짐이 단단히도 엉겨 가는데, 거실 풍경이 모든 게 여의치 않음을 일깨워 준다. 반라의 상태로 누워 TV를 보던 남편이 흘낏, 눈길을 한 번 주고는 다시 TV삼매경으로 빠져든다.
뉴스에서는 앵커가 좋지 않은 소식들을 큰 소리로 쏟아내고 있고, 덩달아 기분이 좋지 않아져 소리 좀 줄여 달라 힘없이 부탁해야 했다.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야 한다는 남편은 날마다 뉴스를 성실하게 시청한다. 일단 정치는 제쳐 두고, 요즘 들어 부쩍 많아진, 험한 뉴스에 분개하며 같이 분개할 것을 종용하는 듯, 나를 연신 불러 댄다. 석 달 가까이 야근을 해 온 아내에게 이리 와서 같이 스트레스를 쌓아가자 권유를 하는 셈이다. 식사를 했냐고 물어도 건성으로 대답하고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뿐인가, 어떤 날은 마누라와 같이 먹겠다고 식사를 안 하고 기다리고 있다. 얼핏 배려 같지만 그건 배려가 아니었다. 야근 끝나고 집에 오면 아홉 시가 다 되어 가는데, 그때서야 식사를 하면 언제 소화를 시키고 잠에 든단 말인가. 대개 그런 날은 소화도 안 된 상태로 졸음에 항복하기 일쑤인데, 배려가 지나치다 못해 건강이 우려스러운 날이 아닐 수 없다. 가볍게 요기하고 몇 줄이라도 써 보리라던 계획은 그런 날, 꿈에서나 실현 가능할 것이었다.
오늘은 그날이 아니라 다행이다 싶었는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방에서 벌레가 발견되었다며 울상을 하는 작은딸! 낮에 제 방에 청소기를 돌리는데 벌레 한 마리가 침대 밑으로 사라졌다지 뭔가.
아니, 뭣이라? 벌레? 여인과 벌레는 천적이나 마찬가진데, 음, 벌레, 너 오늘은 운수 사나운 날이 될 거야. 기어이 오늘 너를 잡고 만다. 석 달 야근이 뭐야, 피로가 대순가.
용감무쌍하게 소탕 작전에 나섰다. 수납식 침대라 일단 서랍부터 빼야 했다. 멀찍이 섰는 딸에게 걸리적거리는 소품들을 치우라 명령했다. 스탠드, 자그만 탁자, 과자 보따리를 문께로 피신시키고 걸레와 물티슈를 대령하는 딸내미. 서랍을 빼냈다. 먼지구더기 속에서 딸내미가 사 모은 아이돌 굿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돌돌 말린 브로마이드, 앨범, 사진, 스티커 등등. 먼지가 엉겨 붙어 변색된 것도 보였다. 기겁을 하는 아이.
놀랄 짬도 없었다. 버려라, 제발 비우고 버리고 살자, 이 잡다한 것을 언제까지 껴안고 살 거냐. 잔소리를 한가득 장전, 연타로 발사하면서 침대 해체작전을 수행했다. 매트리스는 무거워 도저히 혼자 들 수 없었다. 방관자처럼 서 있던 딸내미와 힘을 합쳐 겨우 한쪽으로 매트리스를 세워 놓았다. 묵직한 상판 하나를 들어냈다. 서랍 너머에도 뭔가가 빼곡히 들어 있다. 역시나 먼지와 한 몸이 된 세븐틴, 샤이니 굿즈들과, 고교 시절 풀던 수학문제집을(여지껏 지니고 있다) 마저 치운 순간, 검고 동그란 물체가 눈에 들어온다. 다행히도 핵폭발에서도 살아남는다는 '그놈'은 아닌 듯했다.
그놈은 위험을 감지했는지 재빨리 기어, 침대 프레임에 찰싹 달라붙는다. 정체가 뭔지 알아낼 틈도 없이 천혜의 무기-오른손을 내리쳤다. 징그럽고 더러운 건 둘째다. 이것이 번식하여 수가 불어나면 골치 아프다. 오로지 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 차례, 빗맞았을까 싶어 두세 차례 내려쳤다. 대성공이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얼른 빨리 물티슈를! 외쳐댔다.
와아! 아이가 환성을 질렀다. 벌레는 잡았고 일단 안도했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쓸고 닦고, 또 닦고 이왕 해체한 김에 매트리스 커버도 갈고 침대 패드로 갈고, 잔소리도 마저 해야 했다.
'천지가 개벽해도 꼭 간직하고 싶은 것만 남기고, 버릴 건 버리고 정리하고 살아라, 자꾸만 쌓아 두면 좀이 슬고 벌레의 서식처가 되기 마련이다.'
웬일로 아이는 고분고분 변색되고 얼룩진 굿즈들을 현관 쪽으로 내놓았다. 그것들은 그래도 많았다. 버린 건 빙산의 일각일 뿐. 남은 것들도 마저 정리했으면 하고, 당근에 팔지 그러니? 했더니만, 요즘 애들은 이 아이돌 안 좋아해, 이런 말로 일축한다.
벌레 소탕을 끝내고 나니 또 하나의 할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내일, 주문한 식탁이 새로 오는데 삐걱거리는 식탁을 치워야 한다는 큰애의 말. 아참! 그랬었지. 낮에 치우기보다 한갓지게 지금 하자고 팔을 걷어붙였다. 탁자를 큰애와 둘이서 들어 엘리베이터에 싣고 네 개의 의자는 작은애가 갖다 나르고, 두 번에 나누어 가자는 것을 식탁 위에 올려 어찌어찌 싣고 한 번에 내릴 수 있었다. 세 모녀는 낑낑거리며 식탁과 의자를 무사히 내놓고 배출딱지를 붙여 인증사진까지 찍었다.
엄마 너무 힘들다. 팔 아파.
가녀린 팔목을 흔들며 아이들이 말했다.
엄마도 힘들어, 야근하고 온 몸이야. 한 밤중에 이 무슨 난리라니?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먹자. 아이들이랑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아파트 주위를 걸었다. 발갛게 상기된 큰애의 얼굴이 안쓰럽다.
아빠는 뭐 해?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옮기는데?
불만 가득한 작은애.
우리끼리 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
큰애는 고개를 훼훼 젓는다. 괜히 도와 달랬다가 아빠의 잔소리가 길어지면 급 피곤해진다.
아빠가 요즘 이(齒)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 그래, 이해해.
이러는 엄마도 속은 까맣다. 가장이 되어가지고 아내와 딸들이 힘들여 가구를 옮기는데 어찌 손 하나 까딱 안 할 수가 있을까? 아무리 치아 대공사가 들어갔기로, 음식 씹는 게 어렵다고 같이 들어주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가?우리 세 모녀를 연단시키려 함인가?
우리가 문제인가? 그가 문제인가? 하여튼 무언가가 어그러진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끼리 한바탕 속풀이를 하고 와도 그의 자세는 변함이 없다. 분개할 뉴스가 아직도 그리 많은가. 여기 분개하는 세 여인의 숨소리가 느껴지지 않는가. 석 달 야근으로 피로에 전 몸으로, 한밤중의 대작전을 두 차례나 수행했다. 이봐요, 가장 님! 당신도 힘들지만 나도 힘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