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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Oct 30. 2023

영화관을 탈출하라

문화의 날, 시트콤 한 편

아빠가 오펜하이머에 흥미를 느끼신 듯하여 예매를 했다. 추석을 앞둔 수요일, 마침 문화의 날이고 집 근처에 CGV영화관이 있어 퇴근 후 문화생활에 안성맞춤이었다. 가족 단톡방에 티켓을 올려놓고는 신신당부를 했다. 늦지 않게 8시 30분까지 입장해야 된다고. 엄마는 6시 퇴근이라 문제가 없었는데 산에 가신 아빠는 언제 올는지 기약이 없었다.


"아빠에게 전화 좀 해 보렴"

"엄마 남편이니까 엄마가 해 보세용"


서로 미루다 성미 급한 엄마가 전화를 해, 무조건 얼른 빨리 후딱! 오십쇼잉? 채근을 하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유롭게 여덟 시가 다 되어 귀가한 아빠는 영화관도 식후경을 주장하시니, 엄마는 한숨을 삼키며 저녁을 차렸고, 한국인답게 금세! 식사를 마친  두 분은 8시 20분쯤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만약에 핸드폰에 캡처된 표가 안 된다 하면, 키오스크로 인쇄해야 돼. 안 되면 전화하세요? 아빠는 몰라도 엄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아니나 다를까, 십여 분 후에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인쇄를 하려는데 키오스크가 잘 안 된다고. 몇 분 간 실시간으로 기계와 실랑이하는 엄마, 옆에서 훈수를 두는 아빠의 잡음이 계속됐다. 안 봐도 훤한 상황. '이를 어쩐다? 기계치 엄마와 그보다 더 기계에 원시적인 아빠를..... 같이 가서 티켓팅을 해 드리고 왔어야 했나, 힘들면 직원에게 도움을 청하시지는......'


고민과 자책이 광속으로 뇌를 흔들어대던 중, '됐다'는 엄마의 소리는 그야말로 춘야희우(春夜喜雨)였다. 아싸! 이제 엄마 아빠는 영화관으로 보내드렸고, 나는 내 일에 몰두하면 된다. 엄마 아빠는 영화가 끝나는 시간까지 영화관에 계실 것이다. 조용히 작업을 하고 싶었다.


아빠는 울림이 큰 성대를 타고나셨음인지 목소리가 무척  크다. 커도 단순히 큰 게 아니고 보통으로 얘기를 해도 목소리가 확성기를 쓴 것처럼 울려 퍼진다. 그러니 아빠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조용한 장소로 피신해야 했는데, 방에서 이어폰을 끼고 작업을 해 보아도 아빠의 음성은 이어폰을 뚫고 들어왔다. 엄마가 곁에서 맞장구를 쳐 주지 않으면 그래도 좀 나았다. 엄마의 추임새는 아빠의 수다를 이어가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듯했다. 한 분만 보내드리면 심심하실 거고, 두 분 다 영화관으로 보내드렸으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아 그런데 말입니다! 각본대로라면 열두 시가 넘어 오셔야 될 두 분이, 실망스럽게도 열 시가 좀 지나자 터덜터덜 오시는 거였다. 럴수 럴수 이럴 수가! 역시나 인생의 묘미는 변수, 변수였다. 왜 영화도 다 안 보고 오셨나 물었더니, 당황한 엄마, 아니, 어떻게 알았지? 하신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한숨, 한숨......


"영화가 한 시간 반 정도 할 줄 알았더니, 끝이 없더라고. 그리고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지 뭐야. 원래 영화관 소리가 그렇게 컸나? 엄마는 말이야,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틀어막고 봤단다."

다 보고 온 척(!) 연기하려던 엄마,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아이처럼 겸면쩍어하며 변명을 하신다. 나는 아빠에게 취조의 방향키를 틀었다.


"엄마는 그렇다 쳐도 아빠는? 아빠가 그 영화를 무척 보고 싶어 했잖아"

"그랬는데 좀 지루하더구나. 과학자 수학자들은 수도 없이 많이 나오더라만, 핵폭탄을 만드느라 분주한 장면만 계속되고..... 영화가 길고 소리 너무 커서....... TV프로에서 소개할 때 얼핏 볼 땐 재미있어 보였는데."

이어, 아빠의 변명을 거들어 주는 엄마.

"계속 봤다간 이명(耳鳴) 생기겠더라. 그렇잖아도 에어건(air gun) 많이 쏴서 이명 증상이 좀 있는데. 그래서, 영화관을 탈출하라! 는 몸의 엄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단다. 딸내미가 일부러 생각하고 엄마 아빠 문화 생활하시라 예매해 주었는데, 미안해서 이를 워째?"

'어쩌긴, 할 수 없지. 조용히 계시길 기도하는 수밖에......'

엄마 아빠가 영화관을 탈출하는 장면이 슬로비디오로 뇌리를 스쳐갔다. 너무 스피커에 가까운 쪽으로 예매를 했나 싶기도 하고, TV 말고 문화생활과 동떨어진 엄마 아빠가 좀 안 됐기도 하고, 하여튼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두 분은 브래드 피트 주연의 '트로이' 이후로 여태까지 영화관 데이트를 해 본 적이 없다. 안 한 건지 못 한 건지는 모르겠다. 나랑 엄마랑은 '쥬토피아', '마당을 나온 암탉'을 같이 보았었다. 또 동생이란 셋이서 동화 같은 영화를 몇 번 보았던 기억이 난다. '오즈의 마법사', 그리고 펭귄이 나오던 무슨무슨(제목이 뭐였더라?) 영화였다.


엄마는 싸우고 다투고 죽이는 영화는 싫고, 스릴러도 싫고, 판타지도 별로라 하신다. 아빠는 그렇지 않은데 엄마는 영화 취향이 까다롭기가 이를 데 없다. 엄마의 슬기로운 영화생활을 인도해 줄 분은 정녕 유튜브와 TV밖에 없는 걸까? 시트콤 같은 하루를 마감하며 아빠랑 엄마의 영화관데이트도 가끔 주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다음엔 실패하지 말자, 절대!

휴우, 영화관을 탈출하신 아빠 엄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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