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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Oct 29. 2023

주인공이 되고플 때 읽는 책

하쿠다 사진관- 독자 후기

어른이 되고 싶은 때가 있었다. 얼른 자라서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 생각에 몰입하면 할수록 시간은 뒷걸음질 치듯 느릿느릿 흘러갔다. 시간이 흐른다고 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닌데, 덩치만 어른인 사람들도 많은데, 어린 마음에 체격은 곧 어른이란 공식을 세워 놓고 있었나 보다. 덩치만 크면 세상의 불합리와 어떤 어려움과도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줄 알았던가.


하쿠다 사진관에는 어른애들이 많이 나온다. 생의 과제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항복한 어른애들. 항복은 슬픔이란 납덩이가 되어 그들을 짓눌러 온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들은, 내면의 어린애를 달래지 못하는 어른애로 진정한 웃음을 잃은 채 살고 있다. 일상을 영위하려 해도 불쑥불쑥 목을 조여 오는 슬픔을 안고 사는 어른애들.


여동생과 아버지를 바다에 잃고 만 석영, 연인에게 버림받고 홀로 아이를 낳아 보육원에 보낸 제비. 그들은 하쿠다 사진관의 사장과 직원으로, 아픔을 지니고 사는 이들의 순간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분투를 한다. 자신의 아픔은 뒤로 한 채 고객의 온갖 요구를 충족시켜 주며 하쿠다 사진관을  살려나가는 열정! 그 열정의 한가운데에는 아이를  떨쳐낼 수 없는 제비의 슬픔이 있고, 여동생과 아버지를 잃은 석영의 슬픔이 있다.  


벼랑 위의 하쿠다 사진관은 제주에 뿌리내리고픈 석영의 분신이라 할 수 있겠다. 삶이라는 벼랑 위에서 힘겹게 외줄 타기를 하던 석영은 괸당이 되기 위해 아이가 있는 과부 양희에게 접근하지만, 양희는 그를 번번이 밀어낸다. 그러면서도 석영이 아들 효재와 어울릴 여지는 내어주는데, 이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픈 어미의 작은 배려로 보인다.

석영은 미래일기를 쓰며 효재의 아버지가 되기를 꿈꾸는데, 양희는 상처에 갇혀 좀처럼 마음을 열 줄을 모른다. 양희를 괸당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에 앞서 석영은 사랑의 키를 찾았어야 했다. 양희를 가로막고 있는 견고한 빗장을 풀어 줄 사랑의 키를. 사랑에 서투른  어른애, 석영......


제비의 등장으로 석영의 외줄 타기는 한결 수월해진다. 제비와 함께 개성이 뚜렷한 고객들을 위한 성대한 잔치(잔치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 읽어 보면 안다)를  몇 번 치러내고 하쿠다 사진관은 제주의 핫한 여행지로 유명세를 타게 된다. 제비의 SNS를 이용한 마케팅 효과도 무시할 순 없지만, 사진전 수상 작가인 석영의 실력과 수준급인 음식솜씨, 거기에, 아픔을 지닌 이들에게 숙소를 내어주며 그들의 속내를 털어놓게끔 만드는 석영의 친화력이 큰 몫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달리는 라이더의 뒷좌석에서 목숨 건 촬영도 감수하고, 스쿠버다이빙하는 고객들을 촬영하기도 하는 석영. 주문에 맞게 힙한 사진으로 파경 직전의 신혼부부를 구해주, 도도한 지질학자에게 새로이 학술 사진도 배우는 등, 적극적으로 업에 임하는 그가 무지 존경스럽다. 그는  또 사진관 근처에서 배회하던 남자를 사진관으로 초대하여 대접하다가 엄청난 비밀을 듣게 된다. '어린이 유괴사건 은폐와 암매장이라는 엄청난 범죄를 숨기고 사는 퇴직 형사'인 그는, 양심과 타협 사이에서 고뇌하며 석영에게 무거운 과제(범죄의 증거:필름과 사진)를 남기고 가버린다. 하쿠다 사진관은 퇴직 형사의 고뇌까지 떠안으며 성장을 향해 나아간다.


제비는 하쿠다 사진관이 속한 대왕물꾸럭 마을의 축제에서 신성한 사자로 선택을 받는다. 신성한 사자는 마을을 떠나서도 안 되고, 반드시 축제날에 의무를 해야 하는데, 바닷속 동굴까지 잠수하여 제물을 바치고 와야 하는 일이다. 신성한 사자가 수영을 못 하면 가장 무서워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양희의 말에 아이를 떠올리며 수영을 배우는 제비! 아이를 버렸어도 모성은 버린 게 아니었다. 옛 연인과 재회하여 다툼 끝에 신성한 사자로서의 의무를 저버릴 뻔하지만, 모성은 끝내 제비를 돌아오게 했다. 돌아와야만 했다.


어느 날, 혜용의 가족이 하쿠다 사진관을 찾는다. 무안구증 딸을 보아야 하는 슬픔이 버거워 도망친 적이 있는 아빠와 그런 아빠를 기다리고 용서한 엄마. 그들은 씩씩하고 밝지만 찰나마다 새어 나오는 아픔을 다 숨기지는 못한다. 사이드카에 올라 함성을 지르다가도  앞이 보이지 않아 슬퍼하는 혜용, 귤밭에서 귤을 따고 승마 체험을 하며 갖는 설렘, 두려움..... 혜용의 희로애락은 고스란히 부모에게 전이되고, 엄마 아빠는 그에 따라 기뻐하고 슬퍼하고 달래는 데 여념이 없다. 혜용 가족과 효재네 가족 그리고 사진관 팀이 함께한 월라봉 등반으로 그들 사이 마음의 벽은 얇아지고, 포토 뷰 파티로 그들은 대가족처럼 친숙해진다. 따뜻하면서도 가슴 시린 대화들이 오고 가는데, 그중 눈물샘을 자극하  혜용엄마의 말 두어 마디를 옮겨 보련다.


'아이들은 사랑할수록 사랑스럽다'

'어떤 때 어떤 일을 용서할 수 없다 해서, 다른 때 다른 일로 사랑할 수 없는 건, 그런 건 아니라는 거야!'(역시나 사랑은 최상위의 치료제임에 틀림이 없는 듯하다)


석영은 일생의 우상-스테판 거츠(우상을 직접 만난 석영은 정말 정말 행운아!)로부터 용기를 얻어 퇴직형사의 만행을 고발하고, 제비는 대왕물꾸럭 마을의 축제에서 추운 날씨에 홑옷만 걸치고 신성한 사자로서의 의무를 온전히 해낸다. 아이를 버릴 당시의 연약한 제비가 아닌, 당차고 야무진 여인으로 엄마로 성장한 제비를 보는 기쁨이 읽는 내내 마음을 휘감았다. 좋은 양부모를 만난 아이와 제비와의 반가운 해후를 기대하며(머나먼 훗일이 될지라도), 아이의 소식을 묻지 않던 제비의 옛 남친에게는 분노의 철퇴를 아흔아홉 번쯤 내려치고 싶다.


하쿠다 사진관은 그냥 사진관이 아니다. 나는 하쿠다 사진관을 영화제작소라 부르고 싶다. 석영은 촬영 감독, 제비는 총괄 감독, 모든 고객들은 개성 만점인 배우들인 영화제작소. 벼랑 위의 사진관을 통해 묻지 않아도 아픔을 털어놓고 스스로를 치유해 가는, 어른애들이 와서 조금은 더 성숙한 어른이 되어 돌아가는, 시나리오! 하쿠다 사진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그리고 석영과 제비의 연출이 빚어낸 영화는 든든한 반석이 되어 하쿠다 사진관을 지탱해 줄 것이다. 석영과 제비가 제주의 괸당으로 뿌리내릴 수 있게. 


아, 하쿠다 사진관에 가고 싶다! 준비된 사진작가와 제주의 아름다운 경치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귀염둥이 벨과 계단을 올라가 옥상에서 바다를 감상하고, 싱싱한 해산물 요리와 갓 구운 빵과 음료를 물리도록 맛보고, 포토 뷰 파티를 해 보았으면......



*물꾸럭: 문어의 제주 방언

*괸당: 서로 사랑하는  관계, 혈족이나 친족을 의미하는 제주 방언

*하쿠다: 뭔가를 하겠다, 할 것입니다 라는 제주 방언


하쿠다 사진관 | 허태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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