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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Oct 10. 2023

시월의 멋진 날

선물 같은 가을

서늘하다 못해 춥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공기가 차가워졌다. 느릿느릿 다가온다 싶던 계절이, 성큼성큼 다가와 휙휙 스쳐가니 현기증이 일 것만 같다. 지난봄처럼 가을도 그리 바삐 왔다 갈 것인가. 사계절 중 유독 짧아 아쉽기만 한 가을. 이 가을을 만끽할 날이 2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니, 가을 정취나 실컷 맛보러 가 볼까. 이런 날 집에만 있는다는 건, 정말이지 청아한 가을 날씨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산이 좋아 시간만 나면 산으로 향하는 그를 따라나섰다. 하루 종일 산에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는 그. 온종일 산에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요, 물으면, 신령님과 대화도 하고, 새소리도 듣고, 낮잠도 한숨 자고 하다 보면 금세 저녁이라며, 심심할 틈이 어디 있냐고 반문한다. 해 저물도록 산에 있을 자신은 없지만 일단 종종거리며 그의 뒤를 따르다, 보폭을 맞추려  팔짱을 껴 본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걸으며 여기저기 해찰하느라 바쁜 우리. 항시 사람들로 붐비는 전통 시장을 가로질러 초등학교를 지나 한참을 걸어야, 그가 가는 산이 나오는 탓에 우리의 해찰거리는 무궁무진했다. 어라? 이 가게 언제 바뀌었지? 저거 맛있겠다, 과일 값이 언제나 좀 안정이 될까? 저 빵집 참 제품을 고급지게 진열해 놨네 등등,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만평의 소재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논평에 흥미가 식어갈 즈음 하늘을 바라본다. 굼뜨게 가다, 서다, 모였다, 흩어졌다, 를 되풀이하는 구름을 쫓아, 마음은 벌써 푸르디푸른 호수에 반쯤 발을 적셨다.

막여운이산(莫如雲易散), 수사월빈원(須似月頻圓)

송(宋) 나라 안수(晏殊)는 임강선(臨江仙)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시인은 원만함과 화합의 상징인 달에 무게를 두었건만, 왠지 구름의 자유로움에 마음이 더 끌린다. 청자빛 하늘과 구름에  반한 사람들이 멈춰 서서 셔터를 눌러댄다. 너도나도 한 컷, 두 컷, 가을을 담는다. 머지않아 단풍이 올 거라고, 귀띔을 하고는 멀찍이 달아나버리는 서늘바람. 그 싸늘함에 놀라, 옷깃을 여미고 스카프를 매만지는 사람들.


벌써, 이럴 때가 됐나. 빨라도 너무 빠르다. 숨 고를 틈은 좀 줘야 되지 않나. 야속하다, 계절이여, 진정 야속하다. 바야흐로 국화의 계절! 화원마다 곱디고운 국화 화분이 즐비하다. 대례복 차림의 왕비처럼 우아하고 화려한 국화꽃. 그 향기가 이끄는 대로 발길은 머물고, 막상 꽃에 둘러싸인 주인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덤덤하기만 한데, 지나는 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황홀해한다.


화원이 끝나고 은행나무의 사열을 받으며 도로 가를 죽 걷다 보면 그가 즐겨 찾는 산이 나온다. 잘 가꾸어진  근린공원을 놔두고 그는 일부러 인적이 드문 산을 찾는다. 마을 근교의 산이라 그리 험하지 않지만 찾는 이들이 적어, 길이 끊긴 곳도 많다. 그는 이곳에서  곧잘 고라니를 보았다는데,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고라니의 눈망울과 마주쳐 보았으면. 고라니와의 조우를 고대하는 마음을, 어디에 견줄 수 있을까. 산타를 기다리는 어린애와 견줄까.....


이게 무슨 나무게?

화살나무 아니오?

똑똑하네. 그럼 저거는?

뽕나무.

심심한지 생뚱맞게 수수께끼를 내는 그. 노주나무 잼피나무까지 대답하자 그는 질문을 멈춘다. 더 물어도 되는데.....  무심히 나무 노래를 읊는 그의 옆지기.


사시사철 사철나무, 십리 절반 오리나무, 죽어도 살구나무, 낮에도 밤나무, 목에 걸린 가시나무,  여기 봐요 주목, 곧은 성품 대나무, 거짓 아닌 참나무, 우물 가물푸레나무, 떨지 마라 사시나무, 마늘 아니고 생강나무,  콩 만하네 콩배나무, 팥 만하네 팥배나무,  두루두루 두릅나무, 두껍다 가죽나무, 신에 깔아 신갈나무, 떡에 깔아 떡갈나무, 그림그림 회화나무, 향기로워 쥐똥나무, 막아 막아 마가목, 소사 소사 맙 소사나무, 앉지 말고 서어나무, 코를 풀어 팽나무, 권 말고 비자나무, 참빗살나무, 좀작살나무, 산딸나무, 말오줌나무, 노린재나무, 때죽나무, 산사나무, 산수유나무, 매자, 명자, 탱자나무.....


하고 많은 나무 중에서도 이곳은 참나무가 참 많다. 참나무 그늘에 뿌리내린 애기소나무도 간간이 보인다. 애처롭다. 바람 타고 예까지 날아왔구나. 참나무 사이로 고개를 내밀려면 몇 년이 걸릴까나. 잘 자라거라, 아가야..... 열린 밤송이를 헤적거려 쥐밤을 줍느라 또 찰. 누군가 알뜰하게 주워가고 거의 없다. 그저 재미로 밤을 찾아보다, 다람쥐한테 미안한 마음에 움찔한다. 천적이 따로 있나, 먹이를 가로채면 천적이나 마찬가지지.....


그가 이끼 낀 외나무다리를 건너간다. 하필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냐고 투덜거리다 말고 조심조심 따라 건넌다. 투덜거림도 자꾸 하다 보면 습관이 되는 것 같다. 낙엽이 쌓인 내리막길은 외나무다리보다 더 조심스럽다. 한 차례 미끄러지고는 더더욱 주의하여 발을 떼어야 했다. 거미줄을 피하고 넝쿨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가며 탐험가처럼 전진을 하다, 햇빛과 바람이 한가로이 노니는 곳에 자리를 폈다.


칡넝쿨에게 잠식당한 참나무들이 부지기수다. 칡넝쿨은 놀랄 만한 생명력으로 벚나무 조림지까지  뿌리를 뻗고 있다. 불법 경작을 막으려고 구청에서 벚나무를 심은 곳이다. 가로놓인 넝쿨을 잡아당겨 보니 옹글게 송곳니를 깨물고 있는 듯, 도시 빠지질 않는다. 소름이 끼치도록 질기다. 칡넝쿨은 사냥감을 결코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생태계를 교란시킬 작정이냐고 놔두라 하는 그.


해도 너무하잖아. 참나무도 온통 덮어버리고 여기 벚나무 영역까지 손을 뻗으니 칡넝쿨이 얄미워.


남의 자리까지 넘보는 넝쿨이 못마땅하여 몇 차례 시도를 더 하다 그만두어야 했다.

 


정글을 누비고 헤치고 길을 만들고 나아가, 햇볕과 바람과 그늘 사이 신선처럼 앉아 건빵을 깨물면서도, 방해꾼 때문에 광합성을 못하는 참나무가 근심스럽고, 거미줄에 결박된 포획물을 애도하고 싶고, 사위어가는 초록이 아쉬워 발을 동동거리고 싶은 건 왜일까. 결을 바꾼 바람과 공기, 그리고 멀어진 하늘과 구름  탓일까..... 가을에 대한 예의 탓일까. 산책을 나서건 시장을 가건 간에 자꾸만 생각을 캐내는 가을이란 계절. 가을에 매혹당한 여인은 실타래처럼 감기는 생각을 어찌할 바 몰라 하릴없이 하늘 호수만 바라본다. 새뜻하게 빗겨 놓은 아가의 머릿결이로구나. 바람이 빗겨준 모양이로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도 저녁노을이 환상적일 듯하여 설레는  내게 그는 말한다. 삼겹살과 상추 좀 사 가자고. 상추를 씻다 잠시 뒷베란다에 나가 보았다. 과연 노을이 기가 막히다. 시간이 어느새 저 혼자 리본을 풀고 포장을 열었네, 시월의 멋진 노을이란 선물을! 시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간......


저녁노을이/ 하얀 은지(銀紙)를 / 나의 가슴에 바르고/ 지나가던 날/

구름을 향하여/ 한층 가벼워지는 지구에/ 실오리 같은 가을이 쏟아져 왔다/

 - 김경린: 선회(旋回)하는 가을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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