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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Dec 05. 2023

무지개 곶의 찻집

에쓰코의 주문에 빠지다

어제까지 무척 바빴다. 김장을 위한 밑작업을 위해 하루에도 시장을 두세 차례나 오가야 했다. 한꺼번에  장을 보면 좋으련만, 아직도 병아리 주부처럼  즉흥적으로 시장을 보기 일쑤다. 필요한 품목 외에도 마음을 사로잡는 싱싱한 야채와 과일들을 어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덕분에 짐은 많아져, 양손과 캐리어에 득그득, 5분 거리의 시장이 십 리는 족히 되어 보였다.


절임배추를 주문해 놓아 수고가 반은 줄었지만, 양념 준비도 만만치 않다. 쪽파, 갓, 마늘, 생강, 다발무, 배, 사과, 디포리, 건표고버섯, 새우젓, 액젓, 생새우 등을 사러 시장을  훑으면서 작년보다 두 배나 오른 물가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야 했다. 심지어 생새우는 네 근에 만 원 하던 것이 한 근에 만오천 원이나 했다.


다듬고 씻고, 시래기 삶아 말리고, 마늘 생강 과일을 갈아 오고 하다 보니 하루 해가 금방 저문다. 급히 식사 준비를 하고, 사 후에는  또다시 무채와 깍두기 썰기.....  외출했다 돌아온 아이가 놀라 묻는다. 무슨 김장 준비를 아침부터 밤중까지 하냐고. '그러게 엄마가 서툴러서 그런가, 괜히 마음만 바쁘구나. 찹쌀풀은 내일아침 일찍 쑤어야겠다.' 선포라도 하듯 되뇌며 피곤에 절여진 몸을 눕혀야 했다.


맛있어야 할 텐데, 아침부터 찹쌀풀을  저으며 걱정부터 앞선다. 또 시작인가, 쓸데없는 걱정일랑 붙들어 매고 열심히 주문부터 외우시지? 누구처럼? 무지개 곶의 찻집 여주인 에쓰코처럼. 맞아, 에쓰코 님의 주문이 있었지.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그래, 에쓰코 님처럼 주문을 외우며 양념을 만들고 배추 속을 넣고 해 보자. 작년보다 수십 배 맛있는 김치를 만들어야지......


좁은 터널을 빠져나와, 실눈을 뜨고 조심조심 살펴야 찾을 수 있는 무지개 곶의 찻집을 만난 건 오래전이었다. 십여 년 전, 샘터로부터 선물을 받고 무심히 가 본 무지개 곶의 찻집! 그 당시에도 에쓰코의 주문은 마음의 현을 퉁겨대며 깊은 울림을 주었기에, 김장을 며칠 앞두고 그녀 재회한 것은 어쩌면 계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간다.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행복해져라, 행복해져라!' 이러한 힌트-익히 알고 있지만 잊고 있던- 를 얻기 위해 300페이지를 단숨에 독파했다 말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바다가 보이는 엉성하고 삐걱거리는 찻집, 판자 사이로 파도나 모래마저 스며들 것 같은 찻집에, 고타로의 안내를 받고 들어간 아빠와 노조미. 그들은 아내와 엄마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부녀간으로 무지개를 찾아 여행 중이다. 노조미는 벽에 걸린 두 점의 여덟 빛깔 무지개 그림을 보며, '행복의 두근두근'을 아빠에게  고백하고, 행복의 두근두근은 곧 에쓰코에게도 번진다.


무지개 곶의 풍경이 그대로 담긴 그림을 보고 단박에 행복해져 버린 그들. 맛있어져라 주문을 외우며 조제한 에쓰코의 커피와 주스, 그리고 바나나 아이스크림은 행복의 거듭제곱을 덧입혀 주고, 그녀가 선곡한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아빠와 딸의 가슴에 응축된 슬픔을 새로운 삶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치유의 마력을 발휘한다.


진로를 고민하던 대학졸업반 이마겐에게도, 화가지망생 미도리에게도, 찻집을 털러 온 도둑에게도, 에쓰코의 커피와 음악은 위로이자 응원이고 동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중독- 그녀의 커피와 음악에 중독된 고객들은 그리움과 감사의 선물을 안고 다시 찻집을 찾는다.


무지개 곶의 찻집은 목마른 이들에게는 샘터요, 에너지가 고갈된 이들에게는 충전소, 마음이 시린 이들에게는 따끈한 난로가 되어 언제든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엉성하지만 아름다운 무지개 곶의 찻집으로 가 보자. 일부러 건, 연료가 떨어졌건, 길을 잘못 들어서건 간에, 자갈길의 자동차 바퀴자국이 나오거든, 긴장을 풀고 천천히 고타로의 안내를 받아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아 보자.


기나긴 세월 동안 남편의 유작과 똑같은 무지개를 기다리는 여인이, 맛있어져라 주문을 외우며 커피를 타고 당신만을 위한 음악을 선곡하여 들려주는 무지개 곶의 찻집. 고타로와 산책도 하고, 고지와 아슬아슬한 바위에 앉아 낚시도 하고, 폭주족이었던 고지의 옛이야기도 졸라 듣고, 창밖 풍경과 액자 속 여덟 빛깔 무지개를 번갈아 보며 안구정화(신세대들의 표현을 좀 빌리자)도 해 보자! 운이 좋으면 가까운 시일 내에 '세븐 시즈'의 5인조 밴드 공연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의 두근두근'이 찾아올 것 같지 않은가?


PS. 무지개 곶의 찻집에도 얼마 전부터 정기 휴일이 생겼답니다. 잘 알아보고 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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