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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탈리 Dec 22. 2023

언제든 가리, 사과가 맛있는 동네로

그녀의 사과 사랑은 무죄!


어렸을 적 우리 집 마당에는  사과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화단의 꽃나무 사이에 드문드문 서 있던 세 그루 홍옥나무. 따로 농약을 치지 않아 열매시원찮아도 맛은 제법 괜찮았는데, 두 그루는 일찌감치 사라지고, 울타리 근처에 있던 한 그루만이 중학교 시절까지 남아, 빠알간 홍옥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었다.


동생과 함께 사과나무 가지에 그네를 매어 타기도 하고, 사과나무 그늘아래 평상에서 숙제도 하고, 그림도 그리다가, 출출하면 사과를 따, 옷에 쓱쓱 문질러 베어 먹었다. 그러니 채 여물기도 전부터 고망쥐들의 손 닿는 곳에 달린 열매는 하나 둘, 자취를 감출 수밖에. 풋사과는 풋사과대로 맛있고 빨갛게 익으면 서너 배는 더 맛있는 홍옥을 누군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렇듯 아낌없이 주던 사과나무는 시름시름 탄저병을 앓다가, 사과도 물량 나게 열리더니 끝내 베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지금 같으면 사과를 사랑하는 1인으로서, 머리에 붉은 띠라도 두르고, 아버지께  '결사반대'를 외쳤을 텐데, 그때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유일한 간식 공급원이 사라져 서운했어도 사과는 실컷 먹을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동네 인심이 후해서 상품성이 약간 떨어지는 것들은 거저 얻다시피 했다. 해 질 녘, 과수원에서 일을 마친 엄마가 머리에 이고 오시던 사과 바구니는 얼마나 무거웠을까마는, 자식들 먹일 욕심에 그 무거운 짐을 거뜬히 이고 오신 엄마의 수고로움을 헤아리기보다 그득한 사과에 대한 반가움이 앞서는 철부지 딸이었다.


사과를 베어 물고 마루를 닦을 정도로 사과가 좋았다. 한 손에 사과, 다른 손에 걸레를 들고 청소하는 딸을 보고 그렇게도 사과가 좋으냐고, 어이없다는 듯 웃으시던 아버지. 사과 좋아하니 과수원으로 시집가라던 엄마. 사과를 베어 물고 엄마께 주절주절 수다를 늘어놓다가, '잔소리 말고 얼른 사과나 먹어!' 퉁셍이를 먹기도 했다. '네로 25시의 날라리아'처럼.


유튜브 네로 25시를 참고하여 그림


어느 겨울날, 직행버스를 타고 전주에 갔다 왔는데 차멀미 때문인지 속이 메스꺼워 누워 있었다. 밥 생각도 없기에 시원한 사과나 먹었으면, 눈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이 왈칵 열리더니 이윽고 찬기와 함께 방안 가득 번져드는 사과향! 엄마가 사과 한 가구(바스켓)를 구해서 들고 오 거였다. 철부지 딸은 냉큼 사과부터 하나 집어 들고서 어디서 났냐고, 반가움, 죄송함, 감사함을 뭉뚱그려 질문을 던졌다. 봄에 일해주기로 하고 친구네 집에서 가져오셨다는 말씀..... 엄마가 당신의 몸을 저당 잡혀 사 오신 사과는 차멀미를 한 방에 날려버릴 만큼 달고도 시원했다. 딸내미 한 마디에 추운 겨울, 사과를 구하러 가신 울 엄마......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한밤중 그이를 심부름시킨 것도 사과 때문이었고, 해산 직후에도 오로지 생각나는 건 사과였다. 차가운 거 먹으면 이가 상한다시며 어머니는 사과 대신 바나나를 사 오셨다. 백설기 같은 맛일 거란 상상과 달리 미끌거려 먹지 않던(편견의 위력이란!) 바나나를 그때 정식으로 영접하다.


친구 H는 과수원집 막내딸이었다. 철 모르던 시절이라 눈만 뜨면 H와 어울려 놀았는데, 당시 사춘기이던 셋째 오빠는 자본주의 운운하며 그 애와 어울리지 말라고 야단을 쳤다. 오빠는 몇 번이고 언니로 하여금 H네 집에서 재밌게 놀던 나를 데려오게 했다. 지금은 멋모르고 같이 어울리지만 그러다 상처받는 건 너라며, 미래의 계층사회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던 오빠. 아무리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는 하지만 어린 동생 미래를 염려하여 생의 친구를 솎아려는 오빠가 싫었다. 오빠의 방해공작을 피해 H랑 계속 친해버렸다.


H는 사과 창고에 자주 나를 데리고 갔다. 마당 한쪽에 있는 거대한 창고의 문을 여는 순간부터 온몸에 느껴지는 사과향기는 황홀 그 자체였다. 중문을 열면 향내는 한층 진하게 우리를 포위해 왔다. 코를 벌름거리며, 나무궤짝의 사과를 바구니에 골라 담는 친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사과를 좋아하는 친구를 대접하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었다. 의식이 끝난 사제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던 나. 부끄럼도 자본주의도 모르던 어린 시절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듯싶다.


친구네 과수원에서 뛰놀다가 햇볕에 알맞게 달궈진 사과를 한 입 베어 물 때의 감동이란! 사과나무 아래 늘어놓아 자연숙성시킨 사과의 맛은 냉장사과의 맛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모든 게 알맞았다. 알맞게 달큼하고, 알맞게 사각거렸고, 알맞게 과즙이 흘렀다. '가을날 태양의 미소'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던 그 맛!


농사에 열정적인 친구 아버지는 가끔 신품종의 사과 몇 종류를 시식시켜 주고 맛이 어떤 게 나은지 물으셨다. 신세계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한 것이다. 마젤란이나 콜럼버스라도 된 듯 어깨가 절로 으쓱해지던 그때, 접목에 의해 신품종이 나오는 이치를 마냥 신기해하던 어린 시절, 스타킹, 유아이, 국광, 홍옥, 부사, 예금, 골덴 등등, 그 당시 친구가 귀띔해 준 사과의 품종들을 시험에 나올세라 외웠었다.


오십 줄 아낙이 되어서도 사과가 맛있는 동네에서 자라난 소녀의 사과 사랑은 변함이 없는데, 고향 마을엔 남아 있는 사과나무가 그다지 많지가 않다. 기후도 변하고 농부들의 세대도 바뀌어, 감나무, 포도나무, 블루베리, 버섯, 오디 등의 작물로 품종이 교체된 탓이다. 또 어떤 곳은 뜬금없이 창고가 들어서 옛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다. 온 동네를 한 바퀴 돌아도 사람구경조차 힘든 고향 마을에, 사과꽃 만발한 봄은 과연 다시 올 수 있을까. 조밥이 맛있는 고향으로, 언제든 가리라던 시인처럼, 언제든 가고 싶었는데, 지막엔 꼭 가고 싶었는데..... 꿈에서나 가능한 꿈어찌 달래며 오늘을 딛고 내일 향해 나아......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복사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사과가 맛있는 동네로!



*노천명 시인의 시: '고향'을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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