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의 사열을 받으며 오솔길을 걷는다. 겨울 산의 주인은 단연 빈 가지 사이사이로 충만을 길어 올리는 나목(裸木)들이 아닐까. 눈여겨보면 나목은 너무도 아름답다. 마치 우리네 삶에도 여백이 필요함을 시사하는 양, 앙상한 가지만으로도 공간을 넉넉히 채워 고즈넉한 울림을 던져주는 나목. 최소한의 통로만 남겨놓고 감각의 문을 굳게 잠가버린 채 시린 겨울을 겪어내는 활엽수 나목을 보라! 듬성듬성 자리한 리기다소나무를 빼면 보이느니 참나무 아카시아 산벚꽃 같은 나무들인데, 요 나무들이 떨궈낸 잎새를 덮고 안거에 든 모습을 볼 때마다 혹한기임을 잊게 만드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생장과 조락과 순환을 조율하는 자연의 손길, 우주의 신비, 그리고 위로 같은 따사로움 덩어리들......
겨울과 봄의 중간. 아니, 경칩이 머지않았으니 봄이 더 가깝다 해야 맞겠다. 지금 이 순간도 살아 있는 나무는 살아 있는 대로, 쓰러져 누운 나무는 쓰러져 누운 대로, 산은 온갖 생명체의 봄맞이 준비로 부산하리라. 계절의 저울추는 이미 봄으로 기울었으니, 몇 밤만 자고 일어나면 가지마다 몽올몽올 움이 터, 버드나무는 연둣빛 실안개 피워 올리고, 보도블록 좁은 틈바구니마다 민들레는 쇠스랑 같은 잎을 삐죽이 내밀겠지. 찬바람을 견디며 한겨울을 난 까치집도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며 가슴을 설레어하겠지. 씨앗을 고이 품고 기나긴 꿈을 꾸던 대지도 기지개를 켜며 연초록 합창에 동참하렷다! 새봄의 전주곡은 이미 시작되었으렷다!
백합나무 조림지를 지나자, 고만고만한 나무들을 제치고 길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떡갈나무 한 그루가 눈길을 잡는다. 튼실한 밑동부터 균형 잡힌 몸체, 기세 좋게 뻗어나간 가지가 아름답고 경이롭기 그지없다. 이만큼 자라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비바람을 겪어냈을까. 직목선벌(直木先伐)이라는데, 저 나무는 용케도 벌목을 피해 남아 있구나. 옆록소가 죄다 빠져나간 마른 잎새들(지난가을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던 마른 잎들)이 바람결에 달싹달싹 군무를 추어대며 스산함을 던져 주는 가운데, 나그네는 아이에게 장자의 큰 나무 설화를 풀어놓고 싶어 한다.
장자가 제자들과 여행을 떠났다가 깊은 산속을 지나게 되었더래. 잎과 가지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본 장자는 지나는 나무꾼에게 왜 이 나무를 베지 않느냐 물었더래. 나무꾼은 쓸모없어 베지 않는다 했고, 장자는 제자들에게 이 나무는 쓸모없어서 천수를 누리게 되었구나 했더래.
일행이 산을 내려와 지인의 집에 묵는데, 주인이 손님을 위해 하인에게 거위를 잡으라 했더래.
"울지 못 하는 거위를 잡을까요, 아니면 잘 우는 거위를 잡을까요?"
하인이 물었겠지?
"울지 못하는 거위를 잡아라"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쟁이요?
"스승님, 좀 전 산에서는 나무가 쓸모없어서 천수를 누린다 했는데, 여기서는 쓸모없는 거위가 희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스승님은 어느 편에 서시렵니까?"
스승은 웃으며 말했더래.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에 서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이란 도(道)인 듯 도가 아니어서 자칫 화를 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중간이 더 어려운 거 아닌가. 이쪽도 저쪽도 치우치지 않는 처세를 비유함인가. 화를 면하기 어려운데 왜
장자는 중간에 서겠다 하였을까. 장자가 말하는 중간은 공자의 중용과는 어떻게 다른가, 비슷한가?
문명인답게 검색, 막간 쾌속으로 학습해 보아도 중용인 듯, 중용 아닌 중간이라...... 아, 모르겠다.
괜스레 선인들의 일화를 꺼내 놓고 보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지리산에서 한 30년 수도를 닦아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심오한 얘기를 꺼내 들고 나그네는 당황스럽다. 나무와 거위 얘기가 그저 인상 깊었을 뿐인데, 함의를 이해하기가 너무 버거운 것이다.
쓸모는 누가 정하는 것인가? 우리 사회 아니면 자기 자신? 기준을 누가 정하건 유용함이 우리 행동을 판가름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경우는 많았다. 정해진 틀 안에서 판단하고 판단받는 데에 우리는 너무도 익숙하다. 훌륭한 사람도 인류의 삶에 기여함이라는 '쓸모'에 부합하니 훌륭하다 추앙을 받을 테고, 평범함은 모두의 기억에서 쉬이 잊혀 간다. 하물며 이 쓸모라는 기준을 내려놓고,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장자의 철학적 사유라면, 우리 사회에서 중간에 서는 일은 평범한 사람에게 몹시도 버거운 일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엄마, 이것도 브런치에 써!"
아이는 장자가 말하는 중간과 중용의 차이에 대해 고민하는 대신, 엄마를 향해 명령어부터 던지기로 작정했나 보다. 씩씩하기 짝이 없는 권유를, 명령에 가까운 권유를 가슴에 억지로 구겨 넣고 산책로를 빠져나온다.
스승의 말씀을 가벼이 넘겨선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언제 어디서나 스승님은 제자를 편달하는 데 여념이 없으시니...... 사진도 많이 찍고, 그림도 그리고, 자료도 열정적으로 찾으라 한다. 나이 든 청어람 제자를 길러내고 싶은 젊은 스승!
'떡갈나무야(국화야), 너난 어이하야(김천택의 시조, 국화 초장 부분이 아마 이랬지요?) 이렇게 무거운 과제를 내게 남겨주느냐...... 답답해라, 대답 좀 해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