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각, 열쇠로 문을 따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거실에 환히 불이 켜진 채 온 집안은 고요하다. 아이들 방에 들어가 본다. 큰아이의 좁은 침대에서 두 녀석이 나란히 잠들어 있다. 두 살 터울인데도 마치 쌍둥이 같다. 엄마 아빠가 없는 밤 시간에 두 아이는 이렇게 서로 의지하며 두려움을 달래는 것이다. 작은아이를 안아서 옮기려는 데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를 안고 있기가 힘이 부친다.
나란히 잠든 아이들을 보면 참 사이좋은 자매 같은데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 수시로 툭탁거리며 다툰다. 동생은 매사에 언니를 경쟁자로 여긴다. 말끝마다 언니는 어떤데 나는 하며 동등한 대우를 요구한다. 또 네 것 내 것이 분명하여 도대체가 공유를 하려 들지 않는다.
둘이서 놀 때에 큰애는 언니로서 심부름을 곧잘 시키고 명령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면 작은애는 불만을 삼킨 채 언니의 명을 따르다가 엄마에게 언니의 부당함을 이르곤 한다. 못 이기는 척 아이를 감싸며 언니를 나무라는 시늉을 해야 된다. 그것이 아이의 바라는 바이고 정의니까.
이 작은 녀석, 혜원이는 분홍공주다. 누가 여자애 아니랄까 봐 분홍색을 무척 좋아한다. 옷도 분홍색이 대부분이고 신발도 가방도 신주머니도 모두 분홍색이다. 또 치마 입는 걸 어찌나 좋아하는지 오늘 같이 비가 오고 추운 날에도 치마를 입고 등교했다. 예쁜 것, 특히 반짝거리는 액세서리와 인형, 화장품을 무척 좋아하고 거울 앞에서 치장하는 걸 즐겨한다. 생각해 보라, 예쁜 물건을 볼 때 반짝거리는 아이의 눈을! 하여 뽑기로 하나 둘 모은 액세서리로 가득 찬 아이방은 가게를 차리고도 남을 지경이다.
요즘 들어 분홍공주는 외모에 대한 관심이 더욱 많아졌다. 언니는 쌍꺼풀이 있는데 왜 저만 없냐고 자꾸만 묻는다. 조만간 쌍꺼풀 수술을 해 달라고 조르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제발 생긴 대로 살자꾸나, 달래면 들을까? 들어야 할 텐데......
얼마 전, 아이의 가방을 빨려고 책과 소지품을 꺼내다가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열어 보니 거기엔 글쎄, 같은 반 남자애를 좋아한다는 고백이 적혀 있었다. 세상에! 초등 2학년에 벌써 러브레터? 깜찍한 것 같으니라구..... 차마 전해 주지는 못하고 가방에 넣어만 가지고 다니는 모양새였다. 평소 목청도 크고 씩씩하여 풀어놓은 망아지가 따로 없구나 싶었는데 의외로 섬세하고 소심한 면이 있구나 싶었다. 그날부터 아이가 달리 보였다.
딸들을 키우다 보니 딸은 엄마에게 친구구나 싶을 때가 많다. 나는 두 어린 친구를 둔 것이다.
'엄마는 아빠의 어떤 점이 맘에 들었어?'
'엄마랑 아빠 중 누가 먼저 프러포즈했어?'
가끔씩 이렇게 물어올 때면 나이답지 않은 성숙함에 징글맞은 느낌도 지 않지만, 천진난만하고 생기발랄한 어린 친구도 참 좋지 않은가.
학교에서 알뜰시장이 열리면, 꼭 엄마의 옷가지나 가방을 사들고 와 입어보기를 채근하는 자상한 친구들...... 아빠가 거실에 누워 있으면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는 분홍공주, 내가 낮잠이라도 잘라치면 옆에서 뭐라 뭐라 재잘대며 놀다가 어느 틈에 강아지처럼 꼬옥 붙어 잠들어 있던 분홍공주! 그 작은 머릿속엔 어떤 생각들이 자리하고 있을까......
아이는 우주이기도 하다. 온갖 신비와 가능성이 가득한 소우주, 아니 대우주! 성원, 혜원이라는 두 우주를 품고 있는 지금, 알맞은 햇빛으로 우주를 비추고 자양분을 공급하며 최선을 다해 보물을 캐낼 수 있도록 격려하는 부모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받아쓰기 백 점 맞았다며 치킨을 사 오라는 분홍공주님의 엄명이 수화기 사이로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