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가을의 초입이었다. 외환위기로 그이가 다니던 직장이 문을 닫게 되었다. 조그만 제과점이었는데 밀린 월급도 있고 해서 우여곡절 끝에 그곳을 인수했다. 당시 우리 통장엔 오십만 원의 현금이 전부였다. 낡은 빌라를 담보로 대출을 받고 여기저기서 빌린 돈으로 겨우 인수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살던 집을 내놓고 가게에 딸린 방으로 이사를 했다. 살림살이를 좁은 방에 모두 쑤셔 넣고 그날부터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와 친구들은 열심히 제품을 만들며 개업 준비를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12시까지 포장과 판매를 하는 한편 틈틈이 세 끼 식사 준비와 청소, 아이들 보살피는 일로 개업식을 마칠 무렵엔 나는 거의 녹초가 다 될 지경이 되었다.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고 허리는 끊어질 듯 아파왔다.
주로 집에서 엄마랑 생활하던 아이들은 바뀐 환경으로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처음 가게 밖이라고는 얼씬도 안 하던 작은애는 며칠이 지나자 온 동네를 다 휘젓고 다니며 흙 먼지투성이가 다 되어 돌아오고는 하였다. 그러니 제 때 밥을 챙겨 먹이기엔 거의 불가능하여, 고민 끝에 세 살 다섯 살이던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냈다.
가게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일도 익숙해질 무렵, 슬며시 우울이란 녀석이 지치고 힘든 심신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사실, 좁은 가겟방은 햇볕도 잘 들지 않아 캄캄해서 불을 켜 놓고 자야만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이리저리 쌓아놓은 살림살이, 방을 가로지른 빨랫줄, 포장박스와 포장비닐 등으로 가득한 방은 좁기도 좁아터져서 네 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만을 허락할 뿐이었다.
빵내음과 오븐의 열기, 그을음 등을 빨아들이기 위해 아랫목 위로는 닥트가 지나는데 이것이 제 역할을 온전히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채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와 그을음과 빵내음은 그대로 방의 벽지와 이불과 옷가지를 누렇게 변색시켜 나갔다.
우리의 생계요 터전인 가게가, 아담하고 깔끔한 나의 꿈을 산산이 조각내어버린 것 같아 우울했고, 우울함은 그와의 다툼으로 자연스레 번져갔다. 몇 번은, 힘들어서 그런가 보다며 위로를 해 주던 그도, 반복되는 나의 짜증과 불평에 차츰 지쳐갔다. 같이 맞붙어 싸우기를 수없이 하였다.
싸움과 다툼의 불똥은 아이들에게도 튀기 마련이어서, 나는 아이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호되게 야단치고 화를 내고 마는 것이었다. 엄마가 이렇게 힘드니 너희라도 엄마를 이해해 주렴. 아마도
그런 심정이었나 보다.
딸아이가 어렸을 적 그린 그림이에요. 참 잘 그렸지요?
그런 와중에 큰 딸애가 그만 병에 걸렸다.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말은 그런 경우에 딱 들어맞는 말일 것이다. 며칠째 발열과 함께 맹장 장염의 비슷한 증상을 보이던 딸애.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날마다 반복되는 채혈과 수많은 검사, 검사들..... 항생제를 투여하기 위해 가녀린 팔에 항상 링거가 꽂혀 있던 아이는 그만 주사 공포증에 걸리고 말았다.
바늘 주사 싫어!
바늘 주사 싫어!
아이의 절규에 무력한 엄마는 눈물만 삼켜대었다. 핵의학검사를 받을 때였다.
커다란 기계장치 속에서 홀로 누워 검사를 기다리던 아이가 조용히 흐느끼며 말했다.
'눈물 닦아 줘!'
순간 눈물이 또르르 흘러 아이의 귓가를 적시고 나는 닦아 주고...... 몇 번을 그리했던가.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데다가 가게 걱정까지 파고 드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이 혼자 바쁘게 일하고 있을 텐데..... 어쩌면 좋아..... 다행히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시는 시어머니께서 아이 곁을 지켜주셨다. 좁은 간이침대에서 주무시며 고생하신 어머님! 사랑하는 손녀를 위해 보름 가량을 간호해 주신 어머님! 너무도 죄송스럽고 너무도 감사합니다!
그이는 이를 악물고 생업을 이어갔으며 나는 날마다 제품 포장이 어느 정도 끝나면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게로 오가는 순간순간마다 외줄타기 광대처럼 불안에 떨어야 했던 무력한 어미. 그 기나긴 시간들을 어찌 견뎌내었던가. 길기도 긴 그 시간. 물론 수없이 기도도 드렸다. 딸내미 온전히 낫게 해 달라고. 차라리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께서 아이를 안고 치료해주시는 모습을 상상하며 기도했다.
아이들은 화초와 같다. 어디에, 어떤 환경에 있건 사랑과 보살핌이 간절히 필요하다. 그것도 모른 채 아니 외면한 채, 무심한 엄마는 단지 힘들고 괴롭단 이유로 여린 화초 같은 아이들을 게을리 보살폈던 것이다. 뉘우침 속에서 자꾸만 호되게 자신을 질책했다. 아이들과 평범하게 지내던 일상이 그렇게도 그리울 수가 없었다.
피를 말리는 듯한 나날이 계속되다가 드디어 병명이 잡혔다. 가와사키라는 병이었다. 원인은 모른다고 했다. 아직 학계에 밝혀진 게 없다고. 그래도 치료법은 있으니 다행이었다. 치료가 잘 되어 아이는 더 이상 링거를 맞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가와사키의 부작용으로 심장혈관에 주머니 같은 게 생겨나 피떡이 생기지 않게 '로날'과 '디피리다몰(DIPYRIDAMOL)'을 장기 복용해야 한다고 했다. 혈전용해제였다. 또한 정기적인 진찰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링거를 빼면서부터 아이의 얼굴은 갓 피어난 꽃처럼 밝아졌다. 같은 병실에서 사귄 친구와 잘도 뛰어놀았다. 어떤 보호자가 쟤들도 환자 맞냐고 물어볼 정도로 아이는 활달해졌다. 수액 바늘을 빼고 난 후로도 아이는 의사 선생님이 회진할 때면 항상 긴장하고 무서워했다. 또 바늘 주사를 주지 않을까 싶은 까닭이었다. 그러다가 퇴원 당일, 의사 선생님의 퇴원해도 좋다는 말에 할머니의 옷깃을 끌며 빨리 집에 가자고 보채고 또 보채는 것이었다. 입원 16일 만이었다.
아이가 조금 더 성장했을 때 그린 그림이에요
퇴원한 아이는 여우가 다 되었다. 어리광이 부쩍 심해졌다. 동생을 대신해 애기 노릇을 하기도 했다. 어떤 응석도 다 들어주리란 계산을 하고 있던 것일까..... 그래 요것아, 응석을 부려도 좋으니 제발 건강하기만 하여라. 귀여운 여우, 영특한 여우였다.
꿈과 근사치인 아담하고 깔끔한 집에서 지금 두 아이가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엄마를 대신해 아이들과 저녁밥을 차려 먹는 등의 엄마 노릇을 하고 잠시 쉬다가 그는 교대하러 올 것이다.
그이는 거목 같다, 비바람과 그 어떤 어려움에도 끄떡없이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시냇물이 제아무리 명랑하게 흐르고 참새가 철없이 지즐대어도 마음 동요하지 않으며 한눈팔지 않는 거목. 그의 성실과 노력으로 일궈왔던 11년이란 세월이 오늘날 우리 삶의 이랑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새삼 깨닫는 요즘, 비록 불평으로 따르긴 했지만 그를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길이 없다.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그와 나 헤쳐나갈 수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