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의 오후

나는 상념 하네, 고로 나는 존재하네

by 나탈리


낮부터 부는 바람은 잔뜩 성이 난 것 같았다. 사월의 바람 치고 지나치리만큼 힘이 센 것이다.

벚꽃나무 가지가지 솜뭉치마냥 탐스러운 꽃숭어리가 그네를 타듯 흔들리운다. 마음속의 나도 그 끝을 잡고 잠시 매달려 본다. 바람이 그네를 힘차게 밀어준다.


'어지러워, 꽃잎 다 떨어질라....'

간간히 꽃비가 흩날리는 곁에서 수양버들은 쉬임 없이 연초록 머릿결을 감아댄다. 저 꽃잎 지면 바야흐로 초록의 세상이다. 꽃보다 더 예쁜 초록으로 온 누리가 초록초록 수놓을 준비가 한창이다. 봄비 몇 번이면 이 세상은 초록에게 빈 공간을 온전히 내주고 말 것이다.

'밤부터 비가 온다 했지.... 그러고 보니 봄비를 머금은 바람이긴 한데 마냥 반갑지만은 않네....'

퇴근길 혼잣말을 삼키며 하늘을 본다. 구름이 바삐 길을 간다. 바람에게 등이 떠밀려 종종걸음이다.



'빨리요, 오늘 밤 어디 어디에 봄비를 뿌려야 한다구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바람은 구름을 이끌고 있는 듯하다. 구름은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것이, 보아도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저 구름으로 온갖 동물을 만들어내는 줄 철석같이 믿었던 어린 시절, 언니 오빠에게 묻고 또 물어 그 믿음은 견고한 확신이 되어갔다. 아마도 언니 오빠들은 어린 동생의 상상력을 지켜주고 싶었으리라. 순진무구하던 그 시절, 구름은 얼마나 변화무쌍하면서도 신비롭고 아름다웠던가...... 사자, 호랑이, 코끼리, 거북이, 토끼 등등, 못 만드는 게 없는 능력자요 요술쟁이가 바로 구름이었으니. 어디 그뿐인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흩어졌다 모였다 하며 솜사탕을 만들어주고 곰인형도 만들어주고 포근한 양털이불도 되어주기까지 하였었다. 이러하니 모두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구름, 사랑받아 마땅한 구름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문득 구름을 사랑하던 시인 헤세가 생각난다



/하늘을 건너서 구름은 가고/ 들을 건너서 바람은 간다/ 들을 건너서 가는 길손은/

/내 어머니의 유랑의 아들/거리 위를 나뭇잎으로 날려가고/ 나뭇가지 위에서 새는 지저귄다./

-헤르만 헤세 : 들을 건너서-


'서둘러야겠는 걸...... 들을 건너서 오는 바람이 비를 데려오기 전..... 거리 위를 나뭇잎으로 날려가진 못해도 자전거로 날아가련다.'


괜스레 바쁜 마음에 페달을 힘껏 밟아본다. 혹시나 귀가 중에 비를 만나면 낭패이므로. 바람아, 등좀 떠밀어 주렴. 은근한 부탁대로 등을 밀어주던 바람이 느닷없이 변덕을 부린다. 옆에서 앞에서 밀치며 당기며 제멋대로 나를, 자전거를 밀어붙인다. 금세 가르마를 엉뚱한 곳에 타 놓고 저만치 달아났다가 또다시 다가와 옷자락을 슬며시 들추고 스카프를 마구 흔들어댄다.


'이런 장난꾸러기, 개구쟁이 같으니라구!'

연신 한 손으로 머리를 매만져보건만 소용이 없다. 순간 우아한 몸짓으로 춤을 추는 나무들 심정을 헤아려 본다. '참으로 대단하다, 너, 바람!' 감탄과 두려움을 동시에 자아내는 바람이다. 이렇듯 힘센 바람이 불 땐 주문이라도 외어야 할 것 같다.

'바람아, 날 데려가 다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곳으로!'

동화 속 주인공마냥 설렌다. 모험을 떠나는 돈키호테라도 된 듯 용감해지는 것 같다. 사거리에서 잠시 멈춘다. 높다란 빌딩이 휘적휘적 내게 다가온다. 그러나 내겐 돈키호테처럼 빼어들 칼이 없다. 멍하니 바라본다. 무언가 이상하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럽다. 이상한데 전혀 이상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이상함! 수수게끼였다. 바람 세고 어수선한 날, 하늘 바람 구름이 퇴근길의 나에게 던진, 수수께끼...... 쉬우면서 어려운......

착시였다. 구름이 움직이는데, 무심한 내 눈엔 구름은 가만히 있고 건물이 움직이는 듯 보였던 것.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돈키호테의 칼도 없을뿐더러 빼어들 필요도 없으니. 바람 덕분에 헤세를 생각하고, 꽃숭어리 그네도 타 보고, 잠시 돈키호테도 되어 보고, 바람 미용실에서 무료 서비스도 받아본, 요란하고 어지러운 그러나 황홀한 퇴근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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